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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17. 그리스도인과 재물(3) - 조영진 목사
십일조를 넘어서
마가복음 12:41-44
재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돈지갑의 회개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재물의 관리인 됨을 십일조 봉헌을 통하여 고백해 왔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기에 이제는 지킬 필요가 없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진정한 봉헌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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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첫 주부터 저는 "그리스도인과 재물" 이라는 큰 제목 밑에서 연속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주일에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돈지갑에서도 고백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check book은 믿음과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인생이 거듭났다면, 우리의 재물, 소유의 영역도 거듭나야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이같은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로 소유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 관리인입니다.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재물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서적인 재물관이 아닙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재물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잠시 관리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이같은 재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생각의 변화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이라는 이 성경의 가르침을 고백하는 길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먼저 수입의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려왔습니다. 재물의 영역에서도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는 이 십일조 봉헌이야말로 재물의 바른 관리인으로 살아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십일조 봉헌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재물의 관리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이 요청되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I.
금번 연속 설교의 계획 가운데 오늘 설교가 어쩌면 가장 많은 준비와 기도가 요청되는 설교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십일조 문제만큼 교회에서 예민한 문제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십일조에 관한 성경말씀은 물론, 성서사전 또 여러 권의 책을 살펴보았습니다. 십일조를 적극 옹호하는 책도 읽어보았고, 십일조 봉헌을 맹렬히 공격하는 책도 읽었습니다.
먼저 성경에, 특별히 구약 성경 속에 나타난 십일조 봉헌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십시다. 성경 속에서 십일조를 바친 처음 기록은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왕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 가운데서 1/10을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고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뵈온 후 십일조 바칠 것을 약속한 말씀이 창세기 28장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명령은 레위기 27장과 민수기 18장, 그리고 신명기 12장과 14장, 26장에 각각 나타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이렇게 여러 곳에 나타나는 십일조에 대한 기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요약하기를 어려워 합니다. 십일조가 한가지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1) 첫 번째 십일조는 한해의 추수가 끝나면 소출의 1/10을 구별하여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들에게 주었습니다.(민수기 18:21-24) 이 십일조는 성막에서 종교적인 직무에 전념하기 위해서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의 생활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장해 주기 위해서 드렸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소출의 십일조를 받은 레위인들은 그 가운데서 다시 1/10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것은 제사장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2) 두 번째 십일조는 첫 번째 십일조를 바치고 남은 것 가운데서 다시 1/10을 구별하여서 중앙 성소로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번째 십일조를 하나님께 감사의 축제를 드리는 비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신명기 12:5-19) 이때 중앙 성소가 멀면, 현물대신 현금으로 가지고 갔다가 성소 근처에서 다시 잔치에 필요한 예물들을 구입했습니다.
(3) 세 번째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해서 제3년과 6년 때에는 두 번째 십일조로 잔치를 베푸는 대신 각 처소에서 다 모아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 나그네, 가난한 사람들, 고아 혹은 과부를 위한 구제비로 사용하였습니다.(신명기 14:28-29; 26:12)
좀 복잡합니다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돕고 성막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의 생활을 보장해주고, 이웃과 나누거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1/10을 뜻하는 십일조라고 했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친 것은 소출의 20%에 가까웠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이는 것이 아닌가 혹시 염려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II.
이러한 십일조는 오늘도 교회 안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양론이 토론을 벌리기도 합니다.
(1) 먼저 십일조를 반대하는 주장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 명하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십일조를 바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넘어서라는 책을 쓰신 조누가 목사님이나 남미에 계신 장로님 한 분이 쓰신 책들은 십일조가 더 이상 필요 없음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십일조에 대한 신약의 언급이 별로 없다는 사실도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우선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속에서 십일조가 필요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십일조에만 매달려 더 중요한 정의와 사랑, 신의를 잃어버린 바리새인들을 꾸짖으면서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선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율법의 완성이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의 명령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형제나 자매에 대하여 음욕을 품지 않는 것, 즉 그 마음의 바탕까지 정결해야 함을 말씀하심으로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와 목적을 일깨워 주신 것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십일조 봉헌은 율법이라고 폐할 것이 아니라, 그 봉헌 속에 담겨진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실천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율법의 기능 가운데 한가지인 훈련을 위한 지침으로서 십일조 봉헌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재물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삶을 우리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습니까? 십일조 봉헌은 바로 이같은 믿음의 고백의 첫걸음으로 중요합니다. 십일조는 지출할 것 다 보내고, 남으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떼어놓고, 다른 지출을 시작하는 것이 십일조를 봉헌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먼저 인정하는 우선 순위의 훈련으로, 십일조 봉헌은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2) 어떤 분들은 십일조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 수단으로 타락되었기에 바칠 수 없다고 생각하시기도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 시험해 보자는 말라기 3장의 말씀이 너무 세상적이 아닌가 비판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한국교회가 너무 무속 신앙적인 기복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먼저 인정하고 그분께 맡기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물질의 영역도 책임져 주시며, 새 날을 열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풍요함 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남들이 잘못한다고 해서 나는 그렇지 않겠다고 십일조 봉헌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바른 신앙인의 길은 아닙니다. 내가 바른 생각, 바른 정신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남들 때문에 나는 안 드리겠다는 것은 바른 믿음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3) 또 어떤 분들은 오늘의 교회가 십일조를 바로 쓰지 않기에 드리지 않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온전한 십일조의 봉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교회가 바쳐진 십일조 헌금을 바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십일조는 크게 보아서 레위인들의 생활을 보장해주고, 함께 나누며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구제하기 위하여 바쳐졌습니다. 이같은 십일조의 정신은 오늘도 구현되어야 합니다. 바쳐진 헌금을 교회 안에서 다 써버리고 마는 것은 십일조의 근본정신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작기에, 봉헌된 십일조로 목회자의 뒷받침도 힘든 상황은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교회는 십일조의 근본적인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에 있는 주님의 교회가 봉헌한 헌금의 절반을 구제와 선교를 위하여 사용한 것은 이 정신의 회복을 향한 좋은 모범이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세 번째 장기계획에서 1/3까지 구제와 선교를 위해 사용하기로 계획을 세웠지만, 아직은 1/4정도에 머물고 있는 현실입니다. 좀 더 분발이 요청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가 십일조를 바로 쓰지 못한다고 해서 바치지 않는 것은 적절한 대응방안은 아닙니다. 십일조는 내가 쥐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십일조를 바로 쓰지 못한다면, 적절한 채널을 통하여 뜻을 전달하고 바로 쓰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노력도 없이 십일조 봉헌을 유보하는 것은 적절한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재철 목사님 같으신 분은 자신의 교회를 십일조를 바칠 수 없을 정도로 불신한다면, 그런 교회에서 어떻게 은혜로운 믿음생활이 가능할 것인가? 물으시면서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자신이 믿고 십일조를 바칠 만큼 신뢰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 옮기는 것이 좋다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같은 문제 외에도 십일조를 꼭 출석하는 교회에만 드려야 하는가? 혹은 전체 수입에서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세금을 공제한 수입에서 드려야 하는가? 등 가지 가지 문제들이 많습니다. 짧은 주일 설교시간에 이같은 문제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같은 물음들이 어떻게 하면 십일조를 안 드릴 수 있을까? 십일조를 바치지 않기 위한 합리화의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십일조를 바로 드릴 수 있을까? 라는 동기에서 물어졌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물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습니다만, J. Clif Christopher 목사님과 Herb Mather 목사님 두 분이 쓰시고 연합감리교 제자훈련국에서 출판한 Holy Smoke(거룩한 연기) 라는 책은 십일조 문제에 대한 적절한 책으로 소개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III.
십일조 문제와 얽혀진 이슈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새생명을 찾은 우리의 봉헌 생활은 구약의 십일조와 헌물의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조누가 목사님이 쓰신 십일조를 넘어서라는 책의 내용은 다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책의 제목에는 동의합니다.
이 아침 우리는 마가복음 12:41 이하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셔서 여러사람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 보셨습니다. 많은 액수를 헌금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렙돈 두닢, 요즈음 화폐로 계산하면 1/4센트 정도를 바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이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바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십일조를 넘어서는 진정한 봉헌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재물과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참된 봉헌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십일조를 넘어서는 참된 봉헌이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선 왜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까?
(1) 무엇보다 먼저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하는 가를 보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봉헌은 누구에게 드리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께 드린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까? 우리의 봉헌을 보시는 주님 앞에 과연 부끄럼 없이 드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금액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십일조냐 아니냐의 문제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얼마나 준비된 마음, 준비된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까?
$1짜리 지폐와 $100짜리 지폐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100짜리 지폐는 그동안 다녀온 바하마의 아름다운 해변, 고급 호텔, 식당 등의 즐거운 추억을 자랑스럽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1 지폐에게 그동안 어디를 다녀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1 지폐가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교회 헌금 바구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단다." 또 미국 정부의 화폐를 찍어내는 조폐국이 목사님들께 어떻게 도와 드릴 수 있는지 설문을 보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십중팔구는 $1짜리 지폐는 그만 찍어내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라는 조크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봉헌은 그 자리에서 주섬주섬 꺼내서 성의없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봉헌, 정성이 담긴 봉헌,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귀한 봉헌입니다.
(2) 둘째로 주님께서 칭찬하신 이 과부의 봉헌은 희생적인, 부담스러운 봉헌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도 아무런 부담이나 희생이 되지 않는 봉헌은 진정한 봉헌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과부의 봉헌을 칭찬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에 넘치는 희생적인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봉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희생적인 봉헌의 첫걸음이 바로 십일조 일 수 있습니다.
깨끗한 부자 라는 책을 쓰신 김동호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군대에서 공수부대 훈련을 받을 때 뛰어내리는 훈련을 하는데, 그 점프대의 높이가 10M라고 합니다. 그 점프대에 서면 눈높이가 대략 11M로 맞춰지는데, 이 11M 높이는 사람이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높이라고 합니다. 이 10M 높이의 점프대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을 한사람은 이보다 더 높은 비행기에서도 능히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목사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봉헌생활에서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11M 높이와 같은 것이 바로 십일조라고 말합니다. 십일조를 봉헌하는 사람은 적어도 재물의 영역에서 더 많은 봉헌, 더 많은 헌신을 할 수 있는 기본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일조 봉헌은 재물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훈련의 귀한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 장정이나 Book of Resolution(결의안 모음집)을 보아도 십일조는 바로 연합감리교회 안에서 minimum goal of giving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일조만 하나님의 것이고 십의 구는 내 것'이 아닙니다. 십의 십 모두가 하나님의 것인데,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소유의 주인 되신다는 믿음을 1/10을 먼저, 구별하여 드림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9/10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로 써야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백성들이 1/10을 드렸다면, 아니 실제로는 2/10를 드렸는데, 신약에서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우리들이 1/10도 못 드린다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가 이스라엘 백성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율법의 백성들도 소출의 1/10을 드렸는데,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우리가 소득의 1/10 드리는 것도 주저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다면, 과연 우리 주님 보시기에 어떠하시겠습니까? 물론 "십일조만 중요한가? 다른 삶에서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도 드리지 못하면서 생명을, 다른 삶의 영역에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설사 가능하다고 하십시다. 다른 삶에서는 다 드리시면서 십일조만은, 돈지갑만은 드리시지 못하시겠다는 그 고집을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고집을 우리 주님께서 칭찬하시겠습니까?
십일조 봉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넘어서는 희생적 봉헌생활은 바로 십일조를 드림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피한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3) 세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참된 봉헌이란 믿음 안에서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봉헌은 바로 믿음 안에서 드린 봉헌이었습니다. 가진 것 전부를 드리면서 왜 이 여인의 가슴 속에 내일에 대한, 아니 당장 오늘 저녁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를 드린 것은 바로 그녀의 돈지갑을, 아니 그녀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그 여인은 자원해서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봉헌은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는 믿음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한 십일조를 넘어서는 참된 봉헌은 불가능합니다. 한푼이 아쉬운데 어떻게 하나님께 그렇게 많이 드릴 수 있습니까? 믿음이 있어야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봉헌의 모습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진정한 기쁨과 감사로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십일조는 거의 강제 규정이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물이었지만, 이 감사함의 알맹이는 사라져 버리고, 드려야 된다는 부담감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진정한 봉헌을 위해서는 이 믿음, 이 감사를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기에 드리는 봉헌, 1/10에 얽매이지 않고, 아니 1/10을 넘어서서 드리는 이 봉헌이야말로 주님께서 칭찬하셨던 과부의 봉헌이고, 우리가 찾아야 할 봉헌의 모습입니다.
IV.
하나님 앞에서 재물의 바른 관리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림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물, 우리의 돈지갑이 필요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봉헌하는 우리들을 바로 세우시려는 사랑 때문입니다. 돈에 매인 인생에서 우리를 풀어 자유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리고 어려운 형제와 자매를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세월 우리는 입으로만 감사를 드려왔습니다. check book은 열지않고 입술로 때워왔습니다. 이제는 입술만의 감사, 입술만의 봉헌을 넘어설 때입니다. 주님께서 기뻐 보실 수 있는 봉헌의 모습을 찾을 때입니다. 십일조부터 시작해서, 십일조를 넘어서는 진정한 봉헌의 모습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여러 해 전 세상을 떠나신 Wesley 신학교의 Clarence Goen이란 교회사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Goen 교수님은 병환으로 은퇴하시면서 제 평생 잊혀지지 않을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Wesley 신학교에 오셔서 교수로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을 때, 학교의 도움을 받아 주택을 장만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학교의 배려를 늘 감사하시면서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라고, 나는 다만 관리인일 따름이라고 생각해 오셨습니다. 은퇴 만찬 석상에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입으로만 감사하던 때는 지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집을 다시 학교로 돌려드리면서 그 기금으로 저의 선임이었던 Dr. Chandler를 기념하는 교회사 석좌 교수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이사회에서는 Goen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석좌교수 명칭을 Chandler-Goen 석좌교수라고 명명했습니다. 모두가 깊은 감동을 느꼈던 밤이었습니다.
이제는 입으로만 감사할 때는 지났습니다. 입술로만 때우던 때는 정말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돈지갑으로도 고백할 때입니다. 십일조에서 시작해서 십일조를 넘어서는 진정한 봉헌의 삶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가난했지만, 주님께서 칭찬하셨던 그 과부의 봉헌의 모습을 우리도 드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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