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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5. 신년/집사임직/새임원 헌신예배 - 장찬영 목사
"모세의 두 가지 기도"
출애굽기 33:12-16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해야 합니까?
모세의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인생 길이 힘드십니까? 외로우십니까? 불안하십니까? ......
이에 대한 모세의 두 가지 기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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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 청년들이 한 해를 결산하면서 기도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그 청년부를 지도하시는 전도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 동안 우리들의 기도가 너무나 이기적인 관심에 매여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들이 기도할 때 자신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 기도하십시다. 예를 들면 부모님을 위해, 나라의 지도자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그후, 죽 돌아가면서 기도가 시작되었는데 어떤 자매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자매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그 동안 저는 너무나 저 자신만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오늘은 무엇보다 저의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 동안 저의 부모님께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지 주님은 아십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이런 저희 아버지, 어머니의 한가지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그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좋은 사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부디 부모님들에게 좋은 사위를 허락하사 그분들의 딸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그들의 평생에 보게 하옵소서. . ." 라고 말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어찌 보면 기도의 내용만 다를 뿐 우리의 기도와 생각이 아니 우리의 삶이 자기 중심적인 혹은 자신의 이기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풍자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와 비슷한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자기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금을 거두어 만든 이 우상에게 그들은 절하며 이 송아지가 자신들의 인도자가 되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대단히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끝도 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광야길에서 구한다는 것은 너무도 피곤하고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40년 광야길을 통해 주는 의도였고 뜻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애굽에서의 습관대로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을 관철시킬, 그래서 내 마음대로 움직일 전능한 신을 다시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욕망과 소원을 들어줄 신을 만들기 위해 '금송아지 백성'이 될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3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로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中路)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내가 너희를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했지? 좋다, 나는 약속은 지킨다. 그러나 너희들 하는 것 보니 너무도 열이 받혀서 도저히 함께 갈 수는 없다. 그게 너희를 위해서 나을 것이다" 다른 Version으로 하면 "맞구 같이 갈래, 그냥 혼자 갈래?"
참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즉, 그 백성들과 동행하시면서 말씀도 하고 책망도 하고 위로도 하시던 그 교제를 이제 그만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철회하시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즉,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아니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임재를 상실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비극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고 산다할지라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당장은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여전히 나를 향한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공급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때의 하나님의 공급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도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햇빛과 비를 의인과 불의한 사람에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주신다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보편은총"(universal grace) 또는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누구에게나 다 주십니다.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을 심고 열심히 물주고 거름주면 좋은 팥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인 은총이 계속되고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오래이다 보면, 결국 하나님의 은총이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도 않으며, 나아가 교회는 나오지만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자기중심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교제,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이같이 누구에게나 주시는 '일반은총' 속에 거하며 그것으로 만족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기에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를 가진 독특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르게 하겠지만 너희와는 함께 가지 않겠다"는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깨닫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축복이라니! 그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들은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지난 송구영신예배를 드렸던 2002년 12월31일 저녁에 저희 가족이 함께 모여서 지난 1년 동안 있었던 감사의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 가족 한명, 한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이에게 얘기하기 위해서 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영아, 만약 엄마가 없으면 하영이하고 아빠는 어떻게 살지?" 물론 제가 예상한 대답은 늘 아이가 대답하는 대로, 그것도 반 영어, 반 한글 스타일로 "엄마가 die하면, 우리도 die해!"였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정답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가 하는 말이 "그럼 피자, 햄버거, 도너츠 먹자, 응?" 였습니다. 물론 질문 자체가 대단히 유치하고도 수준이 낮은 질문이었지만, 1년 전 만해도 대답은 "우리 die해" 였는데. . . 이제는 엄마가 없어도 피자나 햄버거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아이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순간적으로 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했는지 아십니까? "...아빠는 안돼, 아빠는 피자나 햄버거로 못 살아, 엄마가 밥 해줘야 되, 그러니까 엄마가 없으면 안돼!" 말을 하고 보니 아이나 저의 수준이 거의 같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마치 꼬마와 저의 식생활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이 되어버린 집사람에게 참 미안했던 적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집 사람이 방으로 들어간 사이에 하영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영아 엄마 없으면 무조건 못 산다구 그래. 그래야 우리가 happy하게 돼" 그랬더니 "아빠 그러면 나가지 말고 전화로 order해! 집에서 먹으면 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정말 어떤 존재였습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축복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출애굽기 33:4).
그들은 슬퍼하기 시작합니다. 참회하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그들의 대표자였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때 드렸던 기도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2003년 새로운 해,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간 앞에 우리는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한 신문 사설에서는 2002년 지난 한 해를 카드게임에 비유하여 이렇게 쓴 것이 흥미롭습니다. "2002년, 그것은 가장 안 좋은 세 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같았다. 그 카드는 각각 F로 시작하는 세 카드였는데 하나는 'fear'(공포) 'fall'(추락) 그리고 'fatality'(재난) 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희망의 카드 조우커(Joker)를 조심스레 보았다. 그런데 그 조커의 이름은 'an'으로 시작되는 단어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기대했던 'anew!'(다시 한번!) 가 아니라 'anxiety'(불안) 이라고 하는 카드였다... 우리가 2003년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희망의 카드, 조우커(Joker)는 무엇인가? 사실 그것은 조우커도 희망도 아니다. 우리는 단지 얘기하지 않을 뿐, 우리 모두는 온통 '불안'이라고 하는 'anxiety' 카드를 가진 채, 그것을 말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 ."
그렇습니다. 굳이 이러한 기사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가장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이 정치적 이슈나 경제적인 문제로, 전쟁의 소문 등으로 인해서 생겼다고 본다면 아마도 우리는 영원히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첨단과학과 정치, 경제학은 어떻게 하면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부단하게 제시합니다. 언제 전쟁이 종식될 것이고, 언제 주식이 올라갈 것이며, 식량난을 극복할 수 있는 종자용 음식이 개발되었으며, 인간의 유전자 복제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핵 유출 방지를 위한 인공위성이 다시 발사될 것이며. .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 불안의 근본적인 시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떠난 아담에게 왔던 첫 번째 마음은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Lor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 . .
정말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아니 정말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쟁의 소문도, 정치의 실망도, 주식의 폭락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재가 끊기면 다 끊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요, 하나님을 찾으면 다 찾는 것입니다. 여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겠다는 하나님 말씀에 충격을 받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새로운 해 2003년, 그러나 여전히 불안을 감출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제목은 바로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실 앞에서 참회하며 눈물로 드렸던 그 기도인 것입니다. 모세가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나님없이 이 백성을 가나안까지 데리고 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리하셔야 제가 다시한번 힘을 얻어 저의 여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해보면 모세의 이 기도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는, "함께 할 자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12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 친히 우리와 더불어 못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보내 주셔야 그와 더불어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이 길은 저 홀로 가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럽고 어려운 길 아닙니까? 함께 할 자를 보내주십시오. 그것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였습니다.
모세는 그 누군가와 더불어 함께 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을 알았습니다. 존 던(John Don)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시인은 인생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외로이 떨어져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리는 섬이 아니다. 우리는 대륙의 한 부분으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따로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함께 모여 의지하며, 사랑하며, 서로 돕고 나누며 살도록 지어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현대의 비극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상실'과 함께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상실한 두 번째는 '사람의 상실'이었습니다. 같이 살도록 지음받은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입장을 변명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게 되고, 그의 자녀들인 가인과 아벨은 결국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의 상실''이웃의 상실' 때문에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부딪히면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진실한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즉, 사람들은 인간 단절, 인간 소외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생애를 연구해보면 모세는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는 동역자이자 자신의 형이었던 아론에게 엄청난 실망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을 때, 형 아론은 백성들을 충동질하여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정도 상처를 받으면 보통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인간을 의지하나봐라." 좀 더 심하게 말한다면 "내가 이제부터 인간이라는 종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살겠다. . ." 이럴 만도 한데 모세는 여전히 인생은 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함께 할 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살면서 결국 '인간의 상실''이웃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모두는 살면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함께 할 사람을 보내달라"고 하는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응답하신 것을 보면, 우리의 인생 길에도 분명 동역자가, 반려자가, 친구가, 형제 자매가, 이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들의 위로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섬기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는, "은총의 표징을 보여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13절) 그리고 좀 더 담대하게 이런 요청도 합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보이셨습니까? 안 보이셨습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이십니다. . . 우리는 이 대목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모세는 자신의 입장이 너무도 급한 나머지 하나님의 영광을 요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시험한 모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비추어본다면 그것이 나쁜 동기나 지극히 이기적이거나 욕망적인 동기가 아닌, 순수한 하나님과의 갈망에서 나오는 기도라면, 아니 고달픈 인생 길에서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간절함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길에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출애굽의 영웅, 믿음의 사람 모세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확인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제가 주님께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징표를 보여 주십시오" 이 모세의 기도는 모세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이 이 백성들을 데리고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저히 저는 제 인생의 여정을 살아갈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그래서 저는 홍해를 건널 때 주셨던 당신의 능력과 사랑이 아직도 저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저에게 당신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십시오."
이런 면에서 한 가정의 부부관계나 자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아도 그 사랑이 확인되지 않으면 괜히 멀어지거나 필요 없는 오해를 푸느라 한참 시간이 걸릴 때도 많습니다... 어떤 경상도 사나이가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이 무뚝뚝하고 분위기 없는 경상도 사나이가 첫날 밤 신부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식의 간사한 말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결혼했으니까 오늘 밤 한번만은 하겠다. 그러나 이 한번은 일생 유효하다. 그러니까 오늘 한번 사랑한다고 얘기한 게 평생 가는거다. 준비됐나?... 나! 니 사랑한다. 끝!" 이라고 했답니다. 신부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런데 이 신부가 지혜로운 신부였나 봅니다. 남편에게 말하기를 "여보,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어요. 오늘 결혼했으니까 얘기하는 건데 저는 무슨 얘기를 들으면 금방 잊어 버려요. 그래서 당신이 매일은 물론이고 자주 해주지 않으면 그 말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당신이 그 말을 계속 반복해 주지 않으면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해요. 그런데 방금 전에 무슨 말을 하셨지요?" 라고 했답니다. . . .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동행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임재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 . .사실 이 기도처럼 외롭고도 불안한 인생길을 살면서 필요한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첫 번째로, "내가 친히 가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는 가나안땅에 이르게 하겠지만 나는 같이 가지는 않겠다고 하셨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그분은 역사와 인생에 대한 분명하고도 큰 계획을 가지고 모든 인생을 다스리십니다. 거기에는 그분의 준엄하신 공의와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분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 하시고, 꺼져 가는 촛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그래서 참 마음으로 회개하며 돌이키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에 당신의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 ."내가 친히 가겠다."
두 번째 응답은, "내게 너로 편케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의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와 원어적인 의미로 정확하게 같은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로 쉬게 하리라'는 듯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째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가 친히 가겠다'는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입니다. 두 번째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다른 응답 같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진정한 안식,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위로부터 주시는 평화, 이 땅을 살면서 경험하는 불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느끼는 진정한 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질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열망이 생기게 됩니다. . .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경험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렇습니다. 참된 신앙인의 마음속에는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그 열망이 목마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열망하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난 400년 동안 제일 많이 읽혀진 책이 있다면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이라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 이라는 우리말로도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로렌스 형제라는 분입니다. 이 사람은 굉장한 신학자도, 교회 지도자도 교회사에 있어서 대단한 업적이 있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사람들에게 마치 세기를 초월한 가장 고전적인 교과서처럼 읽혀지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책은 그가 의도적인 목적이나 교재용으로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죽어가면서 남긴 그저 그의 평범한 일기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1666년 자기 나이 55세 되던 해에 프랑스 파리 근교의 깔멜 수도회에 평신도 수도사로 입회하여 25년을 보내고 8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그 수도원 부속 병원의 부엌 취사장에서 일하던 요리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이 이렇게 유명해졌을까요? 한낱 부엌에서 허드레 일을 하는 이 사람과 함께 일하기만 하면, 아니 이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마음에 쉼을 얻고, 불평과 불안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책 후반부에 이 분의 생애를 소개하는 내용이 다른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로렌스 형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늘 이런 기도를 고백했다고 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접시를 닦고자 합니다. 그릇을 닦는 동안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게 하시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 계속 거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내가 하는 이 일을 받아 주시고
이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도와주소서"
또 그 다음 페이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행함으로써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자 하는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보여준 삶의 모범은 그가 제시할 수 있는 어떤 이론적 신학적 논증보다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 . 그는 취사장에서 아무리 바쁘게 일할 때에도 마음의 평온함과 하늘에 대한 생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조급해 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늘 변함없이 침착하고 평온을 유지하면서 모든 일을 제때에 제대로 맞추어 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말하기를 '나에게는 일하는 때나 기도하는 때나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서로 다른 일을 요청하는 우리 취사장의 소란함과 부산함 속에서도 나는 마음의 무릎을 꿇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처럼 큰 평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설거지를 하고 부엌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이 일들을 감당합니다"
설거지면 어떻고, 부엌일이면 어떻고, 남들이 내가 하는 일을 뭐라 하면 어떻습니까? 그 일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사랑하심,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때로 가정에 문제가 있고, 직장 일도 심상치 않고, 게다가 건강도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경제 지수가 떨어지고 주식도 심상치 않고 도무지 세상사는 것이 불안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차피 세상 살아가는 모습이라면, 이 땅에 살면서 어차피 우리가 겪어야 하는 문제라면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친히 함께 하심과 그 함께 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을, 그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오늘은 2003년의 첫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 함께 모세가 하나님께 드렸던 그 기도를 함께 고백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진실한 마음으로 진정 돌이키는 마음으로 진정 우리의 약함을 고백하며 말입니다.
"주님, 저는 너무 힘들고 지쳐 있습니다. 함께 격려하고 손잡고 인생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함께 일할 수 있는 내 인생 여정의 동역자를, 신실한 만남을 허락 하시옵소서.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붙여 주시어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시며, 우리 기업에 주님의 사람을 보내주시어 주님의 기업답게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님, 불안하고 외로운 인생길.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어진 기쁘게 감당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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