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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8.11. 천국의 비유(2) - 장찬영 목사
천국은 왜 누룩에 비유되었을까요?
마태복음 13:31-34
왜 예수님께서 천국을 누룩에 비유하셨을까요?
여기에 천국의 비밀이 있습니다.
누룩, 그것은 비록 적지만 끊임없이 퍼져 가는 그래서 세상을 마침내 변화시키는 신비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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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통해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이 천국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가게 되는 저 너머의 추상적인 것을 뛰어넘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천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다고 하는, 이 땅에서 경험해야 하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때로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한 것 같지만 그것은 마침내 자라나서 성장해서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되는 놀라운 세계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석 주전에 함께 나누었던 첫 번째 천국비유, "천국은 왜 겨자씨에 비유되었을까요' 였습니다. 오늘은 다시 두 번째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 "천국은 왜 누룩에 비유되었을까"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천국은 마치 한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는 비유를 하셨는데, 이 비유에서 천국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누룩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천국은 거듭난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에서는 지극히 작은 하나의 씨가 큰 나무로 자란다고 했는데 그것은 겨자씨 자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누룩과 겨자씨의 비유는 아주 비슷합니다. 작은 씨를 심었는데 큰 나무가 되었다, 또 지극히 작은 누룩으로 반죽했는데 크게 부풀었다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겨자씨는 다른 무엇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성장한 반면, 누룩은 다른 것을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룩 비유의 요점입니다.
그러면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변화시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천국은 자체가 변화될 뿐 아니라 주위도, 세계도 변화시킨다는 뜻입니다. 이 변화시키는 힘은 마치 전염병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12:1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는 누룩처럼 전염성이 강한 것이다. 그들의 외식이 신앙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다 외식주의, 형식주의로 바뀌어 버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잘못된 생각들, 악한 세력들이 순식간에 온 세계를 변화시켜 버린다는 것을 누룩의 전염성에 비유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만 누룩의 원 뜻은 순식간에 강력하게 상대방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소량의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부를 순식간에 변화시키는 것처럼, 천국을 소유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변할 뿐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도 변화시킵니다. 마치 2000년 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리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먼저 우리의 성품이 변하게 됩니다. 자기도 알고 있는 자신의 옛 성품이 바뀌는 것입니다. 옛날 모습 그대로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여기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사모하기만 해도 그 사람을 흉내내고 그 사람을 닮듯이, 예수를 만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성품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변화가 옵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돈을 보는 시각, 결혼에 대한 시각, 가정에 대한 시각, 성공에 대한 시각,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달라집니다.
그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세상을 살면서 터득했던 세속적인, 일방통행식의 성공 지양적인 가치관에서 떠나 성경의 가치관,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갖고,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는 실제로 거룩해지며, 상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바뀌는 척, 변한 척 흉내를 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흉내내는 것, 혹은 모조품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천국을 진정으로 소유한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구원을 소유하며 천국의 삶을 누릴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패한 세상, 불의와 부정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소수이며 아무 힘없는 존재일지라도 그들은 그들 자체가 소금인 것입니다. 소금은 자기가 여기 있다고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어 자신을 녹임으로 주위가 변화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세상이 바뀌는 '변화의 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이들은 누구에게 설교하기 위해서, 누구를 고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소금으로 존재할 때 세상은 소금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이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영향력이 밖으로 퍼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복음의 능력으로 로마를 뒤집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몇몇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탔던 그 복음은 유럽 전체를 변화시켰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신앙의 자유를 향해 떠났던 청교도들,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떠났던 그들은 미국사회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담대히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야 하는 그래서 세상을 변화시켜야하는 이유를 이 누룩의 비유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러야 할 질문 하나는,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과연 누룩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아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누룩의 흉내를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국 땅에 그렇게 교회가 많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많지만 한국 사회는 너무나 많은 갈등과 부정부패가 있고, 그 사회와 개인의 음란의 수위는 점점 올라가는 그야말로 너무도 아픈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사회도 그 반대의 본보기로 삼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부끄러움과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렇게 교회의 숫자도 많고, 목사의 숫자도 많고, 교인의 숫자도 많은데 왜 이렇게 부끄럽고 안타깝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의 본질에 대해서 오해하였거나 진정한 누룩의 모습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 예수 믿고 천당에 가면 되는 것이 아니요, 나만, 내 가족만 축복받고 건강하고 성공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진정 누룩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며, 오히려 우리는 세상의 잘못된 누룩의 영향으로 그나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마저도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이 누룩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하고 싶은 것은 누룩의 내용과 의미입니다. 이렇게 작은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고 부풀게 하는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바로 누룩의 번식하는 능력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룩의 능력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의 능력이요, 복음의 능력을 말합니다.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들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능력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능력이 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구름 떼처럼 모여든들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된 밀가루에 접촉이 안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룩이 가만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반죽된 밀가루 속에 스며들어가 접촉이 되어야만 그 누룩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면 나는 아직도 그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까이로는 여러분의 배우자에게 여러분의 자녀에게, 나아가 여러분의 직장 동료에게로, 여러분의 이웃에게로 나가셔야 합니다. 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 것 이상의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그들이 맡을 수 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는 않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어떤 때는 마음의 상처도 받고, 오해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어쩔 때에는 물질의 손해도 입게 될 수 있고,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아니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내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능력과 예수님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 여덟 가지를 나누었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진실로 가난한 심정으로 살면 이 세상은 변합니다. 가난한 심정이란 겸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애통하는 삶을 살면 세상은 변합니다. 너의 잘못이라 하지 않고 나의 잘못이라 여기고, 그 사람이 분명 내게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품을 때 가정은, 세상은 변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이 너무 크기에 그 긍휼을 베풀 때 세상은 변합니다. 예수님처럼 화목제물이 되어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살 때 세상은 변합니다. 부정직하게 사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음에도 깨끗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세상은 변합니다. 이기적인 삶이 아닌, 의를 위하여 부정과 불법에 항거하는 삶을 살 때 세상은 변합니다. 아무도 손해보려 하지 않을 때, 손해를 선택할 수 있는, 진리를 위하는 삶이 내게 있을 때 놀랍게도 세상은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소리만 쳤지 변화는 없습니다.
이러한 삶의 유형이 바로 누룩인 것입니다. 삶은 가장 극명하게 복음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삶의 모습은 숨길 수 없는 실제의 자신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이러한 여덟 가지 모습 속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 진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삶의 모습을 통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남에게 이렇게 살자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혁하자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러한 내 의견과 다르다고 정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시작은 엄밀하게 '나'로부터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은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정직이라는 거울 앞에 비춰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서,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영역에서, 그곳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그 어느 곳이든 나는 내가 있는 그 자리를 후회함 없이 정성스럽게 기쁨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삶은 그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에게 고백한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그 변화된 삶을 통해 어떻게 다른 사람들 또한 변화되었는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 삶에 영향력이 없습니까?
왜 교회는 영향력을 잃고 오히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왜 소금이 땅에 떨어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진 조화는 아무리 많이 있어도 영향력이 없지만, 살아있는 생화는 한 송이가 있어도 향기를 내고 그래서 나비와 벌을 부르고, 그 씨를 온 세상에 퍼뜨리며 마침내 유익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 시대는 진짜를 찾기에는 너무도 힘든 카피본, 복사품, 정품이 아닌, 유사품이 판을 치는 그래서 때로는 진짜가 위축 받고, 가짜가 당당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슬프지만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금부터 13년 전, 한국 경상북도 김천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들어가서 그리고 다시 1시간정도를 걸어야 도착하는 금릉군 구성면 양각리라는 곳에 '양각감리교회'라는 교회간판을 걸고 첫 목회를 시작했었습니다. 200호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시골마을, 낮에는 다 논과 밭으로 나가기에 평상시에는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젊은 사람들은 다 도시로 빠져나가 노인들과 아이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전형적인 기울어져 가는 농촌마을. 그나마 있는 국민학교도 폐교를 앞두고 있던 그 마을에 목회의 abc도 모른 체 덜컥 처녀목회를 시작했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목회를 하지 않고 사람도 없는, 아니 더 솔직히는 비젼도 없는 촌 시골로 가느냐는 선배 목회자들의 충고를 뒤로하고 막상 내려가 보니 말 그대로 어떻게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할지 막막한 '절망'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양각리 역사 이래로 처음 세워진 '양각교회' 창립예배 때, 지금은 작고 하셨지만 당시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으로 계시던 변선환 교수께서 참석하셨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곳까지 오시라고 부탁을 드릴 수 없는 어려운 분이었지만, 선생님에게 인사하는 마음에서 학교에 초청장을 보내 드렸었는데, 그 시골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때 그분께서 예배 후, 풀이 죽어있던 저의 모습을 아셨는지 저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거리시면서 하신 말씀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장 전도사, 나는 공부만 하고 목회를 안 해 봤어. 이때껏 학교에서만 가르쳤기에 목사이지만 사실 목회를 잘 몰라. 그러나 내가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은 크고 작은데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야. 한 명의 교인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진짜면 그 교회는 진짜야. 그러나 천 명의 교인이 있더라도 가짜만 모여있으면 그 교회는 가짜야. 숫자가 적더라도, 교회가 작더라도 진짜는 영향력을 주는 게지. 숫자가 적다고 영향력을 못 주는 게 아니야. 문제는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지. 반대로 숫자가 많고 교회가 크더라도 가짜는 영향력이 없어. . .왜? 가짜이니까? 그래서 문제는 내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이야. 그러니 아무 낙심하지 마. 그저 진짜가 되면 되는거야. . ."
그렇습니다. 문제는 내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소금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된 인생을 살고 있느냐 아니면 변화된 척을 하고 있을 뿐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척하는 것으로는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진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복음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복음은 행동을 요구합니다. 진짜에로의 갈망, 진짜 크리스챤이 되고자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룩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반죽된 밀가루 속에 집어넣어져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든지,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든지 내가 있는 그곳에서부터 진짜가 되고자하는 결단이 없는 한 결코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누룩이 퍼지는 방법에 대해서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변화는 소리 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마치 겨자씨의 비유에서 겨자씨가 자라는 것을 우리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것은 마침내 큰 나무가 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납니다.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한 의사가 소리 없이 어떤 지역에 가서 그저 아무도 모르게 봉사를 하고 옵니다. 그런데 그 드러나지 않은 섬김에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어떤 바쁜 사람이 자신의 짜투리 시간을 떼어 매일 어떤 지역을 찾아갑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그들의 떼 묻은 얼굴을 닦아주고 발을 씻어주고 옷을 입혀 주는 일들을 계속 하는 것뿐입니다. 그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룩의 삶은 소리치고 선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룩은 조용히 소리 없이 그러나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천국은 결코 과장이나 광고나 소문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가운데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누룩의 현상은 특별히 교회가 주의 일을 할 때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큰 것, 위대한 것, 소문이 나는 것 등에 유혹을 받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교인이 많이 모이는 교회, 헌금이 많은 교회를 사람들은 일단 성공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보에 나와있는 교인통계와 헌금통계를 보면서 나름대로 그 교회를 약한 교회, 괜찮은 교회, 잘 나가는 교회, 그렇지 못한 교회 등으로 결정해 버립니다. 그 교인들이 어떻게 사느냐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교인들이 주일 날 무엇을 하는지, 그들에게 어떤 헌신이 있는 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많고, 내노라 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교회는 괜찮은 교회로 여깁니다. 그리고 교회는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들을 의지하고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고, 기도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연약한 소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지 못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의 돈과 명성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의 교회가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이 얼마나 세속화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결코 그는 화려하거나 유명하거나 편한 것을 추구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작은 것에 관심이 있었고, 허례허식이 없었고, 가난하고 잃어버린 영혼에 관심이 있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건물이나 땅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그는 어떤 성공이나 성취를 위해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영광스런 목표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그것을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떠나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하러 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셨습니다. 그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할 죽음인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죽음을 묵상하시면서 삶을 사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문제는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죽느냐만 남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부할 필요도, 세속에 의지할 필요도, 낭패와 절망에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낙담할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곧 이 땅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33세에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정직의 거울에 비추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고민은 어떡하면 좀 더 잘 안락하게 살고, 좀 더 오래 살고, 좀 더 무엇을 누려보고, 좀 더 소유해 보려고 그렇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직하게 우리자신을 들여본다면 사실 대부분의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과 아픔, 관계의 단절들은 이러한 우리의 소유욕과 성공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포기였고,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셨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친히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렇게 누룩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삶을 직접 보았던 당신의 제자들이 또한 누룩의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소유하고 변화된 기쁨의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변을 향해, 가정을 향해, 직장을 향해, 세상을 향해 조용히 눈을 떠야 합니다. 누룩이 소리 없이 온 가루 서 말에 퍼지듯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세상을 향해 퍼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심하는 그 순간, 세상은 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진짜 누룩은 퍼져나갑니다.
진짜 그리스도인 또한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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