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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0. 조영진 목사
"나사로야 나오라"
요한복음 11:33-44
우리 한국인들은 체면문화에 익숙해 있습니다.
내면의 모습보다는 밖에 보이는 외형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죄로 부패된 나의 모습, 어제의 아픔과 상처로 자유를 잃은 사람들, 마음의 문을 닫아 걸은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나사로야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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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전해주는 복음서가 4권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제4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서가 갖는 특징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에 대한 이해입니다. 기적을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보기보다는, 기적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해 주는 sign, 표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러기에 기적을 행하신 후에는 이에 이어지는 긴 설교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종종 보게됩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후에는 당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심을 증거하는 설교가 이어집니다.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신 후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어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1장에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예수님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며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기적으로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적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표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I.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3남매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던 중 유대인들의 위협을 피해서 계실 때였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사람을 보내서 오라비 나사로가 병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를 통해서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 이틀을 더 머무시다가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신 때는 이미 나사로가 세상을 떠난 지 나흘이 되던 때였습니다. 나사로의 장례는 끝났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슬픔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유대인의 장례법에 따라 베로 수족이 동여매진 후, 돌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죽은지 나흘이 지났다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사흘동안은 주위에 머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흘이 되었다는 말은 이제 그 영혼이 떠나갔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야속하게도 늦게, 지각하신 시간에 오셨습니다.
이 아침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죽어서 무덤 속에 안치된 나사로, 이 나사로의 모습 속에서 저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1) 죽은지 이미 나흘이 지난 나사로, 그는 이미 부패해서 냄새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부패하여 냄새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육신은 살아있을 지 모릅니다. 몸은 건강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서 죽어있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무가 뿌리와 단절되면,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수분과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그 나무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육체는 살아있지만, 그 영적인 생명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게 될 때, 그 삶은 이미 부패에 접어들게 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인생이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망의 만족을 추구한다면, 영원한 것을 버리고 썩어질 것을 추구한다면, 그 인생은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약성경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17:9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도 인간이 그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찾아오는 것은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등 부패한 인생의 모습임을 지적했습니다. 죽어서 냄새를 피우며 무덤 속에 누워있는 나사로의 모습은 먼 옛날 나사로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나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2) 둘째로 죽은 나사로는 손과 발이 베에 묶여 있었습니다. 죽었으니까 물론 움직일 수도, 움직일 필요도 없었겠습니다만, 나사로는 매여 있었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사람들이 몸에만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감정에도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랑 속에서 구김살없이 자라야 할 성정과정에서 부모님과의 원만치 못한 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내 인생을 구속하는 족쇄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또 성장과정에서 받은 내면의 상처와 아픔은 우리를 열등의식으로 몰아넣어 자신감을 잃어버린 채 부자유한 인생을 살게도 만듭니다. 어떤 때는 지나친 우월의식으로 표출되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특별히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성폭행과 같은 쓰라린 경험은 부부관계에도 아픔을 안겨 줄 때가 많습니다.
이같은 내면의 상처들은 인생을 얽어매는 사슬이 되어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살아가는 길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나같은 사람이 뭘 ..." 하는 자신감의 결여 혹은 열등의식이 우리를 주저 앉히기도 합니다. 손과 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매인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기에 손과 발이 베에 묶인 채 누워있던 나사로의 모습은 2000여 년 전 나사로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나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3) 셋째로 나사로의 모습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나사로는 베에 묶인 채 돌무덤에 눕혀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돌을 굴려서 막았습니다. 속에서는 나사로의 몸이 부패해 가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멀쩡했습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입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으로는, 내면의 세계는 진정한 자유를 잃어버린 채, 진정한 기쁨을 잃어버린 채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나 홀로 울고 탄식하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아픔의 실상들을 들어내지 못한 채, 함께 나누지도 못한 채 외롭게 인생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인들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한국인의 문화는 체면문화라고도 지적했습니다. 이 문화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상처, 아픔과 고민을 털어놓기를 주저합니다. 이 모습을 드러낼 때 올 결과를 미리 계산해 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배에서는 제대로 먹지 못해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입에는 갈비를 먹은 사람처럼 이쑤시개를 꽂고 다니는 이 체면문화를 깨뜨려야 내일이 있다고 저희들을 깨우쳐 주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되새겨집니다. 아마도 이같은 현실은 체면문화의 영향도 있지만, 내면의 아픔과 고뇌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이웃, 믿을만한 이웃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삶의 현실도 큰 역할을 하게될 것입니다. 괜히 털어놓았다가, 사람들의 입술에 오르내리는 것은 이중삼중의 고통이 되겠기에, 아예 입을 다물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번 Vision Conference 기간 중에 교우 한 분께서 나누신 이야기는 저희 목회자들에게 충격과 도전을 안겨주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 일 열심히 하고 아무 문제없어 보였지만, 내면의 세계는 지치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다는 진솔한 고백이었습니다. 이 아픔의 이야기를 들은 저희 목회자들에게 다가온 물음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고통스러워 할 때 과연 목회자들은, 또 교회의 성도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같은 아픔을 우리 교회 안에서 나눌 수 없었다면, 과연 오늘 우리 교회는 무엇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얼마나 성도들의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나누고 있는가?
오늘도 체면의 돌문으로 내면의 아픔을 막아버린 우리의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함께 나눌 이웃을 찾지 못해 외롭게 갇혀있는 우리의 형제, 우리의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돌문으로 막아버린 무덤 속에 누워있던 나사로의 모습은 2000여 년 전 옛날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나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II.
늦게서야 마리아와 마르다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여기 계시지 않았기에 오라비가 세상을 떠났다고 마음 아파하는 자매에게 오빠 나사로가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 가셨습니다. 우는 마리아, 함께 우는 유대인들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는 함께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이 말씀은 영어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입니다. Jesus wept. 영어로 두 단어 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의 따뜻한 가슴,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느끼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시기에 차갑기만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시기에 우리의 아픔, 우리의 괴로움과는 상관없는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오라비를 잃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시며 함께 우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사랑, 이 따뜻한 마음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떠나 부패해가는 우리 인생들을 책망하고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 완고한 고집 앞에서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베로 동여맨 채 부자유의 굴레에 갇혀있는 우리들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스스로 만든 굴레에 매여 부르짖는 우리의 탄식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탄식, 우리의 부자유스러움 앞에서 주님은 가슴 아파 하십니다. 눈물을 흘리십니다. 체면의식, 허위의식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 걸은 인생 앞에서도 주님은 누구보다 안타까워 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새 날이 동터오는데, 새 인생이 시작되는데, 하시면서 가슴 아파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이시기에 오늘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반역, 우리의 부족함에도 포기하시지 않으시기에 우리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염치없지만, 그래도 희망의 불꽃을 지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 인생 속에 오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아픔 속에 오고 계십니다. 실망과 좌절의 탄식 속에 오고 계십니다. 오셔서 울고 계십니다. 뭘 모르고 방황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울고 계십니다. 안타까운 가슴을 안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III.
무덤 속에 갇혀있는 나사로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슬픔에 쌓인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마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첫째는 11:39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서 냄새가 난다고 만류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나사로 같은 아픔과 갇힘을 맛보신 분들께서는 이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돌을 옮겨 놓으셔야 합니다. 마음을 여셔야 합니다. 아픔이, 상처가 드러난다는 것은 분명히 괴로운 일입니다. 냄새 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과 고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새로운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주님의 이 명령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체면의 돌문을 굴려버리고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주님 앞에 부르짖으며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마음 문을 여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길도 열리기 어렵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역사로 우리를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서 인간이 해야할 부분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마음을 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체면의 돌문을 열어 젖히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 생명을 다시 일으키실 수 있도록 오실 길을 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문 밖에 서서 우리의 삶을 두드리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는 이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문 바깥쪽에 손잡이가 없습니다. 문은 안에서만 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열면 주님께서는 오셔서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새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2) 두번째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11:43의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문이 옮겨진 열린 무덤 앞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드리시며, 이 기도는 바로 둘러선 유대인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함이라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주님께서는 이 아침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냄새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아픔과 상처, 과거의 사슬에 매여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 체면과 남의 눈치 보느라고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나오라" 그 고통의 자리에서 나오라. 그 상처와 아픔의 자리에서 나오라. 그 체면과 허위의식의 자리에서 나오라. 그 자유를 잃어버린 자리에서 나오라. 그 좌절과 불안의 자리에서 나오라. 그 방황과 절망의 자리에서 나오라. 그 헛된 만족과 썩어질 것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나오라. 그 되지 못한 자리에서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자리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아침 우리 주님의 부르심을 들으십니까? 들으셔야 합니다. 들으셔야 삽니다. 우리 주님께 나오셔야 삽니다. 우리 주님께 나오셔야 길이 있습니다. 나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셔야 무덤 속같이 지긋지긋한 인생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셔야 나도 살고 우리의 가족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나오셔야 나의 배우자도 살고 나의 자녀도 살 수 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나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새로운 생명의 길로 나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3) 세번째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1:4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의 손과 발은 베에 매여 있었습니다. 얼굴은 수건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와싱톤한인교회, 이 믿음의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바로 주님께 나아온 생명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곳입니다. 새 생명을 찾았지만, 아직도 부자유한 사람들, 아직도 어색해 하는 사람들을 풀어 놓아 진정한 자유의 삶을 누리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서로 얽매인 것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매어있는 것을 흉보고 gossip하는 것이 아니라, 풀어주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와 은총의 복된 삶을 누리도록 이끌어 주고,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 중에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작든지 크든지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각하든지 덜 심각하든지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아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평안하다고 해서 내일도 평안하리란 보장은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거친 인생 길을 헤쳐가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서로를 풀어주라고, 서로를 세워주며 참된 자유의 삶을 살아가라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 와싱톤한인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정태기 목사님의 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대학원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시려는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받아보니 한 여인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만나고 싶다고 하소연했습니다. 목사님은 음산한 기분을 느끼며 교회에 가야 한다고 거절을 했지만,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생명에 관한 문제라고, 지금 약을 사다놓고 마시기 전에 전화한다는 이야기에 그만 정신이 번쩍 나서 서둘러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구실에 나타난 여인은 마흔 둘이라는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노파 같아 보였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남편은 바람이 나서 10개월 째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가끔 돈이나 뜯으러 온다고 합니다. 자신은 교회 집사이지만, 예수님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오직 남편만을 믿고 살아왔는데, 남편이 저렇게 되니 살 이유도, 살 희망도 다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이 여인은 교회 집사이지만 남편의 바람을 막아보려고 돈암동에 가서 400만원 짜리 굿도 해보고, 300만원 짜리 부적도 천장에 붙여보고, 새벽 한시에 남편 양복을 잘라서 불살라 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저것도 안되었으니 구원을 청해볼 데라곤 딱 한군데 밖에 없습니다." "그곳이 어딥니까?" 여인이 물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내일부터 새벽기도 나가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며 기도하십시오. 첫째로 예수님이 남편 있는 곳을 찾아가서 남편을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오는 장면을 상상하고, 둘째로 그것이 이루어질 줄을 믿고, 셋째로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기도의 내용이 이루어 진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보겠다는 집사에게 정목사님은 한가지 약속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시 약을 먹고 죽고 싶을 때는 반드시 내게 먼저 전화를 하셔야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전화를 해주셔야 합니다."
구집사는 약속대로 꼬박꼬박 전화해오면서 점차 목소리가 밝아져갔습니다. 3개월쯤 지나서 구집사에게서 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오늘 새벽 남편이 제 품에 안겼어요." "드디어 남편이 돌아오셨군요!" "아뇨, 하지만 기도하는데 그런 확신이 왔습니다." 구집사가 그런 확신을 얻은 뒤 한 달이 못되어 정말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구집사 남편은 다음날부터 아내를 따라 새벽기도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구집사는 남편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선같아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돈을 얼마나 뜯어가려고 저러나 의심이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태도는 며칠이 지나도 변함이 없더니 마침내는 회개의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걸핏하면 눈물을 보이면서 구집사에게 "나같은 놈을 받아 줘서 고맙다." 고 울었습니다.
남편의 변화된 모습 앞에서 구집사는 정말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녀는 덩실 덩실 춤을 추며 동네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동네 사람들아, 예수를 믿으려면 나처럼 살아계신 예수를 믿으시오. 죽은 다음 천당에서 만나는 예수님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내 남편을 이렇게 데려오셨소."
얼마 후에 구집사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처음 목사님은 구집사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걱정과 근심에 매여 노파같아 보였던 그녀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농담을 하셨습니다. "구집사님, 그새 얼굴 근육을 당겨주는 화장품이라도 바르신 것 아닙니까?"
구집사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신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를 행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돌 문을 옮겨 놓으라" "나사로야 나오라" "아무개야 나오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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