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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9.15 연속설교(1) - 조영진 목사
"왜 그리스도가 필요합니까?"
사도행전 5:27-32
왜 그리스도, 구원자가 필요합니까?
이 문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직결됩니다.
인간은 과연 구원자가 필요한 존재입니까?
인간의 이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결국 무엇이 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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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국에 있는 연합감리교회 가운데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로 Kansas 주에 있는 부활의 교회(The Church of Resurrection)를 꼽을 수 있습니다. 1990년 이 교회를 개척한 후, 섬기고 계신 Adam Hamilton 목사님께서 금년 초에 Leading Beyond the Walls (벽을 넘어서)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그 책의 첫머리에서 Hamilton 목사님은 처음 교회를 개척하면서 물었던 세 가지 질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왜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왜 교회가 필요한가? 왜 부활의 교회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없이 개척교회를 시작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또 그렇게 세워지는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제게도 큰 도전을 안고 다가왔습니다. 안식년 기간을 보내는 동안 이 질문들은 제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면서, 저는 이 물음을 교우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Hamilton 목사님이 제기한 세 가지 질문에 한가지, "왜 믿어야 하는가?"를 더해서 교회 설립 51주년을 앞두고, 또 안식년을 마치고 새롭게 시작하면서, 씨름해 보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금번 연속설교기간 동안 많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왜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합니까? 이 질문에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를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랍어에서 유래한 그리스도란 말은 히브리어에서 온 "메시야"와 동의어로서 그 문자적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왕이고, 둘째는 제사장, 그리고 셋째로 예언자가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기름 부음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과 보다 깊은 관계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를 잃고 고통의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 메시야, 즉 그리스도의 의미는 점차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구원자"의 의미로 발전되기 시작했습니다. 타민족의 압제와 박해 속에서 그들을 건져내고 새로운 민족의 내일을 열어줄 구원자, 그리스도를 유다 백성들은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 "구원자"의 의미는 신약에도 이어지고, 또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 그리스도가 필요합니까? 라는 질문은 왜 구원자가 필요합니까? 라는 물음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왜 구원자가 필요합니까? 구원자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구원자는 바로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I.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모두가 씨름해야 할 첫 번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선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구원자가 필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세상이 문제가 있으며,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구원자가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십니까? 나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십니까? 역사를 보면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이해가 있어왔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아침 저는 역사상 나타났던 인간이해를 모두 소개해드릴 만한 시간도 없고, 또 그럴만한 실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만큼 중요한 물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전적으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만큼 내 인생에 영향을 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과의 씨름 없이 인생을 갈아가고 있습니다. 한번 심각하게 물어보지도 않고 고민해 보지도 않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이고, 내가 찾아야 할 해답인데도, 남의 이야기처럼 흘려 듣습니다. 골치 아프니까 좋은 것이 좋다고 그냥 살아가려고 합니다. 남들이 그냥 살아가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이해의 문제에서 저는 이 아침 기독교 신앙이 외치는 멧세지를 교우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합니다:
(1) 첫째로, 인간을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로 이해합니다. 인간은 저절로, 우연히, 어쩌다가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입니다. 인간은 우연히 생겨나서, 왜 사는 지도 모르고 살아가다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우연히 어떤 물체의 결합을 통하여 존재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제가 쓰고 있는 안경 하나도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닌데, 최고의 오묘한 존재인 인간이 어쩌다가 우연히 생겨났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 아닙니까?
(2) 둘째로 기독교신앙은 인간을 죄인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지으신 인간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순종함으로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어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며, 하나님을 피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타락된 존재로 변모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역사 초기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여서 도덕이나 윤리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우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순종이란 열매를 따먹고 있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만 불순종 했습니까? 오늘 우리도 불순종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도 선악과를 따먹고 있지 않습니까?
(3) 셋째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이 성서의 인간이해는 바로 구원의 필요성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는 죄인들이기에 구원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인간을 이해하는 세 번째 틀입니다. 인간은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성경의 외침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 참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신앙이 인간을 죄인으로 이해하는데 대해서 반발합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반문합니다. 특별히 정직하게,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시는 분들은 죄인이라는 성서의 맷세지에 반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죄인됨을 고백하는 것은 결코 세상의 윤리와 도덕의 기초 위에서가 아닙니다. 법률적인 차원에서 죄인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죄인됨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기준에서 인간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금년 4월 중앙일보에 "딸 앞에 부끄러운 아빠"라는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로 시작합니다. New York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린 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 딸 아이는 느닷없이 짐을 챙기며 뉴욕에 YMCA 자원봉사자로 간다고 했습니다. 아빠는 버럭 화부터 냈습니다. "동부에는 사람이 없어서 서부에 사는 네가 비행기로 거기까지 가야 하니?" "어떻게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니. 넌 정말 햄스터 머리구나." 아빠는 이 정도로 이야기하면 딸이 마음을 바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딸 아이는 이튿날 아침 백인 여성 몇 사람과 함께 떠났습니다. 걱정 속에서 며칠을 보내고 있을 때, 딸한테서 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TV로 보던 현장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마치 거대한 산 곁에 서있는 것 같고, 연기와 먼지 때문에 숨을 못 쉴 정도라고 안부를 전해왔습니다.
딸이 하는 일은 부근 식당에 배치되어 경찰과 소방관들의 음식을 준비하는 헬퍼로 하루 4시간씩 도와주며, 배정된 방에서 다른 4명과 같이 잔다고 했습니다. 하루에 식비와 방값으로 28달러를 받지만, 파트 타임으로 뛰어야만 생활해 나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집으로 카드가 왔습니다. 70-80세쯤 되는 자원봉사자 4명이 뉴욕의 빵굽는 가마 앞에서 찍은 사진과 Georgia주 어느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딸 아이의 봉사정신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빠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가족만 무사하니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가졌던 아빠가 정말 옹졸하고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햄스터 머리는 바로 아빠 자신이었습니다. 딸 아이가 보낸 생일 선물 꾸러미를 풀었습니다. 그 안에는 조그마한 남성용 향수 한 병, 캔디바 3개, 그리고 아기를 두발 비행기 태우는 사진이 박힌 카드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딸은 카드에 한글로 이렇게 썼습니다.; "아빠, 운동 열심히 하고, 건강 조심해. 아빠가 입으로 빨아 먹여주던 김치 생각도 나고, 누워서 두발로 비행기 태워주던 것도 생각나. 아빠, 사랑해. 바이." 눈물이 주르륵 흐르며 아빠는 딸 앞에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깊이 느껴 보았습니다. 어느 기준에서 자신을 이해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저도 한때는 제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만하면 윤리적으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폐결핵으로부터 고침을 받기 위해서 1966년 여름 산상집회에 참석했을 때, 저는 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았습니다. 회개하라는 목사님의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특별히 성령께서 저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조명해 주셨을 때, 저의 도덕적 자부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형편없는 녀석이었습니다. 정말 죄인이었습니다. 이 죄인됨의 자각이 일어났을 때, 저는 구원의 필요성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지를 새롭게 느껴 보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보기에 괜찮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괜찮은 것 아닙니다. 세상의 법 앞에서 떳떳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법 앞에서도 떳떳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준 위에서 봅니다. 그러기에 모자라다고 죄인이라고 발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이 죄인됨의 깨달음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훌륭한 스승, 위대한 성인은 될지언정, 우리의 그리스도, 구원자가 되실 수는 없습니다.
II.
왜 그리스도가 필요합니까? 라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위하여 두 번째 씨름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이 같은 인간의 현실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인간에게 구원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디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과연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능력을 힘입은 사도들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고,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소식을 외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새로운 운동 앞에 위협을 느낀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가두고 박해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며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결코 굽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외친 후, "너희가 십자가에 달아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며, 그분을 높이셔서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다. 그분을 통해서 인간은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담대히 전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왜 그리스도가 필요합니까" 라는 물음의 빛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귀한 멧세지를 듣습니다.
(1) 첫째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밖으로부터 임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그리스도로 보내 주셨습니다.
(2) 둘째로, 그러나 인생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 같은 분을 거절하는 인생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죄의 깊이를 다시 한번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인생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되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아테네에서 행한 설교 속에서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께서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 구원자 되심을 보여주는 믿을 만한 증거라고 외쳤습니다.
(3) 셋째로,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들은 바로 이 사실의 증인이며, 모든 믿는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맛볼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목숨걸고 이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예수께서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다 바쳐 충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다 도망갔던 제자들로서는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이같은 사도들의 맷세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가 필요한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해답,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인생,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에서 "알파"라는 프로그램으로 갱신운동을 이끌고 있는 Nicky Gumble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임하는 구원의 은총이야말로 인간의 세 가지 근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된다고 외쳤습니다: 첫째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에 대한 해답이 되고, 둘째는 인간의 죄인됨, 죄책에 대한 해답이 되며, 셋째는 죽음과 영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된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근본적인 문제들 앞에 서있습니다. 이 문제 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신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자, 그리스도 되시는 예수님 안에 해답이 있습니다.
III.
한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가 필요합니까? 그리스도, 구원자는 누구십니까? 이 물음들을,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문제의 정의나 해답의 발견에서 foundation, 기초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문제와 해답에 동의하고 참여하려고 할 때, 전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필요하다고 깨우쳐 주며, 여기에 해답이 있다고 주장하는 외침의 전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의 문제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인간의 죄인됨, 그리고 이 죄인된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모두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전제 위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이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인간이해도, 인간 문제에 대한 해답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들은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하지만, 문제의 진단도, 해결 방안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아침 우리에게 다가오는 도전은 과연 성경의 하나님을 참으로 맏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 앞에 아직도 주저하시는 분들께 저는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아직 하나님을 믿지 못하신다면, 왜 믿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무슨 근거로 믿지 않고 계십니까? 얼마나 고민하고 생각하신 끝에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여러분께서 내리신 결론의 근거는 과연 반석처럼 든든한 것입니까? 아니면 모래와 같이 무너져 버릴 것들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할 근거보다는 믿을 수 있는 근거가 훨씬 많습니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시고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처럼 중요한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말로만 말씀드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증인을 여러분께 소개 드리고 싶습니다. 이분은 Texas A&M 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워싱톤에 오신 후, 저희 교회에서 속장으로, 또 선교사역 분야에서 헌신하고 계신 장돈식 집사님이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래야 천국 갑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구요!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이 세상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지만,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명색이 하느님인데 그렇게 꽉 막힐 리가 있어요? 도대체 예수를 믿어야만 천당 간다니 그런 독선적인 얘기가 어디 있소. 당신 말대로 라면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가게 될텐데. 좋소. 나는 그러면 지옥이나 가겠소이다. 사람이 의리가 있지. 그동안 예수 믿지 않고 돌아가신 숱한 우리 조상들과, 또 절대로 믿지 않을 게 확실한 지금의 내 부모 형제, 그 외 친구들과 함께 차라리 지옥이나 가겠수다. 혼자 천국가서 잘먹고 잘살기보다는 그게 훨씬 인간적이지 인간적이고 말고.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세월, 즉 불과 7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예수를 전하려고 애쓰던 사람들에게 냉소적이었고 내심 조롱까지 하였습니다. 때때로 의도적인 곤란한 제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며 난처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러면 그렇지라며 그들의 예수(?) 공세를 늠름하게 막아낸 제 자신을 만족해하곤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잘 준비된 논리와, 성경을 바탕으로 한 예수에 관한 설명이 근거있게 여겨진 적이 없었던 적도 아니었습니다만 그때에도 저는 절대로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이 있는데 저는 아예 귀를 막고 산 셈이죠.
인생이 무엇인가? 때때로 뜬금 없이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며 훗날 인생의 황혼기에는 종교에 귀의하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보리라는 막연한 미룸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종교를 갖더라도 기독교는 절대로 아니다라는 다짐도 아울러 하였습니다. 어쩐지 기독교는 서방종교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존심을 파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구원 즉 인생의 도가 트는데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것이 너무 싱겁고 쉬워서 믿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예수를 부인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2000년 전에 저 중동 이스라엘 땅에 살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길래 불과 30여 년을 살았음에도, 인류가 선정한 4대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뿐만이 아니라 한발 더 나가서 자신만이 우리인간의 구원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말인가?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허무맹랑한 주장이 2000년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오늘날에는 이스라엘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는, 나와 같은 피를 나눈 한국사람에 의해서 까지 계속해서 주장된다는 말인가? 예수는 인류역사상 추종을 불허하는 사기꾼임에 틀림없다고 믿고 외면하고 싶었습니다만, 그러기에는 학교 때 도덕시간을 통해 익숙한 그의 산상수훈의 그 고매한 내용과 연결이 되지 않고, 또한 그 오랜 세월동안 그를 위해 목숨을 던지고 지금도 나같은 사람에게 조롱당하면서도 전도하는, 세상적으로는 똑똑한 사람들이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도 절대로 마음을 열지 않겠다는 저의 도사림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에는 저의 심령은 불감증환자와 같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 모습은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전의 흑암이 가득함과 같은 상태와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빛이 임하기 전 어둠가운데 있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당시의 저는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몸과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저는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며 나름대로의 상황논리에 따라 땜질되어지는 아주 확고한(?) 인생관과 목표를 갖고 살고 있었습니다. 저의 마이동풍식 유아독존적 삶의 행태는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 자신은 물론 주변의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의 마음에도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관찰하고 결정하는 제가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하고 막무가내로 살아가던 저를 하나님의 그 극진하진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극진하진 사랑 말입니다. 그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저와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주변 크리스챤들의 계속되는 기도와 관심으로 지속되었습니다. 결국은 제 아내의 이 못난 남편을 위한 목숨을 건 기도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남편 때문에 아내가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마침내 저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믿지 아니할 뿐아니라 핍박하는 이 남편으로 인해 고통받아왔던 아내를 위해, 또한 저의 전도를 위해 애썼던 예수쟁이들의 실적 향상을 위해 그래 내가 한번 믿어주리라. 끝까지 저는 저의 참 불쌍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거지에게 적선하듯이 교회를 나가기로 하고 또, 한번 믿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자의반 타의반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말이 기도지 그냥 속으로 이 생각 저 생각 잡히지 않는 상념의 연속이었죠. 하지만 제가 처음 무릎꿇은 그때 우리 주님은 그동안 여러 번 오셨었습니다만 느끼지 못하던 메마른 제 심령을 결정적으로 터치 하셨습니다. 예수가 있으면 어디 나와보십시요 하는 심정으로 앉아있던 그때,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제가 엄청난 죄인임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거룩하신, 감히 다가설 수 없는 그 하나님을 거부하며 대적하며 살아왔던 저의 죄가 엄청나서 이제는 감히 그분을 부를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나같은 죄인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으시리라는 생각에 저는 그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 인생 처음으로, 제의지로 그동안 부르기를 거부하였던 그 이름, 하지만 이제는 죄인된 몸으로 감히 부를 수 없는 그 거룩하신 이름을 제 온힘을 다하여 불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은 그날 밤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이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하나님의 그 극진하신 사랑은 한번도 변하신 적이 없이 이 죄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탕자를 달려가서 맞이하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은 저를 그저 안아 주셨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저는 저를 안아주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요 나를 만드신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제 인생은 결정적인 전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제 수준까지 낮아지셔서 만나주시고 제 인생의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을 아는데 내 인생의 초점을 맞추리라. 하나님께 내 인생을 걸리라. 제 인생의 확실한 푯대가 생긴 날이지요.
예수님은 그후 제 인생의 길과 진리요 생명이 되셨습니다. 제가 변했습니다. 변해도 엄청나게 변했어요.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세상의 어떤 이론이 저 같은 인생을 변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고 제가 확실하게 변하긴 하였습니다만 오늘도 여전히 허물 많은 죄인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 때문에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거나 제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를 안아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미 저의 죄를 단번에 갚아 주신 그 십자가 보혈의 피 때문입니다. 저의 허물로 계속해서 넘어지더라도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이 있기에 저같이 부족한 인생도 10년 후 20년 후, 언젠가는 제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리라고 믿습니다. 꾸밈이 아닌 그 성령의 열매로 훗날, 과거의 저와 같이 하나님 없이 방황하는 한 젊은이에게 예수님이 피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생을 걸어볼 만한, 아니 자신의 존재의 근거가 됨을 깨닫게 되는 조그마한 산 증거가 되는 것이 저의 주안에서의 야심만만한 소망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왜 그리스도가 필요합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그분이 바로 구원자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해답이십니다. 신실하신 주님, 오늘의 힘 되고 내일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 그분은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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