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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9.22. Vision Conference - 구경모 목사(임마누엘 UMC, MD)

"주인이 알아서 하십니다."

마태복음 13:24-30, 36-43

오늘 하나님 주신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는 도중 알곡과 가라지의 예를 들어 천국의 비밀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강 이렇습니다.

천국의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 같은데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알곡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가버렸고, 알곡과 더불어 가라지도 싹이 나고 자랐습니다. 이 모습을 본 주인의 종들이 속상해서 와 따집니다. 이 가라지가 언제 생겼으며, 누가 심었는지 주인님은 아십니까? 주인이 말합니다. 아마 원수가 그렇게 했나보다. 종들이 다시 묻습니다. 우리가 이 쓸모 없는 가라지를 다 솎아 내고 뽑아버리겠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대답이 의외로 종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오고 있습니다. "아니다. 그냥 추수할 때까지 내 버려 두어라. 혹시 가라지 뽑다가 알곡까지 다칠지 모르겠다. 추수 때가 되면 주인이 다 알아서 추수 전문가들을 불러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서 수확할 것이니 그 일은 주인에게 맡겨두어라."

이 비유 속에는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등장인물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의미를 올바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가운데 처음으로 언급되는 씨뿌리는 자입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밭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좋은 씨, 알곡은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하고, 나쁜 씨, 가라지는 사탄의 자식들을 의미합니다. 이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물론 마귀이고, 추수 때라는 것은 세상의 끝날, 즉 심판 날을 의미하는 것이고, 주인의 고용한 추수꾼들은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제 나름대로의 해석이나 유명한 설교자나 신학자의 주석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논과 밭으로 비유되는 이 세상에서 좋은 씨, 알곡으로 비유되는 당신의 자녀들을 심으시고, 물주고 키우시며, 그리고 열매와 수확을 기다리며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를 죄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죽음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복된 소식, 복음이 전해지면서 우리의 인생이 조금씩 조금씩 알곡으로 영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과 사랑의 사역과 과정 속에는 언제나 마귀 역시 동참해서 자신의 세력인 가라지를 뿌리게 됩니다. 그래서 밭에는 늘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는 언제나 일반적인 현상이고 심지어는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도, 또 성도라 일컬음 받는 교인들 가운데에서도 항상 곡식과 가라지는 공존하게 마련입니다. 흔히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교인들을 생각할 때, 그 안에는 온통 알곡들만 가득 차 있는 천국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교회 역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음을 우리는 어느 교회에서든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알곡들은 가라지를 피해 교회를 옮겨 보기도 하고, 어떤 알곡들은 이 가라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기도하기도 하고, 혹은 가라지를 아예 갈아엎어 없애기 위해 물리적인 힘을 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절, 어디에나 알곡과 가라지는 늘 함께 섞여서 자라고 있는 것이 우리가 목격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가라지는 독을 가진 해로운 잡초이고 아무 유익한 열매나 결실이 없었으므로 뽑아 버려야했습니다. 또한 가라지 자체가 문제이기도 했지만 가라지로 인해 좋은 알곡의 성장이 지장 받고, 영양 공급에 방해를 받기 때문에 전체 곡식의 성장을 돕고,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가라지는 제거해야 하는 잡초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의 종들이 시급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인님, 밭에 가라지가 얼마나 많은 지요. 비가 한 번 왔더니 알곡보다 더 많이 생겨났습니다. 아주 보기도 싫고, 번식해 나가는 속도도 굉장히 빨라서 이러다간 그나마 있던 알곡마저도 다 망가지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낫을 들고 나가서 속시원하게 뽑아 버리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악의 세력을 일소하고, 의의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한 싸움으로서 이 일은 꼭 필요한 일로 보이는데도 주인은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다음의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우리가 알곡 가운데 있는 가라지가 암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지만 그 가라지를 뽑지 말아야하는 첫 번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을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9절 말씀,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까 염려하노라."처럼 우리의 판단력은 정확함과 공정함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라지 뽑는 일을 임의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불완전함과 제한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아무리 우리 입장에서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판단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보기에는 나는 분명히 알곡같고 저 사람은 분명히 가라지로 보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다 거기서 거기 갈만한 도토리 키 재기하는 것과 같은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전두환 정권 때에 삼청교육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회악을 일소하고, 정의 사회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사회의 암적 존재들, 조직폭력배, 시정잡배, 그리고 깡패들을 강제로 잡아다 정신무장과 체력훈련을 시킨다는 취지로 시작된 사회정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러나 평가의 기준이 에매하고, 실적위주로 변질되어 무고한 일반시민들도 많이 붙잡혀 가서 억울한 경우를 많이 당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잘못도 하지 않은 채 억울하게 끌려가 매맞고, 강제 노동과 강제 훈련에 탈진되고, 고문당해서 평생을 정신적 악몽과 육체적 장애를 겪으며 사는 사람들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라지를 뽑을 때도 이와 같은 잘못과 실수, 오해와 과오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2) 두 번째로 우리가 가라지를 뽑지 말고 참아야 하는 이유는 심판은 주인이 직접 당신의 때에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39절 이하에도 분명하게 나와 있듯이 추수꾼은 천사들입니다. 가라지의 생태와 특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주인과 추수꾼들 입니다. 마귀의 권세와 사탄의 능력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분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주인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심판을 위해 고용한 추수 전문가인 천사들입니다.

주전 4세기 후반에 활약한 사람으로 그리스 최고의 화가로 알려진 사람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궁정화가이기도 했던 아펠레스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그림을 그립니다. 그의 작업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구두장이가 아펠레스에게 말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런 스타일의 구두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펠레스는 즉시 그 자리에서 구두를 고쳐 그렸습니다. 당대의 화가였지만 구두의 전문가인 구두장이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임을 불문하고 그의 말이 정당하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그의 인격이 훌륭해 보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에 신이 난 이 구두장이가 또 한 마디를 더 합니다. "그러고 보니 구두만이 아니라 발도 이상하네" 그러자 아펠레스가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구두장이는 구두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한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일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100% 정확하고 공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조금씩 아는 것이고, 내 식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고, 나 유익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 속에도 가끔씩은 가라지의 모습이 보일 때도 있고, 내 마음 밭에 가라지가 나도 모르게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결코 심판자일 수도 없고, 심판자일 필요도 없습니다. 가라지를 뽑아내는 일은 전적으로 주인 되는 하나님과 그의 추수꾼 되는 천사들의 몫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주인이 적당한 때와 계기를 정해 전문가들을 보내어 가라지만을 말끔하게 먼저 골라내어 단으로 묶어 불사를 것이기에 우리는 그 일을 염려할 필요도 없고, 앞질러 다니며 주인의 일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가 가라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알곡 되기를 기도하며, 노력하며 사는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 종 된 우리가 주인의 일을 내 일로 오해하고 한다면, 내가 해야 할 일로 착각하고 한다면, 우리는 주인의 주권과 권리를 월권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종된 우리가 주인의 전문적인 추수꾼들의 책임인 가라지를 골라내고 잘라내는 일을 내가 해야 할 일로 오해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주인 되신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교만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두고 보시고, 하나님의 적당한 시간을 고르며 인내하고 계신데 감히 아무 것도 모르는 종 된 우리가 나서서 지금이 바로 그 때이고, 지금 당장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과연 그것이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3) 세 번째 이유는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은혜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가 해롭고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지금 뽑아 내거나, 가려내지 않으시는 것은 지금은 가라지라도 회개하면 알곡이 될 수 있게끔 문을 열어 놓으신 은혜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빈틈없고 정확하게 심판하시는 심판의 주가 되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회개하고 죄의 길에서 돌아서기만 한다면 우리를 언제나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사랑과 은혜의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마24:14 말씀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단 한 심령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기다리시고, 참고 계신데 종된 우리들이 그 앞장을 서며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가라지를 가려낼 것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비록 가라지일지라도 그들이 중생해서 새로운 알곡으로 거듭나기를 바라시며, 그들이 깨달아 돌아오기를 기대하시며, 또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달라서 하나님의 때가 우리가 기대했던 때와는 다를 수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비록 가라지가 무성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지금이 심판의 때가 아니라 은혜의 때요, 구원의 때요, 인내의 때인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알던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니 교회니 하는 것이 모두 부질없어 보였고, 신앙을 갖는다는 것도 쓸데없어 보였습니다. 그의 눈에 기독교인들은 모두 위선자로만 보였고, 그들이 속아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농부에게는 한가지 통쾌한 일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다른 기독교인들보다도 자기의 생활이 더 윤택하였고, 농사도 그 농부가 짓는 것이 교인들의 것보다 훨씬 더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니, 교회니, 신앙이니 매달리지 않아도 기독교인들보다 풍성한 축복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통쾌한 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크리스찬 신문 편집장에게 다음과 같은 의기양양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일요일에 곡식을 심었습니다. 또 일요일에 밭도 갈았습니다. 그 곡식이 다 여문 후에는 일요일에 수확을 했습니다. 물론 타작도 일요일에 했습니다. 이제 추수가 끝나고 10월이 되었습니다. 우리 집의 창고는 곡식으로 가득 차 있고, 나는 마을의 다른 어떤 기독교인보다도 많은 돈을 저축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의 어떤 크리스찬보다도 부자입니다. 물론, 나는 주일이니, 하나님이니, 교회니, 신앙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 푼 어치의 존경도 없고, 그 가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귀하는 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나에게 어떤 대답과 설명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농부가 이 자만 가득찬 편지를 보낸 지 일주일 후 편집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장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간단한 답장이었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의 최종 결말을 10월 말에 매듭짓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1년 농사는 성공일지 몰라도 영혼의 열매, 영원의 수확은 10월 말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공평하고 현명하신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면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가라지로 인해 너무 초조해하고, 조급해하며,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추수의 시간은 분명히 있고, 그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때와 꼭 같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마음 판에 새겨야 할 몇 가지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1) 첫째로 그것은 알곡 가운데는 늘 가라지가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 사회에서든지 심지어는 교회 공동체에도 알곡과 가라지는 늘 함께 있어 왔습니다. 우리의 옛날 성격과 모난 성깔, 미워하는 마음과 이기심, 교만함과 무절제함이 그대로 남아 있기에 교회 공동체에서조차도 어쩔 수 없이 가라지를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우리가 교우들 상호 간에 실망하고 실족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여정 속에서 보여질 수밖에 없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아무 흠이나 약점 없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의사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기 위해 모인 약점을 가진 인간들, 바로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끝까지 계속적으로 죄인들의 모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알곡 있는 곳엔 늘 가라지가 있어 왔으니 그 사실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무관심해지고, 무감각해지자는 말도 아닙니다. 당연히 죄인들이 바뀌어지고, 고침 받아 의인으로 바뀌어지는 역사가 있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옛 사람이 변화 받아 새 사람이 되어져야 하는 현장이 교회가 되어야함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가라지가 바뀌어 알곡으로 변해가야 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 있음으로 실망하고, 알곡보다 가라지가 더 힘있어 보이고, 더 많이 보인다는 이유로 실족하고, 이 가라지를 주인이 당장 뽑아 주지 않는 다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 두 번째로 우리가 새삼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가라지된 모습을 교회 안에서, 또는 우리들 가운데서 발견했을 때에라도 우리의 할 일은 가라지를 뽑는 일이 아니라 알곡을 더 많이 심어 나가는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라지를 뽑는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나는 알곡인데 저 사람을 가라지다." 라고 분노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이웃이나 성도들을 쓸모 없고, 뽑아버려야 할 가라지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무심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미 형제자매의 자리가 아닌 하나님과 같은 심판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뽑아도 뽑아도 그침이 없는 가라지 뽑기를 계속하기보다는 차라리 알곡심기를 계속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 어느 날 무명의 여류 피아니스트가 독주회를 한다고 광고를 내면서 자기는 그 당시 유명한 피아노의 거장 리스트의 제자라고 선전문구에 적어두었습니다. 실제로는 리스트의 제자가 아니지만, 유명한 리스트의 이름을 빌면 더 많은 청중이 동원될 수 있다 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주회 전날, 바로 그 유명한 리스트가 마을을 방문하게 된다는 소식이 그곳 지방신문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여류 피아니스트는 난감해졌고, 연주회를 포기하고 그 마을을 떠날 까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을 고쳐먹고, 리스트를 직접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고아로 자라면서 어떤 기회에 피아노를 접할 수 있었고, 지금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마을을 다니며 독주회를 열고 있는데 당신의 제자라고 포스터에다 적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에,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리스트는 "당신은 확실히 잘못을 했습니다.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대단히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니 제가 용서를 하겠습니다." 그러더니 그 여인에게 "그래 어떤 곡을 연주하려고 했던가요? 내가 당신을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제가 당신의 연주를 한 번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거장 리스트 앞에서 늘 하던 레파토리를 연주했습니다.

리스트는 중간중간 잘못을 지적해 주며 음색과 감정을 보충해 주었고 마지막에는 참 잘 연주하였노라고 그녀를 칭찬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리스트는 그 여인에게, "자, 이제 리스트에게 조금이라도 배웠으니 이 시간 이후로 당신은 내 제자입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예정된 독주회를 하십시오. 그리고 그 광고문에는 앞으로는 자랑스럽게 리스트로부터 사사를 받았노라고 적으십시오. 그리고 이번 연주회 광고문안에는 아예 선생이 직접 와서 찬조 출연하겠노라고 적어 주십시오."

아마 가라지를 뽑아내고자 했었다면 리스트는 평생동안 자기의 이름을 사칭하는 자들을 찾아내느라 분주했을 것이며,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그러한 범죄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라지 뽑기보다는 알곡 심기에 더 열심이었고, 결국은 쓸모없는 가라지를 알곡으로 변화시키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세 번째로는 우리 모두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25절 말씀에 보면 분명히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살금살금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의 씨를 뿌리고 갔더니"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잠들어 있을 그 때에 사탄이 움직이고,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속에서는 알곡과 가라지가 분명하게 구별되어서 끝날까지 가는 것으로 나와있습니다만 우리의 인생과 신앙 속에서는 누가 가라지이고, 누가 알곡인가를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농사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보자면, 우리가 평소에 잘 하더라도 잠깐 조는 그 틈을 헤집고 들어오거나, 잠시 실족한 틈을 이용해 몰래 들어와서 사탄은 가라지의 씨를 뿌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뿌리고 간 그 가라지 씨앗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병들게 되고, 오염되어 종래에는 우리의 삶이 가라지와 같이 억세고 쓸모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첫 번째 인간 아담이래 원죄의 본성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날 때부터 알곡이 아닌 것처럼, 우리 가운데 날 때부터 가라지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영혼의 구세주라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가 알곡이냐 가라지이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졸고 있거나 자고 있을 때, 우리의 심령이 병들었거나 시험에 들어 있을 때, 우리가 방심하거나 교만해져 있을 때 우리는 누구나 가라지의 모습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사탄의 조정과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모두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금방 가라지 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믿을 주셨던 제자 베드로에게조차, "사단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당장 내 뒤로 물러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41절에서 사단의 역사는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 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농사의 눈으로 보자면 한 번 가라지는 영원한 가라지일 뿐입니다. 가라지가 달라진다고 알곡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이 비유를 이해한다면, 우리의 심령이 비록 지금은 가라지일지라도 주인이 관대하게 은혜와 용서로 참아 주셔서 당장 뽑아내 버리거나, 풀무 불에 던지지 않은 사실에 감사하며, 알곡이 되고자 회개하고, 노력할 때 우리는 어느 새 또한 알곡이 되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알곡일지라도 가라지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설사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알곡의 가능성 또한 우리에게 넓게 열려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지금 영적 상태가 알곡의 상태이냐, 혹은 가라지의 모습이냐 하는 것이고, 나의 방향, 결정, 선택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나 신앙생활 속에 가라지의 모습이 보인다면, 우리는 빨리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알곡이 되고자 기도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삶이나 신앙생활 속에 알곡의 모습이 보인다면, 가라지 뽑기에 신경 쓰기보다는 알곡 늘리기에 더욱 전념해야 할 줄 믿습니다.

주인이 계획한 수확의 때가 가까웠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또 교회 안에서 알곡이 알곡의 기능과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때, 그때부터 알곡이 가라지의 모습으로 전락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습은 알곡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추하고 쓸모 없는 가라지의 모습입니까? 우리모두가 주님 앞에서 우리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이제 알곡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우리 모두는 가라지 뽑기는 주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내가 주님 칭찬하시는 알곡되고자 부단히 노력하며, 다른 한편 알곡 심어 늘리기에 더욱 소망을 걸고 열심을 부려야 할 줄 믿습니다. 가라지 뽑는 일은 주인이 정한 때에 주인이 알아서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