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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8.31. 장찬영 목사

"하나님 아버지, 제가 아버지입니다!"

누가복음 15:11-24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아버지'를 만납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모두에게 필요한 분은 바로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 한가정의 '아버지'된 우리에게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는 아버지입니까?"

I.

제가 오늘 "아버지"에 대한 주제를 말씀으로 나누게 된 것은 지난 주 집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저녁에 staff retreat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 마침 집사람과 하영이가 사진앨범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이의 어렸을 적, 태어났을 적부터 5-6살 무렵까지, 즉 한국에 있었을 때의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늘 그렇지만, 옛날 사진을 본다는 것은 참 재미있습니다. 사진을 통해 우리는 옛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함께 사진을 정리하는 중... 저는 아이사진에 함께 나와 있는 저의 모습을 보다가 그 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이 옆에 있는 아버지로서의 저의 모습이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자세라든지 표정이 대단히 보기 민망한 것도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이러한 느낌은, 사진을 고르면서 저도 모르게 제가 좀 아버지로서 부자연스럽게 나온 사진은 한 장씩 옆으로 제껴놓게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집사람이 왜 이렇게 사진을 많이 버리냐고 하는데, 저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옆에다가 치워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사진 한 장 한 장에 대해서 집사람과 아이가 얘기하는데, 제가 치워놓았던 사진중의 하나인, 한국 유아원에서 있었던 사진을 다시 보더니, 아이가 하는 말이, "이때 아빠가 삐쳤어! (삐쳤다는 단어의 뜻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란 집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해?" 하고 물으니까, "그때 아빠가 바쁘다고 잠깐 와서 있다가 가고 나는 다른 친구 아빠하고 있었어" 그래서 그때 모습이 삐쳐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진을 보니까, 정말 억지로 와 있는 모습이 그대로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이 아이에게는 제가 마치 "삐친 것"으로 보였고,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아이가 그때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 . . 사실 이같은 경험은 비단 저만의 경험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어린아이를 자녀로 가지신 분이나, 십대, 아니 청년의 자녀이든, 아니 결혼시켜 가정을 갖은 자녀들이 있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부르는 '아버지'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든 똑같기에 우리는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이 설교의 대상은 '아버지들'이 되실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주일설교로 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는 있지만, 한 가정에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은 너무도 크기에 다른 분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면서 이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적용부분은 꼭 아버지가 아닐지라도 가능하실 것으로 믿기에 또한 모든 분들에게도 이 말씀은 적용되리라 생각되어 함께 드리고 싶습니다.

II.

여러분 도대체 "아버지란 누구입니까? 어떤 존재입니까?"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 말씀은 이러한 우리들의 질문을 가장 정확하게 답할 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아버지에 대하여 이 보다 더 잘 이야기한 본문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본문은 일반적으로 '탕자의 비유' '돌아온 아들' 이라고 불리어집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분깃을 가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연속되는 천국의 비유중의 하나로, 죄인 된 인생들을 받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집을 나간 아들의 행동과는 관계없이 '그냥' 무작정 받아주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어떤 계약도, 대가도, 앞으로의 계획도 없습니다. '그냥'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아들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을 때, 그래서 모두가 자기를 떠났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듭니다.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한 후의 아들의 위치는 한 아버지의 유복한 아들도, 자유인의 상태가 아닌, 참으로 비참한 노예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가 노예의 심정의 심정이 되어 돌아온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노예란 무엇입니까?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비참함의 가장 아래, 밑바닥입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그 어떤 것도 요구할 수도 없는 바로 그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아들이 돌아온 것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본질적으로 '돌아온 죄인'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 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베풀어지는 향연과 춤은 아들에게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있어서도 오랫동안이나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가정, 웃음을 잃어버린 아버지, 좋은 것을 먹어도, 좋은 것을 입어도 늘 걸리는 아버지의 마음. . . 어떻게 그 가정에 아들 없이 향연과 춤이 가능했겠습니까?

오늘 본문 12절에는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에 따라 각각 그 살림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이해하지 못한 채, 재산만을 원했던 아들은, 그 자비로운 아버지를 말로만 아버지라 부를 뿐,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없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을 통해 우리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그 아들을 여전히 한결같이 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습니다. 아들들이 늘 그러하듯이, 예상대로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갑니다. 철없는 아들의 모습 속에서 또 다시 우리는 우리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우리는 이 대목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일게 됩니다.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는 깊게 파지신 아버지의 커다란 눈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 못 가 재산을 다 허비합니다. 죄는 끊임없이 죄의 결과를 가중시킵니다. 그는 행복을 얻는 대신에 빈곤에 휩싸이게 되고, 풍요하고, 명예로운 삶 대신에 예속과 수치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실, 집을 떠난 그에게는, 어디든지 이방인의 땅이었고, 마지막 그에게 주어진 음식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들이 진정한 회개에 이르는 마음을 본문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들은 죄악에 빠졌던 과거의 삶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절망과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아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결정적인 생각의 자리에는 바로 '아버지' 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몰차게 집을 나올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떵떵거리며 휘청대며 누릴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가, 이제는 아무도 자기를 찾지 않는 절망과 처절한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들에게 아버지는 늘 멀리 있고, 어려운 사람으로 생각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과 실패를 통하여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아버지의 품.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시는 아버지, 아니 자기가 집을 나간 그때부터 내내 대문을 지키고 있었던 아버지...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그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잃어버린,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버지의 마음 '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의 중심은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그 아들을 맞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아들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아직은 상거가 먼데"라는 것은 "그 거리가 멀어 누군지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은 확인 못해도, 아버지는 그가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아들의 모습이 남루하고 지쳐 거지의 모습으로 변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은 모른다해도 아버지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입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아들을 나무라고 "네가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냐고?" 고 혼을 낼 수 있지만, 아버지만은 그 이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만은 달려가서 아들을 붙잡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출 수 있는 것입니다. 비난도 하지 않으시고,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그저, 그냥 달려가서 목을 안고 감격으로 입맞춤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말도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이미 용서한 아버지의 행동입니다. 여러분,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준비를 보십시오. 그는 제일 좋은 옷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는 가락지를 낄 자격이 없는 아들에게, 너도 나의 상속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가락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신을 신기웁니다. 신은 자유인임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노예들은 신을 신지 못했습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아니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잔치는 즐거움으로 음식을 나누고 기쁨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절) 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마음만을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을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 이 땅에 사는 여러분들, '아버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III

몇 해전, 가이드 포스트지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마이크 버클이라는 조지아 주에서 침례교 교회를 섬기시는 목사님이 쓰신 글이었습니다. 그는 1964년 17세 때 부모님이 신실하게 섬기시던,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다니던 교회에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영접한 후, 2년 동안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동생이 풋볼을 하다가 목을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50대 초반의 그렇게 인자하고 신실하셨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이크의 실망은 너무나 컸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이럴 수가 있을까?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아버지가 더욱 그리웠고 보고싶어졌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그 큰 품으로 나를 안아 주셨을 텐데, 그러면 내 가슴이 얼마나 시원할까?....' 그는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저에게 필요한 분은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기숙사에서, 아버지가 평소에 읽으셨던 그 성경, 그래서 학교로 가져왔던 그 아버지의 성경을 읽는 중에 그는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누가복음 15장, 오늘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눈이 열려짐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쓰여있는 돌아온 탕자에게 달려오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바로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행해 큰 팔을 벌리고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입을 맞추시고 그가 이해할 수 없었던 동생의 사고와 자신의 죽음에서 겪어야 했던 마이크의 고통과 눈물을 씻어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마이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닌, 그분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셨던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변화된 것은 물론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 아버지의 사랑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아버지를 따라 조지아주의 작은 시골교회를 섬기면서, 만나는 아버지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이름, '아버지'라는 이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자녀들에게 당신의 이름,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이 이 땅위에서 꼭 해야할 일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깨어짐'의 시대요, '상실'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바쁘게는 살지만, 뭔가 잃어버린 채, 마침내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는지 모를 만큼 우리는 정신없이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시대 속에서 '아버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되고 어려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작년 이맘때 즈음, 저희 교회 윤광석 집사님께서 목회자들에게 보낸 이메일 가운데, 그 내용이 참으로 인상깊어서 copy 해놓았었는데, 그 제목이 바로 "아버지는 누구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란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성적이 좋지 않을 때,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잘 깨어지기도 하면서,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는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보신다.

아버지의 최고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가장 꺼림직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에, 이점에 있어서는 미안한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살 때, 아빠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7살 때, 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살 때, 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살 때, 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살 때, 우리 아버지는요? 저하고는 달라요. 세대 차이가 나거든요.
25살 때, 아버지를 이해하긴 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살 때,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살 때, 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살 때,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셨어.
60살 때, 아버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 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 소리로 기도도 하고 성가도 부르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 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 당산나무 같은 변함없는 큰 이름이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는 과연 하나님 아버지, 하늘 아버지만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부족함에도 '아버지'라는 이름을 허락하신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아버지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마음은 아닙니까?

최근에 나온 최일도 목사님의 책 가운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해서 동화스타일로 만들어진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 책 이름은 "최일도 목사님의 희망이야기"인데, 그 책은 "당신이 영웅입니다"라는 소제목으로 쓴 아버지에게 보내는 아들 최일도 목사님의 편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드리면서 오늘 '아버지'를 향한 저의 말씀도 정리해 볼까 합니다.

"... 제 곁을 훌쩍 떠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신 아버지,
아버지, 수없이 글을 써 보아도 받지 못하실 아버지이시기에 목이 쉬도록 부르고 부르다가 그냥 아이처럼 울어버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났어도 더욱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귀여운 외아들인 제가 그저 당신의 사랑 속에서 순탄하게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며 흡족해 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늘 입고 다니시던 가죽잠바 품속에 안겨서 따듯한 아버지를 다시 느끼고 싶었던 순간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지요. 어린 시절 제 등을 쓸어안아 주시던 아버지의 크고 따듯한 손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아버지 손길을 무작정 기다리다가 그만 아버지가 고인이 되셨다는 생각이 현실로 다가올 때면 바보처럼 울어버린 일이 참 많았습니다. 내겐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나에게 아버지를 되돌려달라고, 철없이 울며 때로는 통곡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히 그 빈 공간을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 제게 아쉬움 없도록 부족하지 않게 채워 주셨습니다.

아버지, 이제 제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이 세상 떠나실 때 열 다섯 소년 최일도가, 지금 어느덧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로서 지금 제 자식 녀석들 등을 쓸어안아 줄 때면 저와 두 누나 이렇게 세 자녀의 아버지셨던 아버지가 너무도 생각이 나서 이내 울컥울컥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의 손자 녀석이 대학생입니다. 제가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낼 때가 중3이었는데 말이죠. 아버지 아들인 제가 이제 잠시 후면,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던 때보다 더 나이가 많게 됩니다. 정말 믿겨지지 않는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아버지, 나의 영웅이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생존해 계신다면 산과 가람이와 늦둥이 별이를 얼마나 예뻐하실까를 생각해보니 제 눈에 눈물이 고이고 맙니다.... 아버지, 저는 적어도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이상 어린것들을 이대로 놓고 떠날 수 없다고 저 자신에게 몇 번이고 다짐해 봅니다. 그래서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자주 드립니다.
"하나님, 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 어린것들이 성장할 수 있을 때까지 좋은 아버지 노릇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나의 영웅이셨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가 떠나신 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른 지금, 여전히 제가 할 말은 "아버지! 당신은 나의 영웅입니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당신은 내게 가장 좋은 아버지였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외엔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저 또한 세 아이들에게 이런 고백 듣는 것이 간절한 희망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정말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한없이 모자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천국에 계신 아버지의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될 수 있도록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어 보겠습니다. 정말 저에게 한없이 잘해 주셨던 아버지 같은 참 좋은 아버지가 되어보려고 합니다.

아버지, 제가 몇 년 전에 제 아들 녀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읽다가 벅차 오르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제 아들 녀석이 써 준 편지를 자주 들여다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며 하나님이 제게 주신 사명 중에 아버지로서의 사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되새겨 봅니다. 아버지, 그 편지를 몇 줄만 옮겨 쓰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은 우리 아빠예요.... 우리 아빠가 진짜 목사님입니다.... 정말 최고예요. 멋진 아빠, 우리 아빠, 나도 나의 영웅이신 우리 아빠를 닮고 싶습니다...."

아버지, 그러면 오늘은 이만 줄이고 다시 또 찾아 뵙겠습니다.

2003년 4월 아버지가 그리운 아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