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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9 조영진 목사
"변화의 여정"
요한복음 4:1-26
교회는 삶의 변화(Transformation)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늘도 인생과 역사를 변화시키는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이 변화의 여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 나의 인생은 이 변화의 여정을 달려가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 안에서 이같은 변화가 능력있게 펼쳐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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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기본 정신 가운데 하나는 교회는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체된 교회는 고인 물이 썩듯이 부패되기 쉽고, 그 시대 속에서 주어진 사명을 바로 감당해 갈 수가 없습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야말로 교회됨의 의미를 새롭게 묻고, 갱신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새 교인들을 맞이해 드리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교회의 역사가 이어져가는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됨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볼 때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되시는 우리 주님의 뜻을 예민하게 분별하고 새날을 열어 갈 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뭐 하는 곳입니까? 왜 교회가 있어야 합니까? 여러분께서는 왜 오늘도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여러 가지로 답변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침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이 회복되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인생들이 변화되어 새로운 생명을 찾는 곳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여기 저기에서 인생들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감격과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 Information이 전해지고 배우는 곳으로도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Information을 넘어서는 Transformation,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지난주일 저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제목 밑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진정한 위로의 길, 그것은 바로 복음 안에서 발견됩니다.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로란 바로 삶의 변화 속에서 임하는 열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생이 바뀌지 못한다면, 위로는 구호에 머물고 말뿐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바로 우리의 인생이 변화되어 질 때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바뀌어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무엇이 달라져야 합니까? 변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무엇이, 또 어떻게 달라져야 합니까?
I.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4장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안겨줍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변화되어 가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은 오늘 새로운 삶의 모습을 추구해 가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일깨움을 안겨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 지를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길에 수가라는 마을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여행길에 피곤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서 잠시 쉬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갔기 때문에 조용한 시간을 가지시던 예수님께서는 정오경 물을 길러 나온 한 여인과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예수님과 이 여인과의 대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이며 성서학자인 Fred Craddock교수는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중요한 움직임, movement를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지역적인 movement이고, 둘째는 변화의 movement, 변화의 과정입니다.
(1) 첫째 움직임을 보면 예수님의 전도 활동의 무대가 점차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전도활동은 예루살렘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어서 유대 땅으로 확대되어 갑니다. 그런데 본문 4:3에 보면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길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로 퍼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Craddock교수는 이런 움직임을 사도행전 1:8에 기록된 예수님의 명령,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과 연결시켜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2) 두 번째 나타나는 움직임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여정입니다. 예수님과 낯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진행이 되면서 점차 더욱 깊고, 더욱 심오한 의미를 갖는 모습으로 바뀌어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인을 깨우고,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빈약한 성경의 지식을 넘어서서 바로 약속된 메시야, 구원자에 대한 증인으로까지 자라가게 했습니다.
이 변화의 여정은 오늘 우리의 믿음생활에도 깊은 일깨움을 안겨줍니다. 우리가 새로워져 가는 모습, 거쳐가야 하는 변화의 여정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깨우쳐 줍니다. 예수님과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바뀌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또 교회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지를 제시해 줍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깊이 묵상해야 될 말씀입니다.
II.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 먼저 예수님과 이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놓여있던 마음의 장벽들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는 적어도 두 가지 장벽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장벽입니다. 주전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망한 후, 그 땅에는 다른 민족들이 이주해 살면서 혈통이 섞이게 되었습니다. 남왕국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워 북왕국의 땅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을 개처럼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둘째는 랍비와 여인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장벽입니다. 점잖은 랍비는 여인과 말하는 것을 금기처럼 여겼습니다: "길에서 여자와 말함은 금물이다. 아내와도 말하지 말라." "여자에게 율법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태워버려라." "여자와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악덕을 쌓는 것이다. 결국 음부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말들이 랍비, 소위 선생이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 이 여인은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면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나보고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장벽을 허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셨습니다. 먼저 initiative를 갖고 이 여인의 삶을 두드리셨습니다. 벽을 넘어서 먼저 그 생명을 찾으시고, 그 인생을 두드리셨습니다. 물을 달라고 말씀하심으로 대화의 문을 여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불러 주셨기에, 오늘 우리들이 여기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변화의 여정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갖고있는 주관, 편견 혹은 고집을 두드리시면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2) 둘째로 이어지는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말씀하시면서 생명의 샘물을 소개하셨을 때, 이 여인의 앎의 세계가 열려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은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이 여인이 다시 말합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러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이 여인은 땅의 것, 보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길러오는 이 물, 마시는 물을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생명수, 다른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영,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교회 나오면서, 믿음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무엇이 달라져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세계, 이 차원을 향해 눈이 열려야 합니다. 땅만 내려다보던 인생이 하늘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던 인생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유한에 매여 살던 인생이 영원을 가슴에 품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물, 마시는 물만 알던 인생이 우리의 가슴에서 솟게되는 생명수를 맛보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바라보는 세계가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이 새로운 세계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면, 이 영적인 세계를 향해 마음이, 생각이 열려야 합니다.
(3) 셋째로 이어지는 변화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부끄러운 모습, 숨겨있던 상처와 아픔이 드러나고 고침을 받게되는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16 이하에서 이 여인과의 대화를 한 차원 더 깊은 곳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그러자 이 여인이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화 속에서 이 여인을 묶어 매는 사슬, 이 여인이 풀어야 할 가장 부끄럽고도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여인이 낮 12시에 물을 길러온 것을 보아도 이 여인의 삶에 문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고. 많은 경우 아침에 물을 길러오는데 대낮에 온 것을 보면 남의 눈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해 봅니다.
어쨌든 문제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다섯 사람의 남편을 거치면서도 어두운 삶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는 여인, 새 남자를 맞이해 살고 있지만, 남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 딱한 현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삶을 얽어매고 있는 이 문제, 이 부끄러운 모습을 들어내셨습니다. 보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 여인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인에게 새 날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 생활 속에서 이 부분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숨기고 살아갑니다. 들어내는데서 오는 수치와 아픔을 알기에 꼭 꼭 묻어둔 채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 깊은 은혜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 채 얕은 물가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한때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 같은데, 우리의 삶은 좀처럼 변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발목을 잡으니까 더 이상 앞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 채 안타까움 속에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숨긴다고 해서 우리 주님이 모르시겠습니까? 포장한다고 해서 우리 주님께서 진실을 모르시겠습니까? 덮어놓았다고 해서 우리 주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주님께선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안타까운 가슴으로 여러분께서 안고 계신 이 문제들을 넘어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문제,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새 날을 열어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체면의 껍질을 벗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대단히 힘든 단계입니다. 그러나 변화의 여정 속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과정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초청합니다. 그 문제 주님께 아뢰시며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끊을 것 끊고 돌아설 수 있도록 힘을,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도와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내 마음의 상처, 내 깊은 아픔을 내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지유의 길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4) 남편 문제로 가슴 아픈 대화를 나눈 이 여인이 이어서 말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주님과의 대화 속에서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참으로 깨닫고 배워가는 단계입니다.
교회 나오면서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실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내게,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꿰뚫어 보시는 모습 앞에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시라고. 그러나 대화가 더 진행되면서 이 여인은 4:25에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분이 오실 것을 말하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밝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여인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이해하였다가 이분이 바로 메시야 곧 구원자이시라는 사실 앞에 서게됩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오늘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그분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누구십니까? 위대한 스승,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생활을 하신다면,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계시다면, 우리의 예수님께 대한 이해는 여기에 머물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면,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시라고 하는 것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입니다. 나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먼저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후,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대답, 곧 나의 대답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아니 나에게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누구십니까? 정말로 구원자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이해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5) 다섯 번째로 오늘 읽은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 여인 속에 임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피하고 싶던 동네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예수님을 전한 것입니다. 와서 보라고 그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 나타난 변화의 여정의 종착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됨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나 혼자만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이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아가 전했습니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 구원자가 아닐까요?" 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들과 함께 머무시기를 청했습니다. 요한복음 4:40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틀을 그곳에서 머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인의 전함을 듣고 나아왔지만, 이제는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주가 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이기주의의 벽을 넘어섭니다. 나 한사람 구원받고 기뻐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맛보며 살아가기를 열망합니다. 이 열망 때문에 나가서 전하고 외칩니다.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입술로 또 변화된 삶으로 이 복음을 증거합니다. 여러분, 이 변화를 맛보셨습니까? 그동안 얼마나 예수님을 전하셨습니까? 세상에서는 유능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무능한 우리들은 아닙니까? 믿음은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므로 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내가 복음의 생각을 붙들고 믿음 생활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III.
교회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까? 주님의 부르심 앞에 마음을 열고, 보이는 유한의 세계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영원을 향해 눈이,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부끄럽더라도 진실한 모습을 들어내 놓고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 인생의 transformation이 내 안에.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변화의 여정이 가장 힘있게 일어나는 장(context)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속회입니다. 소수의 교우들이 함께 모여 가슴을 열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제자의 길을 추구해 가는 이 속회야말로 가장 강력한, powerful한 변화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작은 교회입니다. 속회 갱신 후 지내온 3년의 과정은 많은 부족함도 있었지만, 분명한 가능성과 역사를 보아온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밑거름 삼아 또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함께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이 변화의 바람이 강하게 일도록, 또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부르시는 주님 안에서 변화의 여정을 힘있게 걸어갈 수 있도록 서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저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변화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 상처와 아픔, 죄짐을 내려놓은 참된 자유인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CA의 Grass Valley라는 Sierra 동쪽 지역에 3일 동안 폭설이 내렸습니다. 이 눈보라 몰아치는 밤에 O' Malley 신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Auburn에 있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인데 지금 죽어가는 환자가 한사람 있는데 빨리 오셔서 마지막 예식을 해줄 수 있느냐는 물음이면서 부탁이었습니다. 자정이 지난 늦은 밤이었지만 O' Malley 신부는 눈길을 헤치고 어렵게, 어렵게 차를 몰아서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간호원의 안내를 받아 신부님은 Tom이라는 환자 방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을 소개한 후에 지나가다 들렀는데 서로 이야기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Tom은 지금 새벽 3시30분에 누가 지나가다 들리겠느냐면서 그 어리석은 간호원에게 말했더니 아마 오셨나 보다고 대답했습니다. 혹시 고백할 일이 있느냐고 신부님이 물었을 때, Tom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밀고 당기는 신경전 끝에 Tom이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일생동안 기차 정거장에서 철로의Switchman으로 일했습니다. 몇 년 전 은퇴하고 숲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32년 2개월 11일전 그날의 일을 저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따라 비가 쏟아지는 악천후였는데, 크리스마스 이틀 전이었습니다. 역 직원들이 모두 파티를 하고 술을 마셨는데, 저녁 8시30분 북쪽으로 가는 화물열차를 위해서 switch를 눌러야 했습니다. 나는 자원해서 빗속에 나아가 switch를 눌렀는데 아마도 생각 밖으로 많이 취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 switch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시속 45마일의 화물열차가 길을 건너던 자동차를 들이받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젊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두 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하루도 가책과 부담을 벗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O'Malley 신부는 부드럽게 Tom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용서할 수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날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의 부모님과 두 누이들이었습니다."
복음 안에는 이 용서, 이 자유케 하는 능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이 복음을 함께 나누어 가지십시다. 서로를 용서하며 변화의 여정을 계속해 가십시다. 주님께서는 이 변화된 인생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변화된 삶을 위하여 우리 모두를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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