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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8.24. 조영진 목사
"고난의 선물"
베드로전서 1:3-9
괴롭고 힘든 고난이 과연 의미가 있습니까?
고난 속에 담겨진 선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 삼켜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고난도 우리의 삶에 유익함을 가져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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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중학교 1학년 때입니다. 당시 의과대학에 다니시던 형님의 권면으로 대책도 없이 서울에 올라와 중학교 생활을 시작한 저는 처음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먹고 잘 숙소도 여의치 못했고, 학교에 내야하는 수업료도 마련할 길이 막연했습니다. 첫학기 시험을 치르게 되는 주간이었습니다. 종례시간에 제 이름을 부르기에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뵈웠더니 수업료를 내지 못했으니까 등교 정지가 되어 시험을 치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도대체 수업료를 마련할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낙심을 하고 있는 저를 보시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영진아, 용기를 내라. 지금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이 어려움은 네 인생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른 학생들은 부모님이 대주는 돈으로 수업료를 내지만, 너는 어려서부터 네 발로 스스로 설 수 있는 독립정신을 기를 수 있게 되었으니 용기를 잃지 말아라. 절대 낙심하면 안된다." 독실한 천주교신자이셨던 선생님은 제 삶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1학년 마치고 서울에서의 공부를 포기하려할 때도, 2학년 마치고 또 포기하려할 때도 선생님께선 제가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셨습니다. 또 중학교 3학년 때는 동급생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고난, 아픔, 시련, 실패... 할 수만 있으면 만나고 싶지 않은 삶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피할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우리 인생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고난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웁니다. 많은 사람들이 넘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저앉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좌절을 경험하며,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우리를 울리고, 우리를 넘어뜨리고, 우리의 가슴에 좌절과 낙심을 심어주는 이 고난에 대하여 성경은 어떤 해답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이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고난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이 고난 속에는 어떤 선물이 담겨져 있습니까?
I.
오늘 봉독해 드린 베드로전서의 말씀은 이같은 물음에 대하여 귀중한 멧세지를 전해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편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6절,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시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1:3절-7절을 표준새번역 개정판으로 읽어 드렸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앞에서 무너지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고난을 피해 도망가는 연약한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 1:6의 말씀처럼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감사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는 고난 앞에서 기뻐해야 합니까? 왜 고난 속에서 감사해야 합니까?
시몬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시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역경과 실패, 아픔과 질병을 통하여 정금보다 더 귀한 존재로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고난은 우리 가운데 선을 이루며 우리를 금보다 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줍니다. 고난 속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엄청난 주님의 선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를 금같이 귀한 존재, 흔들림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사랑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II.
좀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고난 속에 담겨진 선물이란 어떤 것들입니까? 그 힘들고 괴로운 고난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연단의 열매란 무엇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고난은 우리를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갑니까?
(1) 먼저 고난이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 인간의 참모습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가능성과 한계라는 두 점 사이에서 펼쳐집니다. 모든 사람이 아인스타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한계를 보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만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두 점 사이에서 자신을 지혜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너무 쉽게 한계를 그어서 자신의 가능성을 묻어두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한계도 모른 채 무한히 뻗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 내지는 망상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가능성에 대하여 보다 realistic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의 한계를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입니다. 나란 존재를 믿고 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난 속에서 경험하고 깨닫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똑똑하다는 것 별 것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멕시코의 한가한 바닷가, 어부의 작은 배 안에 싱싱한 물고기 몇 마리가 놓여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있던 미국인 은행가는 어부에게 싱싱한 생선에 대해 칭찬하고, 그것을 잡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습니다. "얼마 안 걸려요." 멕시코 어부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조금 더 오래, 더 많은 생선을 잡지 그래요?" 멕시코 어부는 그것이면 가족에게 충분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남은 시간에는 뭘 하시오?" 어부가 대답했습니다. "늦게까지 잠자고, 가끔 낚시하고, 우리 아이들과 놀고, 집사람과 낮잠 자고 저녁이면 동네에 나가 와인을 마시며 친구들과 기타를 치지요." 미국인은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이것 보시오. 나는 하버드 MBA요. 당신을 도울 수 있소. 조금 더 오래 낚시를 하고 어선을 사는 거요. 그렇게 해서 생긴 이익으로 다시 몇 척의 어선을 구입하다 보면 대형 어선을 가지게 될 것이오. 그러면 중간 거래를 통하지 않고 가공업자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고 마침내 당신 자신의 통조림 공장을 세울 수 있고, 당신은 이 작은 시골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그리고 마침내 뉴욕으로 확장된 엠파이어를 경영할 수 있을거요." 조용히 듣고 있던 어부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걸리는데요?" "15년에서 20년쯤." "그리고 나서는요?" 미국인은 미소를 띄면서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적절한 때를 잡아 회사 주식을 팔아서 굉장한 부자가 되는 거요. 백만장자가 되는 거란 말이요." "그리고 나서는요?" 어부의 물음에 은행가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은퇴할 수 있지요. 작은 바닷가로 이사해 늦게까지 잠을 잘 수도 있고, 낚시도 하고, 아이들과 놀고, 집사람과 낮잠을 자고, 동네에 나가 와인을 마시고 친구들과 기타를 연주할 수 있지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열심히 일 안하는 것은 게으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 아닙니까? 똑똑해 보이는 생각의 한계를 일깨워 주는 이야기 아닙니까?
(2) 그러기에 고난은 인생의 한계를 일깨움으로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미미했던 우리의 믿음이 깨어 일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외칩니다. 고난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해주는 고마운 스승이라고. 고난은 바로 개념적인 믿음이 체험적인 믿음으로 깨어나는 기회가 됩니다. 머리로만 믿던 신앙이 가슴과 온 존재로 믿게 되는 믿음으로 자라가는 기회가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이 풍랑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바람과 물결도 잔잔케 하시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난 곧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는 이 믿음의 역설을 체험하고 외쳤습니다. 이제 나는 약함을 자랑하리라고.
오래 전 한국에서 학교다닐 때 식목일이 되면 산에 가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를 심을 때 선생님께서 누누히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심은 후 흙으로 덮는데, 어느 정도 덮은 후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심은 나무를 좀 흔들고 나서 꼭꼭 밟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흔들어야 나무 뿌리 사이로 흙이 골고루 들어가 뿌리가 든든히 서고 나무가 잘 자라게 된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속에서 흔들림을 경험하게 되면, 더욱 든든한 믿음으로 뿌리내리게 됩니다. 고난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깨우고, 우리의 믿음을 세워주는 이 귀한 선물을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고난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3) 셋째로 고난이 안겨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를 기르게 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내가 어떻게 길러집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야 길러지는 것 아닙니까? 모든 일이 평탄하고 문제가 없다면 어디서 인내가 길러질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5:3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자녀들 또 오늘 이 세대를 향해서 갖고 있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편을 조금도 참지 못하는 인내 없는 모습입니다. 물론 불편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새로운 발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온 것 인정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편리가 가져다 준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의 상실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대는 조그마한 어려움 앞에서도 쉽게 주저앉고 무너집니다. 가정 생활에서도 조그만 어려움 앞에서 쉽게 헤어지고 깨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인내를 잃어가기에 이 시대는 경박해지고, 인격의 깊이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한홍 목사님께서 쓰신 다음 세대의 날개라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마쓰시타 그룹은 세계적인 대기업답게 직원들에 대한 대우가 좋고 발전의 기회가 많아 매년 입사 시험엔 샤프한 인재들이 몰려들어 치열한 경쟁을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일본 최고의 공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이 입사 시험에 지원했습니다. 본인은 합격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최종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수치심과 분노에 괴로워하던 그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마쓰시타의 인사부에서 그에게 전보가 날아왔는데, 실은 그 학생이 수석합격자인데 전산 처리에 문제가 생겨 이름이 누락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아까운 재원을 놓친 것에 안타까워했고, 전산 에러로 이런 비극이 발생한 것에 애통해 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그룹 총수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가 그 학생을 채용하지 못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정도의 좌절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루도 못돼서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리는 나약한 정신력으론 안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만약 전산 에러가 없어서 제대로 입사했다면 수석 합격한 성적으로 봐서 요직에 배치되었을텐데, 그런 나약한 심력으로는 중요한 자리에서 좌절을 만나게 될 경우 비극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폴 스톨츠(Paul G. Stoltz)박사 같은 분도 인간의 능력을 말하면서 지성도 중요하고, 체력, 감성도 다 중요하지만, 인생이란 어쨌든 수많은 예기치 못한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고난을 이겨내는 의지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역경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그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을 Stoltz박사는 역경지수, AQ(Adversity Quotient)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지능지수(IQ)나 감성지수(EQ)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AQ라는 이야기입니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AQ가, 역경지수가 어떻게 길러집니까? 고난과 맞부닥뜨리는 데서 길러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역경지수의 중심은 바로 인내가 아니겠습니까? 고난과 역경은 바로 인내를 길러주고 AQ를 높여주니 이렇게 귀한 고난의 선물을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고난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4) 넷째로 고난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고난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더욱 깊이 느끼고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를 보면 너무 늦게, 대개 지각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신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각하신다는 것은 우리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십니다. 그런데 그 좋은 때가 대개는 가장 깊은 고난의 순간, 가장 처절한 좌절의 때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고난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픔이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그만큼 위로의 순간이 가까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만큼 새벽은 가까이 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채널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맛보는 기회입니다.
너무 아파서, 너무 고난이 극심해서 우리 생명에 종말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생명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무너진 것입니까? 우리 인생이 고난 앞에서 깨어진 것입니까? 패배한 것입니까? 인생이 이 땅위에서 사는 것이 전부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어도 좋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영원한 미래가 바로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리던 주님을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뵙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체험케 해 주는 기회, chance가 담겨져 있습니다. 고난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가 체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깊고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귀한 고난의 선물을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고난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III.
지금까지 드린 말씀 앞에서 조금 소외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내 인생은 탄탄 대로를 달려 왔는데,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는데, 나는 그 고난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비교적 순탄하셨다면 먼저 그 순탄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순탄함 속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탄했던 그 삶의 여유로 고통 당하시는 이들을 붙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에 함께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시고, 짐을 나누어 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순탄한 길을 걸어오신 분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기대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고난 앞에서 모든 사람이 그 선물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난 앞에서 깨어지고 무너지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때문에 그 인생이 처절하게 끝나버리고 마는가? 너무 고난을 미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소수의 승리한 모습을 너무 일반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고통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고난과 아픔은 정말 괴롭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을 우리 힘만으로는 정말로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두손 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손을 붙든다면, 고난의 선물은 소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귀한 선물은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임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과 인터넷을 통하여 널리 알려진 이지선 양의 이야기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평탄하던 삶에 몰아닥친 교통사고의 회오리 바람으로 전신의 55% 이상이 3도의 화상을 입은 지선 양, 옛날의 아름다웠던 그 모습을 이제 다시 볼 수 없게된 지선 양이 지난 7월 L.A.에 와서 간증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한마디가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이전으로 돌아가라 해도 거절하겠습니다."
여러분, 왜 옛날의 그 모습, 옛날의 그 얼굴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왜 그 화상이 원망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선양은 고난의 선물을 깨달았습니다, 받았습니다, 체험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담대히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전으로 돌아가라 해도 거절하겠습니다." 이같은 고백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119:71)"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고난도 유익합니다. 고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고난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고난 앞에서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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