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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9.14. 웨슬리 신학교 주일 - Rev. Scott Kisker

"대제사장 예수"

히브리서 5:1-10

저는 몇 해 전 영국 브리스톨에 있는 찰스 웨슬리 기념 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와 함께 일하던 한 분은 이제 연세가 아흔이 넘으시고 은퇴하신 감리교 목사님이셨는데 그분이 저에게 이 하얀색 가운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말레이시아에서 공군 군목으로 일하셨을 때 구하신 옷이었습니다. 그분 말씀으로는 그 곳의 더운 날씨때문에 다른 보통 종류의 성직자 가운은 입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분이 싱가포르에 있는 한 장로교회에서 설교해 주시도록 요청을 받으셨습니다. 거기서 이 옷을 입으셨습니다. 예배 후에 그 곳 식민 정부의 한 고위 관리였던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이 사람은 스콧트랜드 출신에 철저한 장로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제사장들의 색깔인 백색 (白色) 보다는 선지자들의 검은 색을 더 좋아하오."

저의 친구였던 이 목사님은 좀 머뭇거리며 그 지방의 날씨에 검은색 가운이 얼마나 불편한지를 설명하려고 대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선지자처럼 옷을 입는다는 것이 과연 정말 어떠한 것인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그렇게 예언자적인 복장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마 모든 설교자들은 엘리야나 세례요한처럼 낙타 가죽만 허리에 두르고 강단에 올라야 하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 스코트랜드 사람은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당신네들 교회는 그렇게 안 해도 이미 출석하는 사람이 적어요."

제사장입니까, 예언자입니까?

이 이야기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 안에 있는 한 갈등을 일면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떻게 교회라는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인 그리고 예언자적인 역할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주로 (앞서 본 스코틀랜드 사람이 보여준 것처럼) 선지자 / 예언자적인 사역에 촛점을 맞추어 왔습니다. 개신교 안에서 소위 신부 (priest)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교단은 오직 영국 성공회 속한 교회들뿐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의 사역(설교)을 가장 중심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언자가 하는 일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기준으로 다시 부르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비추어 우리 자신이 어디가 부족한지를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는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적, 학생들이 이 성직자가 가진 예언자적 사명에 대해서 배울 때에 모두가 다 이것이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관념을 타파하고 첨단을 달려가며 죄를 지적하는 일. 그러나 그 예언자들의 대부분이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회에 올 때 무언가를 얻어가려는 생각으로 옵니다. 우리는 지적으로, 영적으로 도전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인들 에게도 소위 예언적 말씀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반면에 제사장의 직분은 이와 좀 다릅니다. 우리가 일단 영적인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사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제사장의 역할은 바로 우리를 새 생명으로 인도하고 그 새 삶 안에서 살도록 돕는 일입니다. 제사장은 세례로 우리를 옛 사람에 대한 죽음과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로 이끕니다. 제사장은 성찬의 테이블에서 우리의 참 생명이 되는 떡과 포도주를 베풀어줍니다.

예언자가 죽은 자들에게 "깨어라"고 외친다면 제사장은 살아있는 자들을 권고합니다. 예언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줍니다. 제사장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 수 있도록 돕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언자가 필요한 만큼 우리는 또한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제사장을 필요로 하는 이유, 예언자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오늘 읽은 성경 본문 1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죄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떨어진 그러한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언자들은 우리를 깨어나게 합니다.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우리가 예언자의 경고의 말씀을 들은 후에도 우리에게 계속 되는,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뜻대로 사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죄라는 것을 심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다루어집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당장 율법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데서 문제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죄란 단순히 계명을 어기는 것, 하나님의 규율을 범하는 것 그것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제쳐놓으라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창조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소위 법을 준수하면서도 범죄할 수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1:42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소홀히 함이 없이 하고, 이것들도 반드시 해야 한다."

죄는 단순히 어떤 조항들에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죄는 그것 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헬라어 단어 '죄'는 문자 그대로는 "표적을 맞추지 못하였다"--마치 활을 쏠 때의 경우처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규율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란 경주를 끝까지 마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대회에 직접 참가해본 적이 없더라도 우리는 경주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삶 자체가 바로 장거리 경주입니다. 그 삶이라고 하는 경주 안에는 또 작은 경주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메트로를 타기 위한 경주, 마감시간 까지 일을 마치기 위한 시간과의 경주, 금요일까지 설교준비를 마치기 위한 경주, 저녁식사를 차리기 위한 경주,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는 경주가 있습니다. 심지어 쉬기 위해 하는 경주도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에 뭔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압박감, 소위 영어로 "rat race"(쥐들의 달리기)라고 표현하는 경주도 있습니다. 지위, 돈, 사랑을 위해 더 높은 다음 단계를 이루고자 하는 경주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희생하는 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갖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고 달려가는 경주가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적인 달음박질에 우리는 자주 지칩니다. 은퇴할 수 있을 만큼 돈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바라던 대로 자라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가 세워 놓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또 경주를 마치지 못하고 맙니다.

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두신 목표, 우리를 진정으로 복되고 행복하게 할, 주님이 세워주신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향하여 세워놓으신 목표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면 보통 성경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 있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성경 자신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된 것 중에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창조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의 창조의 질서요 모든 것 뒤에 서 있는 논리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고 완전하며 완벽한 뜻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길입니다. 우리의 존재의 진리입니다. 우리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우리의 삶이 바로 기독교라고 하는 달리기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이 경주에서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돌아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이 목표지점을 향한 경주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는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위하여 대신 기도하며 예물과 제사를 드리는 직분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공동체를 위해 제사장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 성경본문 3절에서 보듯이 그 제사장 자신도 경주를 잘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사장 자신도 자신의 허물을 위해서 희생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출발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결승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가는지 기본적인 지시도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길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리에서 돌거나 서로에 걸려 넘어지고 그러다 지쳐 쓰러집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경주를 끝마치지 못하게 됩니다.

제사장은 마치 옆에서 격려하면서 같이 뛰는 코치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자신도 똑같이 연약하고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여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승점에서 기다리는 이 (처음에 길을 알려준) 에게 계속 외칩니다. 결승점에 도달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위해 제사장은 그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야 할 결승점이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으로 달리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코치, 곧 새로운 종류의 제사장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알고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제사장을 원합니다. 온유하며 우리의 경주를 옆에서 격려해주는 그런 제사장을 원합니다. 겸손하며 자신의 영광을 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그러한 사람을 원합니다.

이전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우리는 길을 알고 있는 제사장을 원합니다. 경주을 마친 경험이 있는 사람, 결승점을 통과한 적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다른 경주자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7절부터 10절을 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고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서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새로운 제사장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길이십니다. 진리이십니다. 생명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이 완전하게 되셔야 했습니까? 예수께서는 죄 없이 나셔서 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규율을 깨드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완전함은 규율을 깨뜨리지 않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나신 그 날부터 완전하셨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앞에서 저는 죄를 다른 측면에서 정의하여 말씀드렸었습니다. 목표를 벗어난,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죄라면 완전함은 그와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완전함이란 목표를 맞히는 것입니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결승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완전함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대로 허락하신 생명을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주는 결승점에 도달하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에서 완전하고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고통을 참으시며 십자가에 달리신 후,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히솝 갈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대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드시고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주님은 결승선을 통과하셨습니다. 주님은 길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바로 길이십니다.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살아 계십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 말한 것처럼, "갖가지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새로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선택되셨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 몇 분은 "도대체 멜기세덱이 누구냐"고 생각하시겠지요. 창세기 1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때는 아직 '아브람'이었습니다)에게 당신이 보이실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땅을 소유할 것을 약속하시고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12장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경주와 마찬가지로 목표를 보는 것과 소유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곧 심한 가뭄으로 애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12:10-20). 함께 동행한 사람들과의 분쟁이 있었습니다 (13:1-18).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롯이 구출되었을 때, 아브람은 사웨 벌판에서 다른 왕들과 만났습니다 (14:18). 여기서 살렘 (지금의 예루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람을 축복하고 말했습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아브람 그대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

멜기세댁의 반차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의 반차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며
제사장인 동시에 왕의 반차이며
떡과 포도주를 복으로 베푸는 반차입니다.

우리의 경주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데릭 레드먼드는 육상 선수였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영국 대표팀 멤버였던 대단히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1988년 올림픽에도 참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에는 400미터 경주의 시작을 불과 90초 앞두고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기권해야 했었습니다. 4년 동안 다섯 번의 수술을 거친 이후 다시 올림픽 선수로 선발되어 바르셀로나에 왔고 이제 400미터 경주 준결승전에서 출발점에 다시 섰습니다.

총성이 울리자 레드먼드는 뛰쳐나갔습니다. 약 100미터를 뛰었습니다. 그 때 그는 갑자기 넘어졌습니다. 그의 인대가 파열되었던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 가운데 그는 메달에의 꿈이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의료진들이 트랙으로 뛰어들어갔지만 그는 도움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대신 그는 결승점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관중석에서 한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트랙으로 내려가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을 지나서 트랙에서 기어가고 있던 선수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뿌리치던 그 선수가 눈을 들어보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데릭 레드먼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습니다. 이제 그 두 사람은 남은 300미터 결승점을 향해 절뚝거리며 같이 걷기 시작했고 이를 본 관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여러분, 결승점을 통과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승점을 통과하는 것은 규칙을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결승점을 통과하는 것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결승점을 통과하는 것은, 당신이 쓰러져 앞을 향해 기어가고 있을 때, 눈을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관중석에서 내려와 몸을 구부리시고 내미신 그 분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쓰러진 당신을 일으켜 체중을 스스로의 어깨에 얹으시고 함께 결승점을 지나시기 위해 오신 대 제사장 예수께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분이 바로 우리의 대 제사장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