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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6.22. 목회자 안수/파송 축하예배 - 장기옥 목사
치유하는 교회
요한복음 21:15-19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고치시며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치유하는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주님께서 부탁하신 치유의 사역을 신실되이 감당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삶이 고침받고 새로워지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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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면 참으로 아픔이 많이 있습니다. 전쟁, 폭력, 마약, 착취, 질병, 불신, 우울증, 불안, 자기혐오...등은 우리에게 아픔을 가져오며, 또 한 이것들은 우리 아픔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저도 벌써 5학년 반열에 서게 되었는데,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어느 한 사람도 아픔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질병이든, 정신적인 아픔이든, 영적인 것이든, 관계에서 오는 것이든 한가지 이상의 아픔은 있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없이 행복해 보이는 분에게도 아픔은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종류와 강도가 다를 뿐입니다.
특히 이 미국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겐 이민자라는 자체가 하나의 아픔이 되기도 합니다. 한국에 있었으면 문제가 안 되는 의사소통에서부터 문화적 차이, 정체성의 문제, 인종차별대우, 운전 못하는 어려움 등 많은 아픔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안정되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도 지독한 고독에 울고있는 형제도 있습니다.
때로 어떤 일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거나,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분들을 볼 때 참 마음이 아픕니다. 한 사람의 상처는 그 한 사람의 아픔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도 상처를 주게 되고, 결국엔 그가 속한 가정, 공동체들도 아프게 됩니다. 이들 모두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치유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II.
그러면 이러한 아픔은 오늘날에만 존재하는 것입니까?
성서는 태초부터 이러한 아픔이 있어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불복종하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두려움과 죄책감, 자기기만, 책임전가로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아픔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자유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났으나, 자유하기는커녕 오히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상처투성이인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속 치유의 손길을 뻗으셨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아픔으로 인하여 오히려 치유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하나님을 피하려 달아나곤 하였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III.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가 하나님나라의 시작이었으며,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실현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죄를 용서해주시고, 귀신을 내쫓으므로서 사람들을 온전케 해 주셨으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므로 죽음도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셨습니다. 또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을 다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영생, 즉 참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셨습니다. 치유는 곧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치유란 온전치 못한 것, 깨어진 것, 부분적인 것을 온전한 상태로 (wholeness) 회복시키는(restore)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말하면 치유목회(healing ministry)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과의 깨어진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시기로 하셨으며, 오늘까지도 교회를 통하여 그 사역을 계속해 오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든 사역들 즉 설교, 교육, 봉사, 선교, 기도, 성만찬, 친교..등 모든 것은 결국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가능케 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인간을 억압하고 죄책감과 두려움, 불안과 육체적인 병에서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교회도 사람들을 온전케 회복시키는 치유사역에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치유를 갈망하는 현대인의 신음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하며, 그 상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싸매어 주는 쎈터(healing center)가 되어야합니다.
IV.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치유사역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베드로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면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집에서 심판을 받으실 때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그것도 큰 로마 병정에게가 아니라 보잘것 없는 하녀들에게 예수님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저주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예고하신 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몹시 울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후 죄책감과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 이라는 수치심과 자기혐오감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는 놈이야. 수제자라는 것이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다니... 예수님은 내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신앙고백 했을 때 기뻐하시며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는데...다 틀렸어." 이렇게 자신에게 실망하여, 자기를 비하하며 옛날 예수님 만나기 전에 하던 고기잡이를 하러 갈릴리 바다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감히 사람 낚는 예수님의 제자로 나서지 못하고. 벌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던 때와 같은 때인 희뿌연 새벽에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밤새 헛고생하던 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하시며 많이 잡게 해주시고, 조반까지 차려놓고 와서 먹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3번 물으십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하시며 사역을 맡겨 주십니다.
여러분, 이때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갈리리 바다 해변에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V.
저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치유하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먼저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밤에 새벽녘까지 고기를 잡았으니 얼마나 시장했겠습니까? 제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조반을 준비하시고 먹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베드로의 필요 즉 예수님과 깨어진 관계의 회복이 필요함을 아시고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꾸중하거나, 빈정대거나 하시지 않고 단지 사랑의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사랑의 고백이 있을 때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갈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치유가 필요한 부분은 어디입니까?
베드로의 아픔을 아시고 찾아오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시고, 아픔을 치유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감히 나설 수 없는 우리들에게 먼저 오셔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며,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치유하는 교회, 치유하는 우리들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차려놓으신 조반을 먹고,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알고, 그것을 채워주러 갈 수 있습니다.
(2) 치유하는 교회는 언제나 따뜻하게 사람들을 환영하고, 초청하는 분위기를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조반을 차려놓고, 제자들을 초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처음 교회 오시는 분들이 서먹서먹하지 않게, 문제 있는 분들도 쭈뼛거릴 이유 없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분위기를 만들어야합니다.
(3) 치유하는 교회는 사람을 세상의 표준으로 보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표준은 업적 중심적, 결과 중심적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업적 중심적이 될 때 인간의 인격이나 감정은 무시되어 상처를 남기기 쉽습니다. 치유하는 공동체는 업적이나 결과보다는 동기와 과정을 중시하며, 남의 감정에 민감하고, 존중합니다. 많은 부분의 인간의 상처는 감정에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의 죄책감에 빠져 감히 제자라고 나서지 못하는 베드로의 심정을 아시고 그의 옛 이름인 시몬이라고 부르시며 그 아픈 마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있는 그대로.
(4) 치유하는 교회는 과거의 눈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존재의 눈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잘못할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의 연약함과 상처를 받아들이고 그 아픔을 이해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오히려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때에도 네가 나를 사랑한 줄 내가 아노라." 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베드로, 인간은 그리도 연약한 것이라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부인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두려움이 무의식적으로 나를 부인하게 만든 것이지요." 라고 이해하시고 용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가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에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착취하고 인간을 파괴시킵니다. 치유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눈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느껴본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치유를 가능케 한 것은 그가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5) 치유하는 교회는 불쌍히 여김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한번 믿어주고 "내 양을 먹이라고, 내 양을 치라"고 사역을 맡겨줍니다. 그래서 과거의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제2의 찬스를 줍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한 베드로에게 먼저, 다시 찾아오셔서 사역을 다시 맡겨주십니다. 이렇게 믿어주고, 제2의 찬스를 줄 때 인간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일도 믿고, 맡겨주신 분을 위하여 기꺼이 할 수 있게 됩니다. 생명까지도 아깝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다시 한번 신뢰를 받을 때 우리의 아픔도 온전히 치유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온전한 용서이며 이 용서가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켜 자유로운 자아로 서게 합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시몬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교회를 세울 반석으로서의 베드로,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제자로서 상처 많은 세상을 치유하러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상처 많고, 멍든 세상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임마누엘 아기예수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연약함과 아픔을 감당하신 하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 한번 아픔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시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상처를 주고, 좌절에 빠진 베드로를 다시 한번 받아주시고, 믿어주시고, 큰 사역을 맡겨주시는 제2의 챤스를 주시므로 치유하는 교회로서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 지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healing ministry에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상처를 치유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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