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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16. 가정의 회복을 위하여(5) - 조영진 목사
"헤어짐의 아픔을 넘어서"
마태복음 19:1-12
부부의 관계가 깨어지는 아픔을 곳곳에서 봅니다.
이혼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해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아니 성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멧세지를 전해주고 있습니까?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가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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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금년도 표어에 맞추어 가정의 회복을 위하여 드려온 연속설교의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그동안 저는 우리의 가정이 세워지는 기초가 중요함을 말씀드리면서 반석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며 이 기초 위에 가정이 세워질 때, 비바람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설 수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서 "내 님은 어디에" 라는 제목 밑에서 배우자 선택의 문제를 살펴 보았고, "당연히 다르지요"라는 제목 밑에서 부부 사이에서 드러나는 성의 차이, 성격, 가정 및 성장배경의 다름에서 오는 문제와 갈등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11월 첫 주일에는 "기다리는 사랑" 곧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해 가는 거룩한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 갈 것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금번 연속 설교는 오늘 헤어짐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다음 주일 감사가 샘솟는 가정에 대하여 말씀드림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여러 해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CA에 있는 어느 미국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 목사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소송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 교인이 부부 사이에 어려움이 많아서 이혼을 하려고 했는데, 목사님이 적극 말리면서 좀 더 참고 살라고 권고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를 열심히 참으면서 살았는데, 결국은 헤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혼을 한 그 사람은 그때 이혼했더라면 고통도 덜 받았고, 또 좋은 사람 만나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 텐데, 더 참고 살아보라는 목사님 말씀 때문에 정신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므로 목사님께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오늘 이 말씀을 드리기가 무척 겁이 납니다. 사실 이혼의 문제처럼 예민하고 복합적인 주제도 많지 않습니다. 이혼의 문제는 오늘 교회 안에서도 많이 발견되며, 교인들 가운데는 이 문제로 고통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우리는 이혼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정말 결혼 생활이 무너져 내리고 가슴이 아파올 때 이혼의 길을 생각하게 되는 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성경은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안겨 줍니까?
I
오늘 우리 함께 봉독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유대 지방을 지나가실 때 주신 말씀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기로 정평이 나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골치 아픈 문제의 하나인 이혼 문제를 들고 나와 질문을 던졌습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 질문의 배후에는 이혼의 문제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으려는 겸손한 태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올무에 옭아 묶으려는 흑심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이혼의 문제는 큰 이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특별히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는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습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했던 샴마이파는 간음한 일 이외에는 이혼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에, 자유주의적인 힐렐파는 이 수치스러운 일을 넓은 의미에서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좇아 간다든지, 심지어 아내가 밥을 태워도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논란 속에서 그들은 이혼의 문제를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혼의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입장들이 있어왔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이혼은 어떤 이유로도 불가하다는 입장으로 로마 캐톨릭 교회가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간통죄나 중대한 학대가 발생해도 별거를 권고하지 이혼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이혼은 오직 간음한 경우에만 허용된다는 견해이고, 셋째는 간음 이외에도 결혼을 유지하기가 힘든 경우에는 이혼을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예를 들면 상대방에 의하여 내어버려 진다든지,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학대를 당하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본 견해입니다.
이혼의 문제는 지나치게 완고하고 보수적으로 생각하면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고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또 그 주장이 비현실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견딜 수 없으면 이혼해도 좋다는 식으로 너무 넓게 이해해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이혼의 문제를 성서적이고 신앙적인 기초 위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심리적이고 법률적인 차원에서만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중요한 것은 이혼의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빛에서 이 문제를 대면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 내 지혜로만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기다리고 희망하며 이혼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기초 위에서 이혼의 문제를 생각할 때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멧세지를 전해 줍니다.
II
(1) 첫째로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결혼이 무엇인가를 정의하셨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임을 밝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지으시고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살게 하셨습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과 아내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된 이 부부를 다시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 속에서 이혼은 결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닌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자신들이 최고의 권위로 여기는 모세의 말을 인용해서 그러면 모세는 왜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라고 명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것은 너희의 마음이 사악하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디자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된 부부가 서로를 붙들어 주고, 서로 의지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 두 사람이 다시 둘로 갈라서는 아픔과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혼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헤어지는 많은 경우를 보면 결혼이 무엇인지를 모를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결혼하게 되는 것이고, 함께 자고, 함께 살고, 돈이나 벌어다 주면 남편의 일을 다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습니다. 저는 결혼 전 상담시간을 통해서 꼭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결혼이 무엇인가? 두 사람이 결혼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 결혼함으로 어떤 골(Goal), 어떤 목적을 이루기를 원하는가? 많은 경우 이같은 물음에 대하여 준비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를 봅니다. 결혼의 의미를 참으로 모르니까, 조그마한 문제만 생겨도 쉽게 헤어질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혼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배우자의 선택에서부터 문제를 안고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결혼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임을 깨닫고, 준비하고 임한다면 많은 경우 이혼을 예방할 수 있고, 흔들리는 가정을 치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 둘째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이혼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변화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게 되는 이유를 말하는데 장신대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시는 홍인종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동안의 상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혼하는 부부들은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한다. 예를 들면 성격차이, 경제적 어려움, 가족관계 불화, 배우자의 외도, 가정 폭력, 도박, 술, 마약중독, 잘못된 습관, 자식을 갖지 못함, 이단에 빠짐, 성적인 갈등 등이다. 그러나 이것은 드러난 문제이고 그 마음 한쪽에서는 상대방의 변화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이다. 앞으로 상대방의 삶의 태도나 습관, 성격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소망 없음이 더 이상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나 의욕, 필요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부의 이혼은 언젠가는 좋아진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소망에 대한 부재로 인해 야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말하기를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소망 또는 희망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오늘 같은 이 아픔, 이 상황이 개선될 희망이 없다는 데서 우리는 이혼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희망의 근거를 갖습니다. 그 희망은 내게, 내 능력에, 배우자의 마음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놀라운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워 질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인생과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놀라운 Amazing Grace 안에서 우리는 변화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조그마한 어려움 앞에서 헤어짐의 길을 택할 수는 없습니다. 성격 차이가 좀 있다고, 문제가 좀 있다고 이혼의 길에 나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이혼의 문제에 쉽사리 동의 할 수 없습니다.
(3) 셋째로, 그러나 우리는 이상론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현실적인 문제에도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단순히 세상의 풍토 때문이 아니라, 성서가 증언해 주는 현실적인 인식 때문에 이혼의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부부가 갈라서는 이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죄인됨 때문에 이혼을 허용하고 있음도 우리는 성경 속에서 발견합니다. 성경이 이혼을 허용하는 경우를 성서학자들은 두 가지로 이해합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5:31 이하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음행이 관계되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경우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10 이하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의 문제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입니다. 사도 바울은 7:15에서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져도 됩니다. 믿는 형제나 자매가 이런 일에 얽매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평화롭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도 음행이 있거나 믿음의 문제가 생기면 그냥 헤어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금이 간 결혼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경우 외에도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 때문에 이혼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을 신앙의 선배들은 생각해 왔습니다. 헤어지는 이혼이 결코 최선의 길은 아니지만, 더 큰 비극과 불행을 막기 위한 차선의 길이 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전쟁은 결코 선이 아닙니다. 수많은 인간의 생명이 살상되고 그 피해는 수많은 가족들에게 엄청난 비극과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큰 악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전쟁을 결정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은 자녀와 가정에 더 큰 비극과 아픔을 가져온다면 우리는 이혼을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혼은 마지막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노력들이 실패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회복과 화해를 위해 최선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이혼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노력의 여지가 많고, 아직도 회복과 치유의 여지가 있는데도 이혼을 추진함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III
이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혼의 터널을 지나 온 사람들, 또 이제 이혼한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1)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혼의 과정에서 할 수만 있으면 헤어지더라도 웃고 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 엄청난 충격과 아픔, 그리고 배신감 속에서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노와 미움은 나 자신에게도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새로운 출발을 가로막는 족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산 분할이나 양육권문제 같은 이슈로 마음을 많이 상했다 해도, 우리의 미래는 재물보다는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고 지켜주셔야 안전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용서의 마음으로 매듭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2) 둘째로, 비록 헤어짐의 아픔이 있으시다 해도 여러분은 다시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못 품으실 인생의 모습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여러분의 후회, 여러분의 아픔, 여러분의 상처를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했다고 해서 여러분을 포기하시는, 내어 차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용기 있게 그리스도의 손길을 붙잡고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모자람을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3) 셋째로, 재혼의 문제는 신중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 가시기 바랍니다. 이혼 후 텅 빈 마음의 상처와 아픔은 조그마한 호의나 사랑 앞에 쉽게 움직여서 바른 판단을 못하시기 쉽습니다. 특별히 자녀들에게 미치는 파장도 심각히 고려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결혼기간의 반 정도는 기다리며 회복의 기간을 가져야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0년 결혼생활 했으면 5년, 20년 결혼생활 했으면 10년이란 이야기인데, 너무 숫자에 얽매이는 것 같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을 거쳐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 진 후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4) 넷째로, 교회는 헤어짐의 아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을 따뜻이 품고 치유와 새로운 삶의 길을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아 더 큰 상처를 주는 일은 정말로 없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상처 받은 영혼을 감싸 주신 그리스도의 그 가슴, 그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때 교회는 진정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교회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 해 전 저희 교회에 오셨던 마주해님은 '이별 그리고 홀로서기'란 책 속에서 이혼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혼 후 나의 외로움과 분노, 경제적 문제와 자녀교육에 대한 불안은 계속 나의 낮과 밤을 벌레처럼 파먹었고 나의 육체는 하루하루 시들어 병들어 가는 듯했고 나의 마음은 짙은 어두움으로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무엇인가 많은 것들을 갖고 있었고 비교적 여유 있게 느껴졌던 생활이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초라한 삶으로 전락하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네 아이들을 혼자 길러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과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장래문제는 자신감을 빼앗아 버렸고 그대신 우리 가정을 파괴한 자들을 향한 극심한 분노가 끓어 올랐다.
사람에 대한 분노와 삶에 대한 두려움은 정신적으로는 물론이요, 육체적으로도 나를 몹시 괴롭게 만들었다. 일상생활에서 매일 해야 하는 운전조차 가슴이 막혀 할 수 없었기에 한동안은 발룸이라는 진정제를 먹으며 운전을 해야 했다. 또한 높은 곳이나 어두워 보이는 지하도, 좁은 곳을 지나거나 혹은 기차나 비행기를 타는 것조차도 진정제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위장병과 지독한 변비와 여러 가지 질병으로 약 없이는 살지 못했고, 마치 지옥과 같은 생활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교회 다니는 친구들이 나를 찾아주었다. 친구들은 예수를 믿어야만 나와 아이들이 잘 살 수 있다고 권면하였다. 나는 남편이 없다는 열등의식과 사실 나도 이미 크리스천이라는 자만심으로 처음에는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그들의 친절과 사랑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교회 다니는 친구들의 기도 덕분인지 아이들에게 기독교 교육과 한국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같은 또래 아이들이 비교적 많이 있는 큰 감리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친구의 권유로 생전 처음 40일 새벽기도를 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단지 아이들의 장래를 위하여 한번 열심히 기도해 보겠노라고 했더니 친구는 나의 가정을 파괴한 원수의 축복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성경 속에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기록이 있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 원수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왠지 나도 모르게 그 말씀에 한번쯤 무조건 순종하고픈 마음이 생겨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새벽이면 가까운 교회에 매일 혼자 가서 밤새도록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느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나의 모든 마음과 정성을 다 바치고 싶었다. 감사와 회개를 하면서 성경말씀을 읽으며 나의 아이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위선자 같아서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원수들의 행복, 즉 핍박하는 자들을 위한 축복기도도 억지로 그러나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하였다.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작정기도는 40일이 다 끝난 후 말씀을 읽는 가운데 오히려 나의 삶 전체를 뒤바꾸어 놓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나는 그의 피 값으로 사신바 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죽지 않는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과 내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 즉 성전이라는 사실 등 여러 말씀이 다 한꺼번에 내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는 더 이상 아이들 때문에 죽지 못해 사는 목숨이 아니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실 뿐만 아니라 극진히 사랑하시는 귀중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자까지도 하나님은 큰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내 가정을 파괴한 자들을 향해 마치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맹렬한 분노로 가득했던 내 마음은 신기하리만큼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평화와 용서로 바뀌게 되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기쁨까지 얻게 되었다. 돈이 없기 때문에 불행할 뿐만 아니라 이제 곧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았던 나는 비록 넉넉지 못한 생활이지만 주위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여유와 기쁨까지 회복하게 되었다.
그 후 나와 아이들을 위한 생의 목적과 가치관이 달라졌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이 바뀌게 된 것이다. 내 안에 거하고 계신 성령님께서는 내 얼굴을 밝게 회복시켜 주셨고, 마음의 기쁨은 물론이요, 육체의 건강까지도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내 영혼은 매일 하나님을 더 가까이 알고 더 사랑하고 싶은 목마름으로 가득하여 하루도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만큼 되었다. 특히 나를 핍박하는 자들과 내가 미워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까지 잊지 않게 만들어 주셨다.
사십일 기도가 끝난 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게 되었고 성경 속에서 믿을 수 없었던 모든 사건들이 저절로 믿어졌고 그리고 모두 나와 관련이 되어 받아들여졌다. 가슴에 가득했던 분노와 슬픔과 걱정이 신기하게 녹아져 내렸고 내 의지로는 할 수 없는 큰 평화와 기쁨이 넘쳤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게 아이들 아빠와 그녀를 용서하게 되었다.
이혼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치유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헤어짐의 아픔을 넘어서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힘이 되십니다. 능력이 되십니다. 길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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