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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9.21. 김상근 목사
큰 아들을 위한 변명(II)
창세기 33: 1-17
오랫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오신 분들께서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하다보면,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미국에서 온 동포란 것을 귀신같이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왔다고 이마에 써붙인 것도 아닌데, 사람들을, "미국에서 오셨죠", "여기서 사시는 분이 아니지요"하면서, 우리가 외국에서 온 동포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봅니다. 어떤 분의 학설에 의하면, 미국에 사는 사람은 귓볼에 난 잔털 면도를 하지 않고, 한국 사람들은 이발소에서 귓볼에 난 잔털을 면도하기 때문에, 이 귓볼에 난 잔털을 보고 외국에서 온 사람이란 것을 알아본다고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우연히 만났던 어느 택시기사님은 다른 방식으로 외국에서 오신 분들을 알아보는데, 외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택시에 타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 창문밖의 건물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쳐다 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가장 적절한 이유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투가, 한국 사람이 사용하는 말투와 다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미국에서 사용하는 한국말은 우리가 한국을 떠나 올 그 시절에 사용하던 한국 말투입니다. 저의 경우 1992년, 약 10년전에 미국으로 왔는데, 지금 제가 사용하는 말투는 1992년의 한국말투 입니다. 30년전에 오신 분들은 30년전의 한국말을 사용하고 계시고, 50년전에 오신분들은 왜정시대에나 사용되던 옛날 한국말을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사용하는 한국말투가 지금 한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한국말과 시대적으로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은 우리가 외국에서 온 사람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국 말도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인터넷 통신이 보편화되면서, 한국말은 지금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사람들은 더 이상 "내가 오늘 저녁 식사값을 부담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즈음 한국 사람들은 "오늘 저녁, 내가 쏜다"라고 말합니다. "얼굴이 잘생겼다"는 표현은 미국에서 온 동포들이나 사용하는 옛날 표현입니다.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얼굴이 잘생겼다"라는 표현을 그냥 "얼짱이다"라고 말합니다. "얼굴이 짱이다"이란 표현을 그냥 "얼짱"이라고 줄여서 말 합니다. "제 남자 친구는 우리학교에서 제일 잘 생긴 애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으면 "제 남친은 울학교 얼짱임다"라고 표현합니다. 인터넷 통신때문에 요즈음은 한국말은 축약되고 또 과격해지는 경향이 있는것 같습니다. 여러분, 혹시 "배신한다"를 말을 요즈음 한국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하는 지 아십니까? 요즈음 한국말투에는 "배신한다"는 표현은 "배신/때린다"는 표현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배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배신을 때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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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배신 때리는" 이야기는 아마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일것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중에서 가장 탁월하게 "배신을 때렸던" 인물을 들라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을 들지 않을수 없습니다. 야곱은 태어날때부터 배신을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형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목을 잡았던 사람입니다. 큰 아들에게 내려오는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야곱은 자기 형 에서를 교묘하게 속였습니다. 들판에서 일하고 돌아온 허기진 형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명분을 가로챘던 인물입니다.
이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나이가 들어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대신하여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별미 한 그릇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자기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배신자였습니다. 배신자들은 남을 속이는 데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배신자들은 남이야 어떻게 되던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 이익부터 먼저 챙기는 사람입니다. 배신자들은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되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배신자들은 주위 사람들을 짓밟고 올라갑니다. 배신의 전문가, 야곱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형 에서는 조금 어리숙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에서는 그저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들판에서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들판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배가 너무 고파서 팥죽 한그릇을 얻어 먹고 동생의 속임수에 빠졌던 어리숙한 사람입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였던 동생때문에, 졸지에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어리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서가 들판에서 열심히 사냥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배신의 사건은 끝이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은 동생에게 다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모든 재산은 동생차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동생에게 배신당한 에서는 울면서 아버지에게 호소했다고 창세기 2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니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하면서, "소리높여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배신당해 울고있는 에서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떠올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울고있는 에서의 모습은,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큰 형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형도, 아버지께 비슷한 호소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해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까" (눅 15: 29-30).
탕자의 형이나, 동생에게 배신당하고 아버지의 축복과 모든 재산을 빼앗긴 에서는 참 딱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탕자의 형이나, 동생에게 배신당한 에서가 몹쓸 짓을 한 사람입니까? 그들은 나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들판에 나가서 성실히 일만 했던 사람들입니다. 동생들이 자기와 가족들을 속이고,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도, 맡겨진 임무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왜 그런 평범한 사람에게,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왜 성경은 평범하지만 성실히 일했던 이 두 형들보다, 형과 가족을 속였던 야곱을,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탕자에게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습니까? 주인공이 뒤바뀐것이 아닙니까?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이 세상이, 배신의 전문가들이 출세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남을 짓밟고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기 때문에, 탕자와 야곱이 성경말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평범하지만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을 이용하고, 그들을 속이고, 그들을 배신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탕자처럼 한탕 화끈하게 해먹는 사람을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들판에 나가서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을 "요령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멍청이, 굼벵이, 지지리도 못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령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멍청이, 굼벵이, 지지리도 못난 사람, 자기 밥그릇도 못챙겨먹는 그런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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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말씀은,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망갔던 동생 야곱과, 복수의 날만 기다리던 형 에서가 20년만에 다시 만나는 장면입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던 동생 야곱이, 무려 20년만에 요단강을 건너 형을 만나러 옵니다. 배신자 야곱에게 20년만에 만나는 형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형의 복수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속이고, 나이가 많아 앞을 잘 보지 못하던 아버지를 속인 동생에게 복수의 날이 다가 온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살벌한 복수의 이야기 대신에, 20년 만에 만나는 형과 동생의 화해와 용서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20년만에 만나는 형과 동생의 만남은, 보복과 복수의 만남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만남이었습니다.
객지 생활을 통해 얻은 두 아내와 두 여종, 그리고 많은 자식들 앞에서 동생 야곱은 일곱번 몸을 땅에 굽히며 형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400명의 무장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살기등등하게 동생을 만나러 왔지만, 형 에서는 땅에 업드려 용서를 구하는 동생을 끌어 안습니다. 그리고, 목을 어긋맞대고 함께 통곡을 합니다. "야곱은 몸을 일곱번 땅에 곱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33:3-4) 20년만의 만남은 보복과 복수의 만남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만남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용서와 화해의 장면이 어디에 있습니까? 온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철천지 원수였던 형과 동생이 통곡을 하면서 용서와 화해를 나눕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야곱은 형에게 자기 가족들을 소개합니다. "형님, 제 안사람입니다." "아주버님, 절 받으세요." "큰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그래, 우리 조카 얼굴한번 보자." "형님,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니야, 이사람아, 다 지나간 이야기야, 우리 이제 잊어버리기로 하세." 이때, 동생 야곱이 용서한 형 에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습니다." (33:10) 용서하시는 형님의 얼굴을 보니, 마치 하나님의 얼굴의 보는 것 같다고, 야곱은 고백합니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람의 얼굴은, 우리를 끝까지 용서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얼굴과 닮아있습니다. 자기가 가졌던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갔던 동생을, 20년동안 자기 가슴아프게 했던 동생을 용서했던 에서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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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배신의 시대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짓밟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모두 자기 몫을 챙기겠다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모두가 거리로 뛰쳐 나오는 세상입니다. 거짓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약속마저 쉽게 깨어지고 상대방의 약점만을 계속해서 지적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키워갑니다. 용서와 화해하는 것,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고리타분한 개념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숫자는 늘어나지만, 교인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지만, 용서하면서, 자기를 희생하면서 이웃을 섬기는 교인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에게 무엇인가 혜택을 주는 교회,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는 교회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도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이 시대의 정신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른 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가르친 예수님의 말씀은, 보복과 복수에 눈이 먼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Pre-emptive Strike, 선제 공격의 시대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해를 끼칠 것 같은 조짐이 있으면, 그 상대방이 다시 나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 먼저 그 상대를 공격해야 한다는 무서운 논리입니다. 내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남을 죽여버리겠다는 이 무서운 논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시대에, 이런 비신앙적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용서하고 화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까?
남의 권리를 짖밟고,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거짓말로 형과 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처럼, 그렇게 살아야합니까? 아니면, 조금 어리숙해서, 이렇게도 당하고, 저렇게도 당하고, 그렇지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가슴아픈 배신 당했지만, 그래도 용서했던 사람, 동생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던 사람, 에서를 닮아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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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M . J. Kim 목사님이라는 애칭으로 우리와 친숙한 김명종 목사께 저희 젊은 목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작년에 은퇴하신 김명종 목사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버지니아 연회 한국 목사님들 가운데 어른이실 뿐만 아리나, 저와 같은 많은 젊은 목사들에게 롤모델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몇 달전에 한인 목회자들 모임에서 이런 자신의 목회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김명종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목회하신 알렉산드리아의 알더스케이트 연합감리교회는 버지니아 연회를 대표하는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교인중에는 미국 국회의원도 여러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명종 목사님께서 이 알더스게이트 연합감리교회를 담임하신 것은 김목사님 개인만 아니라, 우리 한국 목회자 모두의 자랑거리입니다. 목회자로서 당당하게 주류사회에 진출한 셈입니다. 그런데 김명종 목사님께서 그 교회에서 한가지 어려움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교인이 김명종 목사님에 대해 안좋은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습니다.
그 교인에게는 신체장애자 자녀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전신마비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아이지만, 그 부모들은 그 장애자 자녀를 주일이면 교회로 데려왔습니다. 김목사님은 그 가족들에게 특별한 호감을 가졌다고 합니다. 장애자 자녀를 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시키는 부모들의 노력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우연히 그 가족을 만날 기회가 있어, 김목사님은 그 가족들을 격려하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자기가 자란 옛날 한국 땅에서는 자녀가 장애자인것을 부끄러워하고, 이를 숨기는 것을 보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그 가족을 격려하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나이든 부모님이나 장애자들을 버리기까지 했던 한국의 옛 풍습을 예를 들면서, 오히려 장애자 자녀를 적극적으로 돌보는 그 가족을 격려하고 칭찬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부터, 교회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온 한국목사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부모나 장애자 자녀를 버리는 문화에서 온 목사에 대한 불만이, 소문과 함께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김목사님이 장애자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란 소문으로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김목사님은 평신도 대표와 목회협조 위원장, 그리고 그 부모를 교회 사무실로 초대했습니다. 사무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부모들의 싸늘한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그때 김명종 목사님은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니, 지금 예수님께서 지금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조금도 지체함 없이 김 목사님의 머리에는 마태복음 5장 39절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김목사님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해명해서 오해를 풀어야 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김명종 목사님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나를 용서하셨는데, 그 예수님께서 지금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쪽뺨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시는 데, 그렇게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목사님은 그 가족들과 교인대표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아무런 변명하지 않고, 아무런 댓구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Could You Forgive Me?"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김목사님의 머리 속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때문에, 그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Could You Forgive Me?"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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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화해와 용서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들 앞에는 야곱의 길과 에서의 길, 두갈래로 놓여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짖밟고 올라갔던 야곱의 길이 있고, 조금 손해보지만, 끝까지 용서하고 화해했던 에서의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야곱의 길을 가지 말고, 에서의 길로 가십시다. 야곱과 같은 사람이 되지말고, 에서와 같은 사람이 되기위해 노력하십시다. 예, 그렇습니다. 참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먼저 용서하십시다. 남을 속이는 데 이골이 난 야곱도 사실 불쌍한 사람입니다. 남을 속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속여야합니다. 남을 속이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마음이 병든 사람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야곱도 마음이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양심의 가책때문에 밤새 울부짖다가 환도뼈가 탈골되어 다리를 절고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다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병들었던 불쌍한 동생 야곱을 껴안고, 용서하고 화해했던 에서의 모습에서, 힘들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용서하고 사랑했던 에서의 얼굴에,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났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가 끝까지 인내하면서 용서할 때, 여러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날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성경의 한 구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 일서 4:7-12)
저는 오늘 이 아침의 말씀은 이렇게 새겨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용서하자. 용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용서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용서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용서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용서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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