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Mission Statement
History of KUMCGW
Worship Services
Directions to Church

Korean Ministry
English Ministry
Children's Church
Youth Church

Profile and Photo

Photo Album
Sharing


Sharepoint Home
Contact Information
Resources and Links
Connectional    Churches
Korean Bible Study


Archive | Home | audio video-56K video-230K

2002.8.18. 김상근 목사

"빛이 있으라"

창세기 1장 1-5절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천지창조의 말씀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의 기록임과 동시에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혼돈으로 가득하고 인생의 의미가 공허하게 느껴질 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짙은 흑암이 우리 앞길을 막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빛이 있으라."

주일학교에서 어떤 목사님이 천지창조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시던 목사님께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첫 날에 무엇을 만드셨습니까?" 한 어린이가 큰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예, 목사님, 하나님께서 첫 번째 날에 빛을 창조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그 어린이를 칭찬하시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럼 둘째 날에는 무엇을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다른 어린이가 손을 높이 들고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그 아이도 칭찬하신 다음 목사님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셋째 날에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자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던 한 아이가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대답을 합니다. "예, 목사님, 셋째 날에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사람들은 흔히 "과학의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의 힘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활이 점점 더 편리해 지고, 점점 더 풍요로워 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과학의 진보를 통해서 보다 밝은 인류의 미래가 우리에게 다가 오리라 믿고 있습니다. 우주의 기원에 관한 연구도 과학의 중요한 한 분야입니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우주의 기원에 대한 연구도 계속해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설명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1 장의 기록,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성경말씀과 특별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설명은 콴텀(Quantum) 이론이나 빅 뱅(Big Bang) 이론, 혹은 우주에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허블 망원경으로 관찰한 우주의 팽창 등에 기초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천지창조와 상관이 없는 이론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창세기 1장 천지창조의 말씀으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전문적인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과학자들의 주장을 묵살할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 강력한 논리에 대항하여,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도 나름대로 천지창조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창조 설화인 "길가메쉬"(The Gilgamesh Epic)와 비교한다든지, 혹은 소위 "J 문서"(The J Source)니, "P 문서"(The P Source)니 하면서, 나름대로 천지창조의 사건을 신학적으로 혹은 신화의 상징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창세기 1 장의 본문을 함께 묵상하면서, 과학자들의 이론적인 접근이나, 신학자들의 신화적 접근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도 태초의 시작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아니 하나님과 피조물,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가 시작된 이 중요한 본문의 말씀을, 과학의 힘으로, 혹은 본문의 신화적 연구로 접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과학적 이론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성적 판단, 합리적 분석, 과학적인 접근을 우선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이것들을 위해 투자했습니다. 제법 많은 책도 읽었습니다. 이 학교 저 학교, 유명하다는 선생들의 뒤를 쫓아 다니며 지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많은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과학적인 이론의 습득하기 위하여, 지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열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얼마 전에 아주 부끄러운 경험을 했습니다. 제 네 살 난 아들이 하루는, 넙적하게 생겨서 마치 나비처럼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고기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 고기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 고기의 그림을 보는 순간, 저는 "광어" 아니면 "도다리" 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또 다른 비슷한 이름이 생각났습니다. 광어 아니면 도다리 일텐데, 혹시 넙치가 아닐까? 아니, 혹시 가재미인가? 더듬거리고 있는 저의 모습을 제 네 살 난 아들이 아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지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하여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는데, 아직 광어와 도다리의 차이를 모르다니, 넙치과 가재미의 차이를 모르다니, 저 자신이 참 한심스러웠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진보하고 지식의 범위가 넓어지더라도,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창세기 1장의 말씀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저는 과학의 잣대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첫 날, "빛이 있으라" 고 하신 그 말씀을 저는 신화적인 표현으로 보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 장의 말씀은, 과학적 분석이나 신화를 통한 상징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들의 곤고한 현실 가운데로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창세기 1 장의 말씀은 과거의 중요한 시점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지금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곤고한 삶 안으로 개입하시고, 들어오시고, 참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첫 날,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기 전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2 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혼돈, 공허, 흑암 - 질서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 극심한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롭게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극심한 혼돈과 무질서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는 피조물들에게,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지난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늘 당장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곤고한 현실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분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극심한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향해, "빛이 있으라" 고 선포하시는 오늘도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창세기 1 장의 말씀은, "빛이 있으라"고 하신 태초의 말씀은, 인생의 극심한 혼돈과 영혼의 무질서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말씀, 최초로 쓰여진 "목회 서신"의 한 구절로 보입니다. 극심한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들의 상한 영혼을, 그냥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인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는 태초의 그 말씀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보내신 목회 서신의 한 구절인 것입니다. 그 격려의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만날 수 있게 됩니다.

*

천지 창조의 말씀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함께 만나는 사건이라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통하여, 어떤 방법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서로 만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떤 방법을 택하셨습니까? 무엇을 만들려면,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무엇인가 도구가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무엇을 사용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자세히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Create) 는 표현은 3 번 나옵니다 (1, 21, 27 절). 또한 "만드셨다" (Make) 라는 표현은 5번 나옵니다 (7,16, 25, 26, 31 절). 그런데 "가라사대" "칭하시다" 등의 "말씀하시다" (Speak) 라는 표현은 무려 14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많이 하신 것은 "말씀하신 것" 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만나는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피조물인 인간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인간이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듣지 않는 것, 그것을 히브리 원어로 "로 - 쉐마" (lo'-shema') 라고 하는데 구약에서는 파괴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 11:7)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면, 우리 피조물이 지금 해야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면, 지금 그 똑 같은 말을 우리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심령이 여러 가지 문제로 혼돈스럽고, 인생의 공허함을 절감하면서 슬퍼하고 있다면, 내려 놓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흑암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우리가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 "빛이 있으라"고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우리들의 삶이 왜 혼돈스럽고, 공허하고, 흑암으로 가득합니까? 왜 이런 영혼의 무질서가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처음부터 혼돈과 무질서의 역사였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역사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인의 불신앙 (4:1-16) 은 어떻습니까? 홍수로 징벌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노아 시대의 패역한 사람들 (6:5-13)의 무질서를 기억하십니까? 하늘 끝까지 올라가고자 했던 바벨탑 (11;1-9)의 이야기는 그 무질서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왜 이런 혼돈과 무질서가 생기는 것입니까? 왜 인류의 역사는 처음부터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했습니까?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피조물인 인간이 그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빛이 있으라!" 고 말씀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피조물인 우리들의 영혼은 계속해서 혼돈스럽고, 공허하고, 흑암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

"빛이 있으라"는 오늘의 말씀 앞에서 저 자신을 솔직히 돌아 봅니다. 제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가장 혼돈스럽고 신앙적으로 무질서했던 시점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30대 연령층 중에서,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1960년대에 태어난 사람을 386 세대라고 한다고 하는데, 저도 그 386 세대의 한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대학시절은 힘든 시기입니다만, 저와 같은 386세대가 대학을 다니던1980년대 초도 참 어려웠습니다. 특별히 저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려움에 신학적인 고민이 더하여 졌습니다. 특별히 제 어린 눈에 비친 한국 교회의 모습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현실의 절박한 문제를 외면하면서 자기 혼자 천당 가겠다는 기복적인 신앙, 기업화 되어가는 교회의 모습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교회가 싫었습니다.

하루는 김진홍 목사님의 청계천 빈민 목회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는 책을 읽고 정신이 번득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해방자" 예수님처럼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서울 난지도의 쓰레기 하치장 안에 있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편안한 기숙사를 나와서, 그 곳에 숙소를 구했습니다. 말이 숙소이지, 맨바닥에 장판을 깔고, 쓰레기 장에 버려져 있던 나무 판대기로 사방을 막은 작은 움막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어린이들을 위한 야간 학교를 열고,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 학생들과 함께 그 아이들을 밤마다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난지도 사람들은 정말 극단적인 가난 속에 있었습니다.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돈이 될만한 콜라 병이나 야구르트 병을 모아서 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 옆 방에는 천식에 걸린 딸과 꼽추병에 걸린 아들을 둔 알코올 중독자 여자분, 그렇게 한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술을 먹지 않고, 일을 나가면 그래도 끼니는 굶지 않는데, 그 어머니가 술을 입에 대기만 하면, 집안에 몇 일 동안 아무런 먹을 것이 없게 되는 기가 막히는 가정이었습니다. 밤마다 고통스럽게 기침을 하던 그 여자 아이의 쉰 목소리가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배가 고파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그 꼽추 소년의 모습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런 극악한 환경 속에서 저의 신앙은 급격하게 허물지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제가 가지고 있던 작은 믿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주일 날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살아계신다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복음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방자" 예수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저는 분노와 절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혼돈으로 가득하였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난지도 마을에 수녀님 두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수녀님들은 수녀복도 입지 않으시고 그냥 평복 차림으로 난지도에 사시던 분들이셨습니다. 그 분들은 난지도에 사는 어머니들이 쓰레기 더미를 헤집고 있을 때, 그 어머니들의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들이 일터에서 돌아 와 아이들을 찾아 가면, 그 수녀님들은 난지도 마을 골목을 다니시면서 하수구를 팠습니다. 비가 오면 언제나 마을이 침수 되었기 때문에, 그 수녀님들은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하수구를 더 깊이 파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 수녀님들께서 한 아이를 등에 업고 제가 있던 움막으로 달려오셨습니다. 경기를 해서 다 죽어 가는 아이를 제게 업혀 주시고는, 병원으로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 난지도 마을에서 제일 가까운 병원은 모래네 시장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이를 등에 업고, 수녀님들과 함께 국방 대학원 옆에 있는 버스 종점을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난지도 마을에서 국방 대학원 버스 종점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였습니다. 쓰레기 더미 위에 난 길이기 때문에 잘 뛸 수 없었습니다. 웅덩이에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하면서 뛰어 가는데, 등에 업힌 아이 몸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건강도 무척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 15분 정도 뛰어 가다가 저도 그만 땅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업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뒤에서 따라 오시던 수녀님 한 분이, 다시 그 아이를 들쳐 업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일어나 뛰기 시작했습니다. 한 5 분이 지난 다음, 그 수녀님도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수녀님이 다시 그 아이를 업고 국방 대학원 버스 종점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뛸 수가 없었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 주저앉아 버스 정류장의 불빛을 향하여 뒤뚱거리면서 뛰어가고 있는 수녀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제 눈에서 멀어져 가는 그 수녀님들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꺼져가는 불쌍한 한 어린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땀과 눈물을 쏟으며 뛰어가는 그 수녀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쓰러져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주저 앉아있던 저도 다시 일어나 그 불 빛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이제 다시는 그 혼돈과 무질서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시는 분노와 좌절의 어둠 속에 있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빛을 향해서 뛰었습니다. 그 빛은 물론 국방대학원 버스 정류장에서 비취는 불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극심한 혼돈과 무질서의 흑암 속에 있던 제게 그 불 빛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그 빛이었습니다. 난지도의 밤은 더욱 깊어 갔지만, "빛이 있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제 마음 속에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 여러분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