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5.18. 봄철부흥사경회 - 김정호 목사
사랑의 고백과 사랑의 회복
요한복음 21:15-17
한국에서 요즘 인기 있었던 '올인'이라는 연속극이 얼마전 막을 내렸다고 합니다. 저도 보았는데 재미있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 김인하가 파란만장했던 자기 인생을 돌이키며 민수연이를 끌어안고 맹세하는 자기 독백을 들으니 나는 인생을 도박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내 인생 모든 것을 내걸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에 모든 것을 걸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사랑하는 이 한 사람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걸 것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위해 '올인'하겠다. 마지막 장면이 좀 싱겁기는 했지만 그 결론이 멋있었습니다. 왜 그 연속극이 인기가 있었느냐? 이런 저런 평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순수하게 인간의 인간다움을 사랑의 순수함을 지켜오려고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이 사람다운 것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순수한 우정과 사랑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사랑 받아야 하는 필요와 사랑해야 하는 필요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도 사랑 받고 있다는 사랑의 자신감과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랑의 용기가 있어야 그 인생을 의미 있게 살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제일 먼저 자기를 버리고 도망했던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제일 큰 죄책감에 빠져있었던 제자가 있다면 베드로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인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려도 자기는 절대로 그러지 않겠노라고 굳게 맹세했지만 너무도 쉽게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비겁하게 무너졌던 인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오셔서 던지신 첫 말씀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예수님도 사랑의 회복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회복이 있어야만 그 인간이 인간답게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회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I love you., 사랑합니다., 어머니 사랑해요., 여보 사랑해요, 아들아 사랑한다. 사랑합니다. 라는 이 한마디가 누워있던 사람을 일으키기도 하고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오늘 세상을 살면서 행복을 알고 기쁨을 가지고 소망을 담고 살아가는 배경에 힘이 되어 바쳐주는 것은 우리에게 들려준 사랑한다는 그 사랑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 자녀의 사랑, 연인들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이 진리는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랑의 고백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고백이 사랑의 나눔이 오갈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하고 죄를 저질렀어도 주님, 사랑합니다. 이 한 말씀 듣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 행복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큰 행복입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 천하의 최고 행복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귀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사랑하도록 맡겨주신 일입니다. 자기 식구들만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이 되는데 이기적인 사랑은 진정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모두 살다가 죽습니다. 죽기 싫어도 죽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기 원하시는 그것을 사랑하면 영원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인생의 목적을 상실했던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주님 뜻 따라 살겠다고 결단하고 살면서 큰 삶의 보람과 행복을 가졌었는데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고 난 뒤의 그의 인생은 큰 좌절로 가득했습니다. 무거운 죄책감에 빠져있습니다. 결국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찾아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회복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시고 그에게 다시 일거리를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쓸모 없던 인간을 쓸모 있게 하십니다. 다시금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주십니다. 한번 살다 죽을 육신을 가진 존재이지만 이제 영원한 삶을 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영국속담에 '하루가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한 주간 행복하려면 자동차를 사라. 한 달간 행복하려면 집을 사라 일년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해라 그러나 영원히 행복하려면 예수를 믿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캐톨릭 신부들이 이 말을 조금 돌려서 이렇게 어느 책에 썼습니다. 하루가 행복하거든 술에 취하라. 일년이 행복하고 싶거든 결혼하거라! 그러고 평생 행복하고 싶으면 신부가 되어라!
그런데 장가도 안가는 신부들의 생활이 행복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 있는데 '치마 입은 남자의 행복'이란 책입니다. 신부 58인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묶어 놓은 것인데 캐톨릭 신부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참 깊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는 여인이 한 사람도 없는 처량함! 눈먼 자식 하나 없는 쓸쓸함! 셋방 한 칸 얻을 돈도 없는 비참함!~ 아무 것도 자랑 할 것 없는 무능함!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행복과 기쁨, 즐거움과 희열이 없다면 나는 무척 우울했으리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행복과 기쁨, 즐거움과 희열이 없다면 나는 무척 우울했으리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후 깨달은 것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는 사랑할 사람도 없어졌고 사랑할 일도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형편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땀 흘려 나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사랑할 나의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없어졌을 때입니다.
저도 제 짧은 인생 돌아보면서 가장 위기를 맞이했을 때가 언제인가? 를 생각해 보면 바로 나의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흔들릴 때였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거나 자식들에게 어려움이 있었다거나 먹고 사는 것이 좀 시원치 않아서 걱정하는 때가 있었다거나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은 이겨내야 하는 어려움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결국에는 박차고 일어나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위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목적과 목표가 흔들릴 때, 열심히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내 인생 모든 것을 바쳐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일로부터 내가 떨어져 나왔을 때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위기입니다.
저는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호숫가로 찾아왔을 때의 베드로의 심정을 조금 이해합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한마디로 쪽 팔리는 것의 극치를 이루는 장면입니다. 쥐구멍이 바늘구멍만 해도 들어가고 싶은 기가 막히게 민망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상황을 사랑의 고백과 사랑 회복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기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에서 사랑을 처음에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셨고 두 번째는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물으셨습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이라면 필레오는 인간끼리의 우정과 애정을 뜻합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 대부분 동의하는 것은 각각 다른 단어를 쓴 것에 대해 큰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이 모두 네가 진정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라 할 때 친구들의 우정도 감당 못한 주제에 무슨 아가페를 말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해석학 적으로는 안 맞는지 모르지만 제 나름대로 생각해 보는 것은 처음에 예수님이 '아가페'로 질문하신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셨기 때문에 두 번째에는 '필레오'로 물으신 것은 아닐까?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해 보시니까 '아가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사랑이고 우리는 그저 '필레오'만이라도 제대로 주님께 드린다 해도 다행일 것으로 생각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필레오', 인간 조건적인 우정의 사랑만 주님께 드려도 주님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에 조건적인 '필레오'의 사랑으로도 보답 못하고 살아가는 못난 인간들이라는 것 우리 자신들이 잘 압니다.
사랑, 사랑하니까 사실 부담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 거창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아이오와 시골에서 목회하는 친구목사에게서 e-mail이 왔는데 편지 끝에 이렇게 한마디 적었습니다. "우리 불편하게 삽시다! 우리 불편하게 삽시다!" 무슨 뜻인가 하니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우리 감리교 통일위원회가 지난 수년간 북한에 국수공장을 운영하는 오병이어 운동이 요즘 북핵 문제 등 때문에 모금이 어렵게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대책회의를 소집하기로 했었는데 모임비용이 적지가 않아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의논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제안이 우리가 모두 불편하게 살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사는 것을 감수하면서 비용을 절약해서 한푼이라도 더 북한의 어린이들과 굶는 동족들을 위해 보내자는 의견을 그렇게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참 감사했습니다.
우리 불편하게 삽시다. 사랑은 사랑 때문에 불편한 것을 참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거창하게 위대한 사랑을 말하기 이전에 사랑 때문에 불편한 것을 참아내는 것입니다.
왜 세 번씩이나 물으셨을까요?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은 아무래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아픈 상처와 죄책감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영적인 병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낙심과 좌절, 죄책감과 부끄러움. 이 영적인 병으로 인해 그는 평생 사람구실 못하고 살아갈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신으로 갚았던 그 아픔을 회복시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 당사자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었는데 오셔서 베드로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 본문의 사건이후를 보면 베드로는 과거의 죄나 과거의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찾아오셔서 체험한 사랑의 회복으로 인해 이제 그는 과거의 죄에서 풀려나서 순교의 그 순간까지 주님 사랑 증거로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회복에는 큰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다가 실패해서 인생이 지옥 같은 때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평생 웬수가 따로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힌 상황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다가 정말 내가 천하에 무슨 죄를 졌기에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하나 느껴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차리고 생각해 보면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큰 행복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혼신을 다하여 사랑한 일이 있다는 것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레오 톨스토이의 글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세 가지 질문)- "기억하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란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야. 니콜라이야, 바로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란다.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야" - - 이 세상을 사는 존재의 이유가 바로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 결국 사랑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때로 내가 하는 일이 지겹고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일임을 다시 깨닫고 나면 평생 사랑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이 하나님이 내게 맡기시는 선교의 현장임을 깨닫게 되면 축복 중 축복입니다. 일에 귀천은 없습니다. 가정주부는 가정이 선교현장이고 장사하는 사람은 사업이 선교현장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가정과 일터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교의 현장입니다.
사업을 하시나요? 사업을 잘해서 회사의 직원들을 잘 먹이셔야 합니다. 손님들의 필요를 잘 충족하셔야 합니다. 역시 예수믿는 장사꾼들은 다르구나. 자기 잇속만 차리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통해 다른 사람을 살리고 먹이는 일을 하는구나 이런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을 키우시나요? 잘 돌보고 잘 교육해야 합니다. 자기자식 신주단지 모시듯 버릇없고 이기적인 아이들 만들면 세상이 피곤합니다. 의사인가요? 간호원인가요? 환자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잘 돌봐야 합니다. 세탁소를 하세요? 내가 빨아주는 옷 입고 손님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에 대한 사랑은 내 양을 먹이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양을 먹이라. 인생목적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주시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 양을 쳐라 먼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씀이 먼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내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맥없이 목적 없이 그냥 산다는 것 너무 아까운 일입니다. 다시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왔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대단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닐 줄 압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 고백을 원하십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것보다 더 원하시는 것 없을 줄 압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 사랑의 고백을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주님께 드리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하바드와 예일대학에서 상담심리학과 영성에 대해 가르쳤던 헨리 나우웬은 1980년대 이후 가장 유명한 실력있는 교수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하바드 대학 신학교 교수직을 내놓고 토론토에 있는 정신박약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쓴 책 예수님의 이름(In the Name of Jesus)를 보면 그가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받은 첫 충격은 그들이 자신을 대할 때 자신의 과거 업적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학위가 있는지 얼마나 많은 책을 썼는지 얼마나 유명한지 조금도 관심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살면서 그가 깨달은 중요한 진리는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것처럼 네게 나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답하는 훈련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내 양을 치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어려운 사람들,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위대한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그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하바드 대학이라는 세계 최고 대학교 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으면서도 불구하고 희생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고 생각했던 그 생각이 정신박약아들을 사랑하는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네가 나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사랑의 고백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그러면 여러분도 비슷한 형편일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 자신을 바라 볼 때 베드로와 같이 고개 숙인 모습으로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밖에 답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삶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언젠가 우리도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한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해주실 줄 믿습니다.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주님이 사랑하신 그것을 더욱 사랑하기를 사모하는 우리가 되길 빕니다.
예수사랑은 내 삶에 오늘 실천되어져야 하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입니다. 내 일터에서 나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는 전도가 예수 사랑입니다. 내 가정에서 내가 부모노릇 잘해서 내 자녀들이 예수 잘 믿어야 예수 사랑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구세주라 고백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무신론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곤란합니다.
세상 살면서 나 하나 내 몸둥아리 하나 잘 먹고 잘살려고 바둥거렸다면 그 인생 비극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희생해서라도 사랑할 사람들, 사랑할 일들을 회복해야 합니다. 정말 행복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판가름은 사랑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하이티 단기선교를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하이티의 수도 뽈도 프린스에서 한시간 가량 떨어진 Duplant라는 산동네에다 물탱크를 지어 주는 일을 하고 왔습니다. 정말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어린이들이 쓴 기도문을 모아논 책을 한 권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어린이가 쓴 짧은 기도문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잡초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저를 뽑으셔서 하나님 동산에 심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꽃이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님의 사랑 때문에 이 자리에 이렇게 나아 올 수 있었습니다. 잡초처럼 살던 인생이지만 하나님 사랑 때문에 지금 꽃이 된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 사랑 감사해서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사랑의 고백이 회복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