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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4.27. 부활절 후 첫째 주일 - 장찬영 목사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마태복음 27:57-61
예수님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은 사실 열 두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했던 사람들도 열 두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주님의 마지막과 처음은 목격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람들. . .
그냥 주님을 좋아했고, 사랑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부활의 주변에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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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40일 동안의 사순절을 지나면서, 기다림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가 있을 때 비로소 부활의 아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십자가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 예수님의 한 손이 하나님의 손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손은 절망하고 있는 인간의 손, 병들어 죽게 된 인간의 손을 붙잡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한번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 여기에 당신의 자녀가 있습니다", 또 한번은 절망한 인간의 영혼을 향하여 "얘야! 이분이 너의 아버지이시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손과 인간의 손을 만나게 하신 것이 십자가의 의미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십자가란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지 않으면 안될 만큼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할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가 있었기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대했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부활의 한 가운데서 부활의 영광을 경험했던 제자들이나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만을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그렇게 부활의 이야기를 주님으로부터 자주 들었지만, 정작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는 다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마지막은, 아니 오히려 부활의 첫 시작은 그렇게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아닌,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부활을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은 당신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을, 당신의 부활의 처음을 그들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I.
오늘 본문 57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실 때 주님의 주변에는 당신의 어머니를 비롯한 연약한 여인들 몇 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처리할 사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는 그때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시체를 자신의 무덤에 장사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마가복음 15:43에 의하면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누가복음 23:50-51은 그를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고 소개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에 괄호를 치고 "이 사람은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을 때 그들의 결의와 실행에 반대했던 자" 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입니다. 참으로 독특한 사람입니다. '존귀한 공회원'이란 그 당시 산헤드린 회원으로서 재판할 수 있는 공적 지위가 있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고위 공직자인데 굉장히 상류계급에 속한 자로 재력도 있고, 권력도 있고,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리마대 요셉은 당시의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어느 시대이건 고위 공직에 있는 사람이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공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인해 때로 그만큼의 고민과 결단을 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고위 공직이 아닐지라도 작은 식당, 아니 작은 규모의 회사 하나를 운영한다 할지라도 그곳의 직원들과 드나드는 고객들에게 "나는 크리스챤이다'라고 공포한다는 것은 단지 잘 보이는 사무실 입구에 성구가 적혀있는 액자하나를 달고 은연중에 "나는 교회 다닌다"라는 것을 알리는 차원의 단순한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크리스챤답게, 정직하게 식당을 회사를 운영할 것이고,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부끄러운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일종의 자기 양심선언과도 같기에 더 많은 수고와 때로 만만치 않은 결단과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 놓아야 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어떠한 결정이 옳지 않음에도 다른 사람들이 이미 다 결의해 놓고, 이미 분위기가 지배적인데 불구하고 그곳에서 그 결정의 옳지 않음을 얘기한다는 것은 생각 이상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정치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과 결탁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이것이 분명 잘못 되었음을 반대했던 유일한 공직자였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리마대 요셉은 참으로 돈이 많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이 예수 믿기가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돈이 더 크게 보일 때가 다른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돈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 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한 채로 주님을 따랐던 열 두 제자와 같은 입장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고위 공직에 있음에도, 상당한 재력이 있었음에도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사모하고 스스로'예수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모든 직업을 다 버리고 신학교 가는 것은 물론 어려운 결단이겠지만, 결단 이후부터는 자유로와 질 것입니다. 물론 신학교 들어간 후의 또 다른 고민이 있겠지마는 그 순간 그는 simple 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아주 전문적인 전도인이나 사역자가 되는 것 나아가 선교사가 되는 것 또한 훌륭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직장에 남아서 예수님의 제자처럼 산다는 것은 또 하나의 십자가를 지고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야 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해야 하기에 어려운 일입니다. 차라리 신학교를 가고, 선교사로 헌신하면 쉽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서 모순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교우 분이 저에게 그러시더라고요. "목사님, 목사님은 참 좋겠어요. 새벽부터 말씀보고 늘 설교 준비하시고, 심방 다니시고, 늘 모여도 교회에서 모이고, 교회에서 회의하시고 그러니 얼마나 좋겠어요... 저도 신학교에나 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래 그분 말이 맞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분이 얘기하는 것이 자기가 신학교 가겠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니 목사는 아무 고민도 갈등도 없나요?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분은 자신이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얼마나 갈등과 번민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와 삶의 현실과 싸워야 하는지를 예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이미 목사예요. 자격증만 없을 뿐이에요. 그러니 신학교 갈 필요 없어요. 힘들어도 그곳에서 열심히 사세요. 정직하게 회사 운영하시고 직원들에게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바로 그런 상황에서 헌신했던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은 자기가 앞으로 묻혀야 무덤, 아주 값비싸고 좋은 새 무덤, 한 사람도 써 본 일이 없는 그런 무덤을 기꺼이 예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돈이 많아서였을까요?. . .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다는 것' 과 '돈을 나눈다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또한 장례를 치르려면 예나 지금이나 돈이 많이 듭니다. 무덤은 고사하고, 시신을 운반하고 닦는 사람을 써야하고, 격식을 갖추어 시신을 세마포에 싸야하고 향을 내어야 합니다. 이 모든 비용을 이 사람이 다 감당하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분명히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처럼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다시 부활할 것을 믿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 장례를 치르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쳐올지, 인기하락이, 아니 불이익이, 아니 심지어 생명을 위협받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냥 단순히 예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 .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도망갔을 때 그저 묵묵히 예수님의 시체를 뒤치다꺼리하는 믿음. 그렇게 그는 이제는 아무 보상도 바랄 수 없는, 아니 아무 응답도 없는 예수님의 시체를 정성껏, 자신의 무덤까지도 드려가면서 주님의 이 땅위에서의 마지막을 정리해 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많은 곳을 방문하고 찾아갑니다. 가정을 심방하기도 하고, 회사에 찾아가기도 하고. . .직장에도 일하시는 가게에도 병원에도 참 많이 다닙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저 자신에게 솔직히 물어볼 때, "목회자로서 어떤 곳이 가장 찾아가기 힘든 곳일까" 자문자답 해 볼 때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Nurse실'이나 'shut-in'에 게신 분 혹은 '중 환자실'에 계신 분들에게 갈 때입니다. 물론 그곳에 가서 그분들의 손을 만져주고 함께 찬송을 하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립니다. 또 성만찬을 하면서 거의 그분들에게 주님의 떡과 살을 직접 먹여 드립니다. . .그런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왔다고 저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저를 환영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때로 성찬을 받는 그분들도 거의 저를 알아보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곳을 심방하고 돌아올 때마다 제 마음속에 일어나는 마음은 "아 나는 정말 목사구나, 아, 나는 아직도 쓰임 받고 있구나" 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는 아무런 보상도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때로 잔치 집에 갈 때가 있습니다. 근사한 분의 초청을 받아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돌아 올 때는 허전해요.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곳에서, 그분으로부터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 대접받고 인정받고 사랑 받았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언제 당황합니까? feedback이 없을 때입니다. 아니 솔직히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 전에 무엇을 먼저 생각하나요? feedback 이예요. 그로부터 올 반응이에요. 그래서 반응에 민감해요. 우리는 솔직히 늘 그렇게 관계 적이고 계산적이에요...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비밀도, 부활의 영광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지만 그래서 아무 기대도 할 수 없었지만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그냥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아무 기대도 보상도 없이 자신의 무덤까지도 다 드려 그렇게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는 부활의 한 가운데가 아닌, 어찌 보면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한번도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그 이름이 드러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마지막까지 주님을 그냥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II.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또 다른 한 부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61절은 이 여인들에 대해 짧게 한마디로 요약하며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가까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던 자들도 다 떠났습니다. 이제는 남의 무덤을 쓰고 계시는 주님의 시신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쓸쓸한 무덤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을 떠나지 않고 무덤을 향해 앉아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분명히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동안에도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시체가 되었을 때에도 이들은 계속해서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제자들도, 모든 사람들도 다 떠났는데 사랑하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무덤 앞에 앉아있는 두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여인들에게서 참된 사랑과 믿음과 헌신, 그리고 용기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물론 분명한 것은 이 여인들도 십자가의 비밀을 다 알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부활할 것을 믿었던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런 표현이 성경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뿐입니다. 그냥 십자가의 주변에서 예수님을 소리 없이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런 능력도 기적도 보여주지 않는 예수님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들의 마음. . . 우리는 그들을 통해 진정한 믿음을 봅니다. 진정한 사랑을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일이 있으면 열심을 냅니다. 일이 없으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를 주면 열심히 합니다. 자리를 주지 않으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입장을 새워주면 열심히 합니다. 입장을 세워주지 않으면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어떤 것이 바른 믿음일까 생각해 봅니다. 일이 있거나 없거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내가 처한 상황과 관계없이 그저 너무 좋아서, 너무 사랑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괜히 교회에 와서 벽만 한번 만져보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점심 시간 이용해서 성전에 들어와 잠깐 앉았다 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사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한 분은 아주 오랜만에 교회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예배시간에 예배에는 안 들어가시고, 빙빙 도시다가 순원친교실에서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식사하고 계신데 반가워서 짓궂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 동안 별 일 없으셨어요, 아니 어떻게 오셨어요?" 그러니까 이 분 하시는 말씀이 그냥 교회 국밥 먹고 싶어서 오셨다는 겁니다. 아니 이분이 좋은 거 다 나두고 3불 짜리 국밥이 뭐가 맛있어서 오겠어요. 예배당은 안 들어가도, 사람들은 못 만나도 그냥 교회 한번 들려 보고 싶은 겁니다. 다른 이유가 없어요. 그냥 주차장에라도 왔다가 가더라도 그러는 겁니다. . . 바로 이것이 이 여인들의 믿음입니다.
이미 주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냥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나 빚진 것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체를 향하여, 무덤을 향하여, 그냥 눈물 흘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렇게 넋 빠진 채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애정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따뜻한 감격과 사랑이 사라졌다는데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사실 얼마나 내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느냐와, 아니 어떤 직분을 갖았느냐와도 관계없습니다. 진짜 믿음은 "얼마나 주님을 정말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느냐" 바로 그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주님의 주변에,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주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아침 우리자신에게 물어 봐야 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분이 살았을 때에도 사랑하고, 죽었을 때에도 사랑하고, 병들었을 때에도 사랑하고, 건강할 때도 사랑할 수 있는가? 여러분, 병을 고쳐주시고 사업이 번창할 때 그분을 사랑하시지만, 여러분들의 몸이 병들고, 어려움을 겪고, 자녀들이 합격을 못하고, 사업이 어려움을 당할 때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나는 주님을 떠나지 않고 무덤이라도 지킬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말입니다. . .
III.
지난주는 아름다운 부활주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부활주일에 갑작스런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저희 교회 이용성 교우님 가족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막내 딸 농구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신호등에서 다음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트럭을 몰고 처음 거리로 나온 스패니쉬 분이 운전하는 차가 운전 미숙으로 신호대기하고 있던 이분들을 뒤에서 전속력으로 들이받았던 것입니다. 아빠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부인은 옆에 있고, 두 딸은 뒤에 타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부인인 권인숙 교우는 지금 임신 8개월 째 있는 임산부였는데 말입니다. 다행히도 정밀검사 결과, 태중에 있는 아이에게는 큰 영향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분들을 향해 모든 예배가 끝나자마자 출발했습니다. 특별히 최근 들어 이분들을 가까이서 자주 뵐 수 있었습니다. 홍 철 권사님의 인도로 그분들이 운영하시는 D.C.에 있는 가게도 찾아가 뵈었고, 이성원 집사님 인도하시는 한물속 속회를 통해서도 그렇고, 권인숙 교우님, 아버님 추모예배를 통해서도 그렇고, 게다가 전혀 뜻밖의 임신으로 부끄러움 반, 감사함 반으로 계시던 분들, 심방하면서 그렇게 축복까지 하고, 제게 아기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시던 모습이 바로 몇 일전 모습이었는데... 아니 목사가 그렇게 까지 축복했고, 두 분 또한 얼마나 신실하게 믿음 생활을 하였는데 교통사고라니. . .그것도 온 가족이.
그분들을 만나러 가는 차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얼마나 다치셨을까? 정말 아기는 괜찮은 걸까? 아니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 주어야 하나?. . .이럴 때마다 목사로서의 고민과 염려는 "하필 그렇게 믿음생활 잘해 보려고 하실 때 이런 일 생길까"하는 것이고 "혹시나 이번 일로 그렇게 애쓰시던 믿음을 내려놓으시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염려요 저의 걱정이었던 것은 함께 얘기를 나누면서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는 저의 생각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내렸던 결론은 감사하게도 "그것은 그리스도인도, 아니 온 가족 그리스도인도 이런 일을 겪을 수 있다. 그것도 부활주일에도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운이 나쁜 것도 아니요, 내가 심각한 죄를 져서도, 하나님의 징벌도 아니다. 세상은 그렇기에, 그래서 살면서 이런 저런 일을 다 겪을 수 있기에, 아니 겪어야 하기에, 또한 우리도 예외가 아니기에, 우리는 이번 일로 분명 여러 가지로 고통스럽겠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이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갈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분들은 이번 부활절에는 최소한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변에 있었음에도, 아니 어느 때보다도 고통스런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 보다도 더욱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니, 혹 다른 사람처럼 사역을 열심히 못하시면 어떻습니까? 아니 때로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지 못하시어 빠지는 날이 많으시면 어떻습니까? 때로 아직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 드리면 좀 어떻습니까? 혹 다른 가정처럼 가정예배를 못 드리거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 들으시면 왠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 같고 어색하시면 어떻습니까? 예수 믿고 술 담배끊어 보려고 했는데, 정말 제대로 믿어 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십니까? 아니 안되면 좀 어떻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다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 부활의 주변에 있던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그렇게 찾아오시고, 그렇게 기다리셨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 .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가정에서 아니 저의 집안에서 처음으로 신앙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신앙을 갖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린 마음에 늘 '나는 주변인이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저의 가장 부러움은 교회 다니시는 부모님을 가진 친구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느 누구 하나 교회라고는 다니지 않는 가족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처음 나간 교회는 무작정 좋았던 곳이었습니다. 제가 나간다고 알고 반겨주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교회는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그렇게 그냥 좋았던 곳이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새벽에도 모인다고 해서 그렇게 새벽기도를 시작한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가 있어서 교회 나갔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 . 철저하게, 아니 완벽하게 주님의 부활과는 관계없었던 저에게, 아니 늘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저에게 주님은 그렇게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아니 주님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 .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 여러분 스스로가 혹 부활의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왠지 주님의 부활과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느껴지십니까? 왠지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 같아 늘 죄송스러우십니까? 괜찮습니다. 우린 다 그렇게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냥 주님을 좋아하는 마음, 그냥 주님을 사랑하시는 마음,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은 나를 아신다 라고 하시는 그 마음, 도대체 끊을 수 없는 주님을 향한 그 마음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부활의 주변에 있었던 분들처럼,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순수한 마음을 회복해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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