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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23. 부르심(4)/사순절 셋째 주일 - 조영진 목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요한복음 7:37-44

목마른 사람들 주님께서는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까?
가장 근원적인 목마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오늘 목마름을 해결 받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내 삶에서 생수를 맛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Clinton 대통령의 영적 조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청소년 전도자로 널리 알려진 Tony Campolo 목사님께서 여러 해 전 Pennsylvania 대학에서 가르칠 때입니다. 그 학기에 실존주의와 사회학주의란 과목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클래스 첫날 한 학생을 지목하고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자네 얼마나 오래 살았나?" 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22년을 살았습니다." 그러자 Campolo 교수는 "그것은 자네 심장이 펌프질을 계속한 햇수이고 정말 얼마나 살았나?"고 다시 물으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이 9학년 때 학교에서 New York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Empire State빌딩에 올라갔을 때의 그 경험은 100만년을 살아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잊을 수 없는 삶을 얼마나 살았는가? 다시 묻자 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그런 삶이란 2-3분될까요 모르겠습니다. 제 삶의 많은 시간은 의미 없는 시간들이었고 그렇게 살아있음을 느껴본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부르심"이란 제목 밑에서 드리는 연속설교의 네 번째 주일입니다. 그 동안 저는 창세기 3장의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오늘 우리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살펴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 주일에는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해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말씀 드렸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마태복음 11장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속에서 쉼과 평안에로의 부르심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삶의 의미, 풍성한 삶에로의 부르심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I.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절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40년간 광야생활 한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지금 달력으로 대개 10월15일 경인데, 이 때는 집이나 여관에서 생활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약 20마일 거리내의 광야나 사막에서 천막을 치고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의미는 한해 농사를 지은 후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명절을 수장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초막절에는 특별한 관례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실로암 물을 길어다가 성전까지 운반해서 뿌리는 관례였습니다. 특별히 제사장들이 순금항아리에 실로암 물을 담아 조심스럽게 성전으로 가져오면, 제사장과 백성들은 이사야 12:3의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말씀을 함께 낭송했습니다. 이 절기의 마지막 날은 조상들이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돈 것처럼 온 무리가 제단 주위를 일곱번 돌았는데, 호산나를 많이 부르기 때문에 "큰 호산나의 날"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물 행사가 벌어지는 한복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II.

목마름은 우리 몸에 수분이 필요할 때,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우리 삶에서 목마름처럼 중요한 것도 많지 않습니다. 사람이 금식을 하면 40일도 견딜 수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으면 3일을 견디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물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이 육체적인 목마름을 채워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육체에 목마르지 않도록 충분한 물이 공급되면 그것으로 우리 인생은 족합니까? 육체적으로 목마르지만 않으면, 우리 인생은 되는 것입니까? 앞에서 Tony Campolo 박사의 질문처럼 우리 인생은 육체적인 필요만 채워진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육체적인 욕구를 넘어서는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살맛 나는 인생, 풍성한 삶에 대한 갈망입니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입니다.

한국에 있는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제가 관심을 가지고 졸업논문을 썼던 유대인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Victor Frankl이라는 분인데 몇 해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Frankl은 2차대전때 독일의 수용소에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중심으로 Man's Search for Meaning(인간의 의미 탐구)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의지, will이 무엇인가? 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심층심리학의 창시자인 프로이드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지는 쾌락에의 의지입니다. 쾌락을 찾는 것이 인간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지라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Alfred Alder라는 사람은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의지를 Will to Power, 힘에의 의지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지식의 힘이든, 정치적인 힘이든, 경제적인 힘이든 힘을 가짐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고싶어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의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Victor Frankl은 집단수용소 생활 속에서 인간의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게 느껴지는 현실 속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내 인생은 아직도 뜻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이 같은 경험에 근거해서 인간이 갖는 가장 근본적인 의지는 Will to Meaning, 의미에의 의지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의미에의 의지가 충족되지 못할 때, 인간은 무의미함, Meaningless를 느끼는데 이것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의 영적 노이로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쾌락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쾌락에의 욕구만큼 끈질기고 끈끈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쾌락에 매달리는 인생 치고 행복한 사람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Frankl은 쾌락은 바른 인생을 살아갈 때, 찾아오는 결과이지, 쾌락의 추구가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인생이 쾌락을 찾다 보면 영원히 갈증을 벗어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쾌락이 주는 만족이란 일시적인 것이고, 한번 맛보고 나면 더 새롭고, 더 자극적인 쾌락을 찾게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Richmond 가는 길에 있는 Kings Dominion에서 왜 매년 새로운 탈 것을 설치합니까? 새로 설치하는 것을 보면 대개 더 아찔하고, 더 숨막히고, 더 정신 빠지게 만드는 것인데 왜 그렇습니까? 한번 타고나면 그 쾌감은 시들해지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한 갈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공이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벌고, 출세하고 유명해지면 대개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공이란 과연 그런 것입니까? 성공 역시 정상에 있을 때는 신이 나고 행복하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히 정상에 머무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의 차이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언젠가는 정상에서 내려오는 때가 있습니다. 성공에 대한 갈망, 그것 역시 우리의 인생 속에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안겨주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Half Time이란 책을 쓴 Bob Bufford는 성공보다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갈망입니다. 의미 있는 삶, 보람 있는 인생에 대한 갈망입니다. 생명이란 단순히 심장이 뛰고 살아있는 것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요한복음서의 Key Word가 바로 이 생명입니다. 생명, 풍성하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이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쾌락이나 성공에의 갈망보다 훨씬 깊고 훨씬 본질적인 갈망입니다. 오늘 성경 속에서 목마른 사람이란 바로 이 갈망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살 맛 나는 인생, 보람과 의미로 가득한 인생, 풍성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가슴에서 느끼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근원적인 갈망을 간직하고 있지만, 참으로 생명을 맛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참으로 그 의미, 삶의 감격을 맛보는 시간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위스에 살던 한 사람이 80세를 맞으면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시간으로 계산한 통계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80년을 살아오는 동안 26년 동안 잠을 잤습니다. 21년은 일하는데 썼습니다. 밥 먹는데 6년의 시간을 사용했고, 남이 약속을 안지킴으로 허비한 시간이 5년이나 되었습니다. 또 다른 5년은 그냥 불안스러워 하면서 보냈고, 수염을 깎고 세면하는 일에 228일을 보냈습니다. 아이들과 노는 일에는 20일, 넥타이 매는데 18일, 담뱃불 붙이는데 12일을 각각 썼습니다. 80년 세월 가운데 참으로 행복하고 기쁨과 보람을 느꼈던 세월은 불과 46시간 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산다고 다 행복하게, 뜻 있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람 있고 뜻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바로 이 생명, 이 보람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이 갈망을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을 때, 우리는 무의미함을 느끼게 됩니다. 삶의 감격도, 감사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목마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III.

그렇다면 인간이 갖는 그 근원적인 목마름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서 우리는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디서 생명, 살맛 나는 삶을 찾을 수 있습니까? 목마른 내 인생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팔레스틴 땅을 거니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오늘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1) 이 아침 주님께서는 초청하고 계십니다. 목마른 사람, 삶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 생명을 구하는 사람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오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이 아침 오라고 부르십니다. 사는 동안 잡아보았지만, 그래도 목마른 분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이 아침 나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시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슬그머니 걱정되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부르십니다. 나아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성공의 꿈을 잡으려고 전력 질주하는데도 잡히지 않아 허무함을 느끼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게 나아오라고 간절히 부르고 계십니다. 위대한 초대입니다. 위대한 부르심입니다.

(2) 이어서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게 나아와 나를 믿으면 성경에 이른 것처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우리는 이성이라면 머리를 떠올리고, 감정이라면 가슴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좀 달랐습니다. 지성은 가슴에 있다고 보았고, 감정, 의지, 생명은 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배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 존재,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가 강같이 흐를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생수는 바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이라고 사도 요한은 보충 설명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더 얻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 속에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모셔드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때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셨기에 오늘도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셔 드릴 때, 그 분을 믿게 될 때, 우리의 영혼 속에는 그분의 영, 성령께서 오셔서 거하시게 됩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고 이끌어 가시기 시작합니다. 성령, 곧 그리스도의 영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역사는 바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삶의 진리, 생명의 진리 위에 세워지는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생, 살 맛나는 인생, 삶의 의미와 보람으로 가득찬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NJ에 있는 Arcola 연합감리교회에서 발행하는 Newsletter에 실렸던 김광혜 권사님의 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뉴저지의 South Orange에 Kenneth Swan이라는 외과의사가 살고 계십니다. 그 의사는 1986년에 월남전에서 부상한 한 미국군 병사를 살린 일이 있습니다. 어떤 계기가 되어서 그 의사는 옛날을 회상하며 그 청년을 생각합니다. 월남전 당시 한 청년이 폭발물이 터져서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에서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습니다. 즉시 수술실에 들어갔으나 모든 다른 의사들은 그를 살리지 않는 것이, 즉 그를 그냥 죽게하는 것이 그에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의사 Ken은 의사의 임무는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그 상처를 고쳐주는 일 일뿐, 생명을 주시고 거두어 가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결정이라는 결심을 한 후 7시간에 걸쳐 대 수술을 합니다.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한 손가락도 잘라야 했으며, 특히 안과의사는 그의 두 눈을 보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두 눈을 보지 못하고 두 다리도 없는 그를 보며, 다음날 의사들은 어젯밤 그 청년을 죽게 두었어야 했다고 또 의사 Ken을 비난했습니다. 의사 Ken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본국에 있는 그의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모두 그 병사가 죽기를 원하지만 나는 그를 꼭 살리겠노라고 다짐하는 글을 썼습니다. 알고 보니 그 병사는 19세의 잘생긴 금발머리 청년이었고 이름도 그와 같은 Ken이라고 했습니다. 수술 후 꼭 4일만에 환자인 Ken은 일본으로 후송되었다가 다시 한달 후 미국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뒤로하고 21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989년 의사 Ken은 "American Medical News"지의 기자인 Peter Macpherson과 회견을 하면서 그 청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회견 내용이 나간 뒤 의사 Ken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그 병사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도 그를 살린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등등의 많은 질문들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 Ken과 인터뷰를 한 Peter 기자는 병사 Ken을 찾아보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6개월간 리서치를 했으나 찾을 길이 없어서 실망하고 있었고 그대로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져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Peter기자가 다른 글을 쓰기 위해서 Casualty Care Research Center의 Computer File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그 병사 Ken의 file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찾고자 하는 마음뿐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 여러 번 공식 요청을 했으나 회답이 없었고, 의사인 Ken은 중동의 여러 나라, 쿠웨이트, 이라크 등으로 강의를 다니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터라 다시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1991년 여름, 2년 만에 드디어 회답이 왔는데, 그 병사 Ken이 미국의 South George에 살고 있으며, 그의 Last Name이 McGarity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결혼을 해서 두 딸이 있고, 피아노를 치며, 트럼펫을 불고, 스쿠버다이브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 Ken은 정색을 하면서 그가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했으나 Peter는 그가 분명히 그들이 찾고 있었던 병사 Ken이라고 했습니다.

월남에서의 그 끔찍한 수술이 있은 지 23년이 지난 후인 1991년 9월23일에 의사 Ken과 Peter 기자는 사진사를 동행하고 조지아에 있는 Columbus로 병사 Ken을 만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의사 Ken은 오래도록 19세의 키가 늘씬한 미남 금발 청년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부인 옆의 휠체어에 앉아있는 Ken은 40이 넘은 대머리에 땅딸한 몸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악수를 하는 Ken의 손은 힘이 있었고 유머가 풍부했으며 활달하였습니다. 그는 고둥학교 교육을 거쳐 1년 만에 대학을 수료했습니다. 그는 볼 수 없으나 들으면서 피아노를 배웠고, 두 딸의 기저귀를 갈아주었으며, 자동차 타이어도 고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나무를 잘라 목수 일도 하고, 지붕 위에 올라가 지붕을 고친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가운데 열심히 살고자 한 용기를 어떻게 가지게 되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첫째, 그가 시카고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떤 의사가 자기에 대하여 다른 의사에게 "저 아이를 왜 살게 만들었을까?"하는 말을 엿들었는데, 그는 그 의사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둘째는, 만약에 이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에게는 삶이 없을(No Life) 것이기 때문에 미칠 것 만 같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I can still feel the wind blowing on my face, The sun warming my skin. I can hear sound, voices and music!"(나는 아직도 나의 얼굴에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고, 내 피부를 따뜻하게 하는 태양을 느낄 수 있다.)

Ken의 훌륭한 부인인 Theresa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Ken을 만날 당시 19세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을 때였습니다. 1970년 Annual Picnic에서 처음 그를 만난 후 그의 불구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전혀 느끼지도 못했으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유쾌하게 농담을 잘하는 그를 사랑하게 되어서 만난 지 4개월만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Theresa는 의사 Ken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늘 남편을 살려준 사람을 꼭 만나서 감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와 Ken과의 20여년의 행복한 삶을 주시고, 두 딸을 주시고, 또 앞으로 내가 그와 함께 성장하며 살아가는 그 삶, 책임감 있는 그 삶을 주심을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그 결정을 내리시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셨는지요? 15초쯤 걸리셨나요? 그 결정은 나와 나의 전 생애를 함께 걸어 갈 그 사람을 위한 책임 있는 결정이셨습니다."

그때 의사 Ken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참으로 옳은 결정을 하였습니다. 나는 환자를 보살피면 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살리고 또 죽이는 것을 결정하십니다!! Ken McGarity, 그는 애국자요, 영웅이요, 남편이요, 아버지요, 친구요, 만인의 산 증인입니다."

모두가 그대로 죽게 놔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 젊은이, 두 다리가 없고 한 손가락도 없으며 눈도 보지 못하는 그였지만, 그래도 그는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끼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샘솟는 보람과 감사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