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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24. 추수감사주일 - 김상근 목사
감사의 제목을 찾아서
요한복음 6:1 -13
감사의 제목을 찾기 힘든 우리들의 곤고한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까?
초라하고 빈약한 물고기 2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비록 우리가 작고 부족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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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주일을 지키기 위하여, 오늘 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께, 먼저 양해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감사의 제목을 찾아서 오늘 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저는 여러분들이 기대하고 계신 감사절 말씀을 전하기 힘들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감동적인 감사절 설교를 많이 들으셨고, 또 감사절에 얽힌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알고계십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의 이야기, 1620년 폴리마우스에서 일어난 일들, 그리고 인디언들의 방문으로 시작된 감사절의 유래등에 대해,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올 해도 어김없이 Thanksgiving Day가 다가오고 있고,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려왔던, 이 땅의 수많은 칠면조들은, 감사절의 우리의 성대한 만찬을 위하여, 마침내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우선 여러분 모두를 향한 저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떤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여러분에게 오늘 어떤 감사의 제목이 있습니까? 감사절이 닥아오기 때문에, 마땅히 감사의 제목을 찾아야 할 터인데, 사실 요즈음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진정한 감사의 제목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감사의 제목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진정한 감사의 제목이 없을 때,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난 일년을 어떻셨습니까? 감사의 제목이 차고 넘치는 지난 한 해를 사셨습니까?
작년 9월 저는 몇 분 속장님들과 함께 시카고 Willow Creek 교회에서 열렸던 Small Group Conference 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짧은 일정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저는 그 때의 경험을 잊을 수 가 없습니다. 911 테러사건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낄 때였습니다. 비행기 티켓을 승무원에게 보여주고 저의 좌석을 찾아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면서, 저는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 보았습니다. 거의 모든 승객들이 극도로 긴장된 표정으로, 같이 비행기를 타고 갈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아랍사람이 그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이 아닌지, 근심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저도 지정된 자리에 앉아서, 제 주변의 사람들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땀이 흐르고 있던 제 손에는 휴대전화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이 비행기안에 사고가 난다면, 누구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까? 그리고 무슨 말을 할까?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그런 경험이 없으십니까? 왜 우리가 이런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야합니까? 이런 두려움 가운데 살았던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감사의 제목을 찾을 수 있습니까?
911 테러사건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공포의 흰색가루 - 탄저균 테러 때문에 빚어진 그 난리는 또 어떻습니다. 혹시 우편물에 담겨있을 지 모르는 흰색 가루에 대한 두려움이, 또 한번 우리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생각없이 집으로 배달된 편지를 띁어보던 우리들은, 편지를 개봉하는 방법을 바꾸었야 했습니다. 공기가 잘 통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숨이 깊이 들이쉬고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편지를 개봉했던 그때의 제 마음은, 참 슬픈 것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것입니까?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우리는 감사의 제목을 찾을 수 있습니까?
지난 한해동안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얼마 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와싱톤 지역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스나이퍼 테러는 또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어느 주유소에서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계속해서 고개를 앞뒤 좌우로 흔들면서 개스를 넣는 것을 보면서, 저는 한참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으로 불안에 떨었는데, 그 어처구니 없는 불안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감사의 제목을 찾을 수 있습니까?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새로운 전쟁의 소문이 또한 무성합니다. 세상은 평화를 원한다지만, 권력과 권력은 투쟁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전쟁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아프카니스탄으로 향했던 미사일 발사대의 방향이 이제 이락으로 정조준되고 있습니다. 한 신문에서 이런 촌평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자꾸 전쟁을 주장하는 이유는 부시 대통령의 이름 때문이란 것입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그의 이름 그대로, 조지고 부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꾸 전쟁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어수선 합니까? 왜 세상이 이렇게 혼돈스럽습니까? 왜 우리가 이런 극도의 근심과 어처구니없는 불안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까? 비행기 타는 것, 높은 건물에 올라가는 것, 편지 봉투를 여는 것, 주유소에서 개스를 넣는 것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도 모른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혼돈과 근심걱정 가운데서, 우리는 오늘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제목을 찾을 수 있습니까?
경제는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거나, 혹은 예상되는 Lay-off 때문에 직장에서 전전 긍긍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서도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계신 가정이 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사업하시는 분들대로,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은퇴하신 분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걱정, 약해져가는 기력에 대한 근심이 항상 우리곁에 있습니다. 이런 불안과 근심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오늘 하나님께 드릴 진정한 감사의 제목을 찾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먼저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셨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보리떡과 물고기로 장만된 초라한 식사를 앞에 놓고, 먼저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리떡과 물고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겨우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던 빈약하고 영양가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읽은 요한 복음의 저자는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보리떡과 물고기로 무리를 먹이신 이 기적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기적 이야기입니다 (마태 14:13-21, 15: 32-39; 마가 6: 30-44, 8:1-10, 누가 9: 10-17). 우리가 잘 아는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고 다른 복음서들은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리떡과 물고기로 많은 무리를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이 기적이야기를 통해서 특별히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작고 보잘것없는 물고기를 들고 감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들고 감사하신 "물고기"는,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는 물고기와 다른 것입니다. 보통 성경에 등장하는 "물고기"는 "익투스"라는 헬라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이 "익투스"라는 단어는 원래 "물고기"를 뜻하지만, 초대교회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들의 구주이십니다"라는 뜻으로, 즉, 기독교인을 뜻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스, 크리스투스, 쎄우, 오이오스, 쏘테리아의 첫글자) 그런데,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익투스"를 사용하지 않고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사용한 "물고기"에 해당하는 단어는 "익투스"가 아니라 "옵사리온"입니다. "옵사리온"은 익투스와 다른 종류의 고기입니다. 옵사리온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는 어부들이 잡아서 내다 파는 고기가 아닙니다. 옵사리온은 크기가 작고, 맛이 없는 고기이기 때문에, 어부들은 그물에 걸려들어도, 그냥 내다 버리는 고기입니다. 이렇게 작고, 맛없는 고기, 어부들이 그냥 버리는 고기를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다가 소금을 치고 말려서 먹는 고기가 바로 "옵사리온"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들고 감사하신 그 물고기는 그야말로 초라하고, 맛없고, 영양가 없는 그런 물고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초라하고, 맛없고, 영양가 없는 고기를 들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유카리스테오)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작은 물고기 두 마리 주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이 무리들과 함께 나누게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차마 감사드릴 수 없는 것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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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의 인간적인 삶은, 감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할 수 있는 삶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의 한 여관에서, 그것도 소똥 냄새, 말똥 냄새나는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탄하셨던 삶을 사셨습니다.
최근 프린스턴 신학교의 도날드 캡스(Donald Capps) 교수는 <예수의 심리학적 일대기> (Jesus: A Psychological Biography)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종교심리학 분야에 30권 이상의 연구서적을 출간한 도날드 캡스 교수는, 이 책에서 예수님의 유년기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캡스 교수의 모든 주장에 동의를 할 수 없습니다만, 특별히 예수님께서 유년기에 겪었을 상처와 고통에 대한 연구는, 예수님의 또 다른 측면을 놀랍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참 흥미로운 것입니다.
도날드 캡스 교수에 의하면, 예수님은 유년기와 사춘기, 그리고 청년기 초반동안 엄청난 심리적인 시련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도덕적인 관념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할 때, 예수님은 친 아버지 없거나, 혹은 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캡스 교수는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이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기준으로 사람의 이름을 표현하던 당시의 관습과 다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요셉의 아들"로 표현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로 기록된 점,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의 기록이 없는 점 등을 들면서, 예수님은 유년기와 사춘기동안 "아버지가 없는 자식 (Fatherless Son)"으로서, 엄청난 심리적인 고통으로 겪으며 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누가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인지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핏줄이 아님을 분명히 했을 육신의 아버지 요셉과 예수님이 어떤 부자관계를 유지 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이런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누군지,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가 누군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처음 세례를 받았을 때, 그의 사역이 막 시작될 그때, 하늘에서 분명한 음성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1절은 이 때 들린 하늘의 음성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 들린 최초의 하나님의 음성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의 아버지다" - 이것이 예수님께서 들은 하나님의 첫번째 음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캡스 교수는 이 음성을 예수님이 가졌던 "아버지의 신학 (Theology of Abba)"의 시발점이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새로운 "아버지의 신학"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위로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 가족 관계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아버지의 신학"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36)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도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눅 24:49)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이 버린 고기, 그 작고 맛없는, 그 초라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아버지께 먼저 감사했습니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초라한 것이었고, 그의 삶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곤고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작은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온 한 형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몇 달 전 이 형제가 소속되어 있는 속장님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센터빌에 새로 아담한 타운 하우스를 사서 이사한 가정이 있는데 속회 겸 입주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는 마음으로 그 집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속장님께서 제게 사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새 집으로 이사하고 입주 예배를 드리고자 계획했던 바로 그 주에, 이 형제는 그동안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Lay-off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 장만한 집에서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질 줄 알고 찾아 갔던 저는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이 형제와 그의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두 자녀들이 함께 서로를 위로하면서 믿음과 감사의 생활을 지켜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직접 그 형제의 감사의 제목을 들어보십시다.
저는 주기도문도 다 외우지 못합니다. 성경책을 보기 시작한지 이제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김 목사님의 전화를 받고 감히 제가 이 자리에 서리라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이 곳에 서게 된 이유는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속회 식구들께,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처음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와서 직장생활은 한지 9년이 되어갑니다. 그동안 저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 어떠한 신도 저에게는 그저 나약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본인 스스로 다짐하며 고단한 미국생활의 하루 하루를 버텨갔습니다. 전 최선을 다하며 직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인정받기 위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 왔습니다. 이 길만이 결혼생활 9년이 되어가는 저의 아내와 4살, 3살 되는 저의 두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믿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처음 아이스크림을 파는 일부터 이제 어엿한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괜찮은 직장에 다닌 지 8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이 교회에 다니지 않을 뿐 아니라, 모태 신앙인 저의 아내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못하게 했습니다. 목사님이 방문하셔도 문조차 열어드리지 않던 제가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갓난 아기를 데리고 제 구박을 참으며 교회를 다녀오는 아내가 안쓰러워서 였습니다. 왜 교회에 다니냐고 물어보면, 사랑하는 아내가 다녀서 집안을 평화를 위해서 "다녀준다고" 서슴없이 말하였습니다. 속회에 나가서도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타고난 선하게 보이는 인상덕분에 속원들과는 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쳇바퀴 돌 듯 몇 년을 보내며 속회분들과 점점 친해지면서 자의 반 타의 반 매주 화요일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엔 수많은 의심과 질문,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며 한쪽으로는 무엇인가 성경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이중적인 마음으로 생활하였습니다. 아침 11시부터 밤 9시까지라는 직장업무를 핑계로 아이들과 아내에게 소홀히 하면서도, 저 자신을 적당히 위로하고 자만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제 아내는 속회 때마다 기도제목으로 제가 아이들과 함께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것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속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늘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잘못 알아들으셨는지 하나님을 저를 하루 아침에 실직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정말 해직 통고를 받은 그날 아침 제 앞은 절망 뿐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말 아내와 저는 앞으로 살 길이…
당장 다음 달 집 페이먼트가 무거운 돌덩이처럼 제 마음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속회 분들 모두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근심과 걱정만이 가득했습니다. 어떻게 든 몰게지 페이먼트를 벌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니던 어느 날, 근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차를 과격하게 몰고 가던 중, 앞에 가는 차 유리창에 어린아이가 도화지에 쓴 글이 제 마음에 다가 왔습니다. Don't worry. God in control 이라는 그 문구를 보는 순간부터 제 불안했던 마음에 평온이 찾아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제 뜻대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절 위해 따뜻한 마음으로 기도해 주신 제 주위에 많은 분들, 제 아내, 속장님, 속원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저는 제 마음 속에 있던 모든 걱정과 근심 모든 것들을 지금까지 항상 내 곁에 계셨던 하나님께 염치 불구하고 모두 내려 놓았습니다.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기도해 주신 속회 분들 그리고 저의 아내, 이 모든 분들의 소중함이 절 너무도 평온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늘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제 마음에 따뜻하게 영접하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이 따뜻한 마음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다른 분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여러분은 오늘 어떤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오셨습니까? 이 형제가 하나님께 드린 그 작은 감사의 제목을 여러분은 가지고 계십니까? 내가 가진 것이 비록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셨던 예수님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그 분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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