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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4.13. 부르심(6) / 종려 주일 - 조영진 목사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마가복음 8:27-38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어떤 삶을 뜻합니까?
왜 십자가를 지기가 어렵습니까?
왜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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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주일입니다. 군중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지만, 이 행렬은 초라했습니다. 번쩍이는 창검도, 군마도, 질서 있는 병사들의 행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군중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별 볼 일 없는 제자들이 전부였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의 소리도 몇 날 못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종려주일의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고난 주간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짧은 생애, 짧은 전도활동의 종말을 고하는 전주곡이었습니다. 초라해 보였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용기 있게 십자가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생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부르심" 이란 제목 밑에서 드려온 연속설교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동안 저는 인생의 각성과 하나님께로의 돌아옴을 촉구하시는 에덴동산에서의 부르심, 주홍같이 붉은 죄일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해주시는 용서의 은총에로의 부르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향한 쉼에로의 부르심, 목마른 자들을 성령 안에서의 풍성한 삶에로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 사명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대해서 각각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금번 연속설교의 결론으로 제자의 길, 십자가를 지는 삶에로의 부르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I.
오늘 봉독해 드린 마가복음 8장의 말씀은 길지 않은 예수님의 전도활동에서 획을 그으는 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을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 또는 예언자 중의 한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 구원자이십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받으실 고난을 예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마가복음서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이르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세 번 자신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십자가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작정한다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제자의 길은 불가능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자신의 과오나 부주의 혹은 예기치 않은 실패로 찾아오는 고난들을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한 식생활로 위장병이 생겼는데 이 병을 자신이 져야하는 십자가로 생각합니다. 또 자신이 절제 없이 방탕해서 찾아온 가난인데, 이 어려움이 자신의 십자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십자가에는 두 가지의 십자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착각의 십자가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의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착각의 십자가는 자신의 욕심이나 죄 혹은 과오로 찾아오는 고난이고, 복음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서 오는 고난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착각의 십자가에 십자가란 단어를 붙이는 것 자체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신학자였던 본 회퍼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고 그분께 매임에서 오는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 최고의 자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줄기차게 추구해 나감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복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최고의 가치, 최고의 권위를 내어 드린 삶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타협이 없었습니다. 물러섬도 없었습니다. 어떤 희생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II.
그런데 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길은 결코 넓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부담 없이, 편안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희생이, 어려움이 따르는 길입니다. 따돌림과 외로움이 따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대단히 부담스러운 길입니다.
(1) 이 같은 어려움은 우선 내 자신 안에서부터 발견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할 때 잘되십니까? 왜 우리 안에 이 길을 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피하려는 유혹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이 분명히 내 뜻보다 훨씬 좋고 위대한 뜻일텐데, 왜 이 길을 가로막는 세력이 내 안에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을 따르는 길이 가장 안전할 텐데, 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내 뜻에 집착하려는 마음과 생각이 생겨납니까?
(2)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어려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직장에서도 다가옵니다. 왜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주변에서 비웃는 소리들이 들려옵니까? 너 혼자만 깨끗한 척 하는가? 라는 비난의 소리가 왜 들려옵니까? 진실 되이 살아가려는 사람을 매장시키려 하고 따돌리려는 세력이 왜 기승을 부립니까? 왜 적당히 타협하고, 좋은 것이 좋다고 적당히 넘어가는 삶의 모습이 각광을 받습니까? 왜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익을 많이 남기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처럼 여겨집니까?
(3) 여러분,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최선인데, 최고인데, 왜 이 최고의, 최선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저항이 생깁니까? 왜 반대가 있고, 왜 밑지고 손해보아야 합니까?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죄의 깊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 내면에, 또 세상에 만연해 있는 죄의 문제를 봅니다.
여러분, 예수님 같은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되는 세상, 과연 제대로 된 세상입니까? 그분을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인생들, 과연 제대로 된 사람들입니까? 정직히 살려고 할 때 꼭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속삭이는 내 안에 모습, 과연 의로운 모습입니까? 진실 되이 살려는 사람이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받는 세상, 과연 제대로 된 세상입니까? 우리 안에, 또 이 세상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악된 모습 아닙니까? 죄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단순한 이론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세상의 reality, 실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할 때 반대가 있고, 불이익이 있는 세상, 분명히 죄에 감염되어 있는 세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 십자가의 길을 걷기가 어렵습니까? 오늘 내 안에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어려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때문에 밑지기도 하고, 출세에 지장을 가져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걷지 못하고, 따돌림 받는 길을 걷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부담 없는 믿음의 길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광을 누리고 칭찬을 받는 것은 좋지만, 수치를 당하고 따돌림을 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 덧붙여 주시는 많은 복은 좋아 하지만, 예수님을 따름으로 잃어버리고 손해보는 것은 싫어합니다. Thomas A. Kempis는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코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금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코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때에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축복을 받을 때에만 찬양합니다.
III.
이 같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우리 주님은 부르고 계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여러분, 힘들어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따돌림 받고 외로워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1) 무엇보다도 이 길은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붙드는 삶이란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그분의 뜻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없다면 그런 하나님 믿어서 무엇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걸만큼 가치 있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것 아닙니까? 내 뜻보다 못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 왜 그분을 믿으십니까? 그런 하나님 믿어서 무엇하시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외면한다면, 그 사람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도 못한 하나님, 내 이익 만한 가치도 없는 하나님, 아니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무가치함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둘째로 힘들어도, 밑져도, 외로워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 인생과 역사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내 인생이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내 생명을 최대한 사랑하는 길입니다. 또한 이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세상과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나에게 어려움을 가져다 주고, 세상의 사람이 나를 따돌린다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잡고 걸어가는 이 십자가의 길을 포기한다면, 세상이 새로워 질 길은 없습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나 혼자 들고있는 촛불마저도 꺼버린다면, 이 세상은 언제 밝아질 것입니까? 힘들고 외로워도 촛불을 켜드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변화되고 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할 때 쓰는 세 가지 문단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딱 한번만이야, 두 번도 아니고 딱 한번이라니까!" 두 번째는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안해도 돼.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하는 거야." 세 번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뭘 그래, 자 보라구! 다 그렇게들 하고 있잖아!."
주님의 교회를 섬기셨던 이재철 목사님께서 목사가 되기 전에 사업을 하신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분이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인 회사에 취직했는데,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맡긴 일은 탈세와 관련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안타까움을 느낀 목사님께서는 이 다음에 내가 사업을 하면 결코 탈세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1974년 홍성사를 설립하고 탈세를 하지 않으려 했더니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거래처에서 압력을 가하고 여기에 응하지 않으니까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국세청에서도 자료를 100% 신고해도 믿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손해를 보아도 정직하게 세금을 내니까 이제는 거래처에서도 정직한 거래를 당연하게 여기고 출판계에서도 세금 정직히 내면서도 사업을 할 수 있다는 풍토가 마련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밑져도 주님의 뒤를 따르니까 세상이 바뀌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십자가를 지는 길이야말로 내가 살고 세상과 역사를 살리는 길이 아닙니까?
(3) 셋째로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은 이 길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합니까?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땅에서 어려움 겪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이 길을 걷는 것이 지혜롭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면, 우리 주님께서도 영광의 그 나라에서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이라고. 여러분, 순간을 밑지고 영원을 얻는 것이 났습니까? 아니면 순간을 얻고 영원을 잃는 것이 났습니까? 세상에서의 편익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외면함으로 영원히 주님께로부터 외면당한다면, 이것이야말로 stupid choice, 어리석은 선택이 아닙니까? 십자가의 길을 우리 모두는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IV.
십자가의 길을 걷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주님의 부르심, 십자가의 길로의 부르심을 전해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저의 가슴은 많이 무겁습니다. 목사인 저는 늘 교회 안에서 생활하니까 이런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에 부담이 적은 편입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일터에서 닷새, 엿새 혹은 일주일 내내를 살아가셔야 하는 여러분의 어려움은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거우실 것입니다.
조목사님, 말이 쉽지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가게를 닫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렇게 살면 외로워서 못살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신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십자가를 포기하시고 적당히 믿으실 것입니까? 내게 부담이 되지 않는 십자가, 장식용 십자가나 지고 살아가실 것입니까? 여러분,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있습니까? 십자가 없이도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William Penn의 말이 생각납니다. No thorns, no throne; no cross, no crown. (가시가 없이는 보좌도 없고,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여러분, 이 길 밖에 없다면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길 외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이 없다면 지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은 물론 외롭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혼자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앞서 가셨고, 또 오늘 이 길을 걷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약속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혼자 가면 힘들지 모릅니다. 외로울지 모릅니다. 고통스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우리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와 함께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길입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길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십자가의 길을 외면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이 아침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길은 우리의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이 길은 생명의 길, 인생과 역사를 살리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아침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부르심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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