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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9. 김상근 목사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18:1-11
지난 주에, 락빌 한인 장로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왔습니다. 락빌 한인 장로교회 목사님께서 중국선교를 다녀오시는 관계로 제가 대신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교회에서 설교하는 것보다, 다른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휠씬 부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휠씬 편합니다. 좀 부족한 점이 있어도,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거든요. 지난 주에도 저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락빌 한인 장로교회엘 갔습니다. 그런데, 설교하기 위해서 강단에 서는 순간, 저는 갑자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신이 번쩍들었습니다. 강단에 서서 보니, 아니 우리교회 오충근 집사님이 거기에 앉아 계신것이 아닙니까? 부담없이 편한 마음으로 섰는데, 우리교회 오충근 집사님이 거기 앉아 계시니까, 저는 정신이 번쩍들고 다시 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왜 오셨냐고 물었더니, 다른 교회에 설교하러 간 저를 응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어쨌든 은혜로운 예배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지난 주에, 다른 교회 목사님의 출타 관계로 그 교회에서 대신 설교를 했는데, 이번 주에는 우리교회 1, 2 부 예배시간에 김해종 감독님께서 말씀 전하신 관계로, 3부와 4부 설교를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이곳 저곳 다니면서, 땜빵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어떤 설교를 듣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오늘 교회 오실 때, 어떤 설교를 기대하시면서 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사정에 따라, 믿음의 정도에 따라 여러분이 고대하고 반응하는 설교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여러분이 듣고 싶지 않는 설교가 있습니다. 아무도 듣고 싶지 않은 설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비판하고, 여러분의 삶의 자세를 질타하고, 여러분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그런 설교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선배 설교자들이 후배 설교자에게 조언합니다. "성도들을 비판하는 설교, 삶의 자세를 질타하는 설교, 마음에 상처를 주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이런 모습으로, 저런 모습으로 시달리다가 왔는데, 주일 설교에서까지 성도들을 나무라고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오늘 어떤 설교를 듣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오늘 교회에 오실 때, 어떤 설교를 기대하시면서 오셨습니까?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경고로 끝나고 있습니다. 11절말씀입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내릴 재앙을 마련하고 있으며, 너희를 칠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서, 각기 자신의 사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너희의 행동과 행실을 고쳐라." 여러분,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릴 재앙을 마련하고 있고, 우리를 치실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하나님, 화가 나신 하나님, 우리에게 벌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의 행동과 행실을 고치지 않으면, 무시 무시하신 하나님, 화가 나신 하나님, 우리에게 벌주시는 하나님이 당장 우리에게 달려오실 것 같습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 무시 무시하신 하나님, 화가 나신 하나님, 우리에게 벌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의 전부인 것처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분노하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만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죄책감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지나치게 엄격주의에 빠져들고, 하나님의 심판과 벌을 면하기 위한 율법주의에 빠져들게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감시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벌주시는 하나님만 믿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린 시절 경험한 가정의 상처가 남아있는 사람들일 수록 이런 경향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무시 무시하신 하나님, 화가 나신 하나님, 우리에게 벌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오늘 본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내릴 재앙을 마련하고 있으며, 너희를 칠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서, 각기 자신의 사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너희의 행동과 행실을 고쳐라."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모습, 전부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루만져주시는 분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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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여러가지 모습이 하나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거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은 마치 정원을 가다듬는 정원사의 모습처럼보입니다. 홍수를 통해 인류와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노아의 가족들을 방주로 부르신 하나님의 모습은 마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장과 같은 모습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새로운 땅과 새로운 민족을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마치 아브라함과 함께 사막을 가로지르는 케러반의 인도자 같습니다. 얍복강가에 긴 밤을 지내신 하나님의 모습은 마치 야곱과 한판 겨루신 씨름꾼의 모습입니다.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셨으며, 성전을 뒤흔드는 장엄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셨습니다. 마침내 그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하나님의 모습, 성서에 나타난 이처럼 다양한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시 무시하신 하나님, 화가 나신 하나님, 우리에게 벌주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우리의 행동과 행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치십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우리의 상한 심령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치 토기장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물레를 돌리며, 진흙으로 토기를 빗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진흙으로 토기를 빗다가 잘 안되면, 그 진흙으로 다시 다른 모양의 토기로 빗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여 주신 다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안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 저와 여러분이, 마치 토기장이 손에 쥐어져 있는 진흙처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길에 쥐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어루만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보잘것없을 때, 진흙처럼 보잘 것이 없이 내버려져 있을 때, 그것을 짓밟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쓸모없다고 내다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보잘 것없지만, 쓸모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약한 심령을, 우리의 상한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시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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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우리는 진흙과 같은 존재입니다.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Dust to dust, Ash to ash. 언제가는 여러분 모두 이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Dust to dust, Ash to ash. 여러분은 지금 이 말씀을 앉아서 듣고 계시지만, 언제나는 누워서 이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진흙과 같은 존재입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무엇인가 잡은 것 같은데, 정작 잡아야 할 시간을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막을 길 없고,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자신의 보잘 것 없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도 제법 멀리 뛰어온 것 같은데, 돌아보면 제법 먼 길을 온 것같은데, 이제부터 가야할 길을 보니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우리 인생을, 진흙과 같은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토기장이 같은 우리 하나님께서, 직접 어루만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상한 심령을 직접 어루만져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지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서, 구름 너머에서, 여러분의 양심의 한 구석에 숨어 계시면서, 여러분을 감시하고 여러분에게 벌주시기 위해서 두 눈을 부릅뜨고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우리 곁에서, 저와 여러분의 상한 심령을 직접 어루만져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지시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차고, 냉정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따뜻한 분이십니다.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시며, 우리를 어루만지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위하여 땀흘리시는 분이십니다.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 있음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붙들려 있을 때, 우리들의 새로운 삶이 지금 시작될 수 있음을 굳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려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실때, 쓸모있는 인생으로, 보람된 인생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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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아픔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상한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는데, 우리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는데, 왜 우리 인생의 아픔은 우리곁을 떠나지 않습니까? 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도 시련과 아픔을 주십니까?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싣고 기차가 빠른 속도로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린 소년이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철길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어린 꼬마가 철길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본 기관사가 급히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기차를 세울수 없었습니다. 꼬마도 기차의 기적소리를 들었습니다. 겁에 질린 아이는 철길과 도로 사이에 난 작은 공간에 가까스로 몸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간이 너무 협소했기 때문에, 뒤에 달린 큰 화물칸이 지나갈 때 그 아이는 화물칸에 부딪혀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관사는 최대한 기차의 속도를 줄였습니다. 그리고 기차가 그 아이 곁을 지나갈 때, 그 기관사는 아이의 가슴을 쳐서 도로 위로 떨어지도록 했습니다. 다행히 그 아이는 도로 위로 떨어져지만, 가슴과 다리에 찰과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기차는 지나가고 그 아이는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비록 가슴과 다리에 찰과상을 입었지만,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여러분의 몸에 약간의 상처가 날 수 있습니다. 상처없이 생명을 잃는 것보다, 상처를 입더라도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삶 속에서, 여러분의 고단한 인생살이 가운데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우리의 상한 심령을 어루만지신다고 하셨는데, 왜 우리들의 영혼에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작은 영혼의 상처가 있음은 여러분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명 주시기 위해 내게 이런 아픔을 주셨음을 기억하시고, 그 아픔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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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진흙을 빗어 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흙으로 토기를 빗는 과정에서 반드시 반복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물을 붓는 것입니다. 진흙에 물을 붓지않고 물레를 계속 돌리면, 진흙은 말라서 부서지고 맙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물을 부어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렸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손길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 마음의 상처를 아시고, 우리 심령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래전에 우리 마음의 상처를 아시고, 우리 심령의 아픔을 아시고 어루만져 주셨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이나서된 안됩니다. 끊임없는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물을 붓지 않으면, 진흙이 말라버리는 것 처럼, 우리 심령도 그렇습니다. 강같이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차고 넘치기를 원합니다. 메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은혜가 우리 삶속에 늘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바되어서, 오늘도 우리들의 상한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에 붙들린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주도 우리를 어루만지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강하신 손길에 붙들린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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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이란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마이클을 아주 엄격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마이클은 항상 모범생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마이클은 아버지에게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말을 따르지 않고, 사사건건 반항했습니다. 끝까지 자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도 마치기 전에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집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습니다.
친구들을 설득해서 마이클이 뉴욕에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3년동안 집을 떠나있던 아들을 찾으로 뉴욕으로 갔습니다. 몇 주일동안 아들을 찾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찾아간 주소에는 번번히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뉴욕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뉴욕 타임즈 신문에 광고를 내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뉴욕 타임즈에 이렇게 썼습니다. "마이클, I miss you so much. 정말 보고싶다, 마이클. 네가 집을 떠난지 많은 세월이 지났구나. 많이 힘들지. 아빠는 밤마다 네 꿈을 꾼단다. 정말 보고 싶다, 마이클. 내일이면 뉴욕을 떠나야 하는데, 혹시 이 광고를 보게 된다면 내일 아침 10시까지 Central Station 앞으로 나오지 않을래? 내 기차는 10시 30분에 출발한단다." 다음날 아침 10시에 아버지는 Central Station에서 사랑하는 아들 마이클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0시쯤 시간이 되었을 때, Central Station 에는 4-50명의 청년들이 뉴욕 타임즈 신문을 들고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뉴욕 타임즈 신문에난 광고를 보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 Central Station 으로 찾아온 그 4-50명의 청년들의 이름은 모두 "마이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한 심령을, 우리의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지시기 원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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