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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6.23.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여덟가지 성품(8) - 장찬영 목사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마음
마태복음 5:1-12
진짜 그리스도인은 변화된 성품을 통해 구별됩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천국이 저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므로 팔복의 이야기는 첫 번째 마음인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천국에서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에게 주시는 천국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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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시해 주신 참된 믿는 자의 모습과 그 축복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를 적당히 믿고 안심하고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에게 도전과 충격을 주는 말씀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박해와 고난받는 것이 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 말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기독교의 본질을 보여주는 말씀이고 참된 크리스챤의 모습과 성품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제시해 온 크리스챤의 성품은 여기서 모두 용해되어 참된 크리스챤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성품, 애통하는 성품, 온유한 성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품, 긍휼히 여기는 성품, 마음이 청결한 성품, 그리고 화평케하는 성품이 한데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모습입니다.
크리스챤의 삶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상은 곧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의 상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고난이 결코 저주이거나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며 구원에 이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핍박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성품 속에는 공격성이나 폭력성이 없다는 것이 그 특성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린양같이 당하는 모습, 참는 모습, 순종하는 모습, 나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 이러한 성품을 가지고 어떻게 현대의 복잡하고 무서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를 위한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지 그냥 단순히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박해나 고통을 당하는 자체가 축복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에는 고통을 겪고 박해를 당하는 개인이나 국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정당한 것이 있는 반면에 정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크리스챤들도 세계 곳곳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핍박을 당하고 있지만 그들이 모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의를 위하여 당하는 핍박이 아닌 경우를 몇 가지를 알아두어야 합니다.
첫째, 누구를 반대하기 위하여 받는 혹은 대의명분을 위해 받는 핍박은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정당 또는 어떤 주장을 반대하기 때문에 단식도 하고, 감옥에 투옥되고, 혹은 죽음을 자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위한 투쟁일 수는 있어도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절대화하고 신성화하기를 원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혼동하고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바꾸어 놓으려 합니다. 물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 희생하고 행동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를 위한 일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데올로기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혼합시켜서 자기가 받는 고난이 의를 위한 고난이라고 스스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지혜 없음으로 인해 받는 핍박도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혜로웠다면 결코 욕을 먹지 않았을 터인데 잘못 처리하여 당하는 곤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실수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생의 미련함이 의로운 고난과는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고집이나 제한된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인한 통찰력의 부족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무지 상대방의 의견을 듣지 않는데서 오는 고난이 아무리 화려한 변명이 된다 하더라도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광신적인 열정 때문에 받는 고난도 아닙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자기 혼자만의 지나친 열정 때문에 가족들과의 관계나 생활을 소홀히 함으로써 핍박을 당하는 경우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자기는 예수를 위하여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좀더 지혜롭고 인격적이었다면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극단적인 광신주의자들의 사건, 예를 들면 오대양사건이나 여호와증인, 통일교신자들은 자신들이 진리를 선포하기 때문에, 기성교회가 지신들을 핍박하고 가족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자기들의 마음을 다 알 것이라고 얘기하며 계속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도 알아야 하겠지만 이 땅 위에서도 이해가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것들이 의로 인한 핍박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넷째로, 자기의 죄와 허물 때문에 받는 고난도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응당한 값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숨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이것이 드러났을 때 이것을 마치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습관이 되면 자신의 죄와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함으로 인해 생기는 고난을 의의 고난이라고 습관적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 들어서 고난을 받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를 보십시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벧전 2:20)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벧전 4:15)
마지막 다섯 번째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것은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핍박과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희생당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세상의 진리는 항상 상대적입니다. 자신의 나라에서 보면 그 사람은 애국자이지만, 상대방의 나라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제 점령기 때의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아주 기분 나쁜 사람이지만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일본의 근대사를 이루어놓은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건에는 객관적이고도 인류애 적인 기준이 있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사람은 자기가 처해진 입장에서 이야기하기에 똑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끊임없이 지난 역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그러한 예입니다. 좋은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이 곧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선이 곧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엄격하고 냉정하게 성경의 진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11절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라는 말은 정확하게 해석하면 '예수를 위하여'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너무 편협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 그러한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게 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곧 착하고 의롭게 살면 되지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느냐고 하는 기독교의 절대 명제 앞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것과도 같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선을 위해 살면 그것이 구원이다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행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지 선행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바로 그 예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온갖 수모와 거짓말로 속임을 당할 때 진정한 축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그분을 위해서 당하는 모든 핍박과 환난이 있을 때 진정한 천국이 임하고 하늘의 보상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초대교회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문제나 경제문제나 사회문제 속으로 직접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몇 사람, 즉 진정 예수님을 위해 살았던 소수 몇 사람들의 삶을 통해 역사는 변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역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았을 때 얼마나 많은 회의와 의심이 들었겠습니까? 과연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해 세상은 변화될 것인가?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일도 없고 혁명을 주도한 일도 없지만 그저 그렇게 주님의 명령대로 예수의 이름을 전하다가 고난받고 또 그렇게 죽어갔지만 그들이 가고 난 다음에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고난의 비밀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아침 우리가 우리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지금 내가 당하는 환난이나 핍박이 정말 예수님 때문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 때문에, 예수 때문에 핍박받는다고 답변하는 사람이 있으시다면 한번 더 질문하고 싶습니다. 고난 앞에 교회 이름, 예수 이름을 대지만은 실은 자기의 이익과 체면 그리고 어떤 욕심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예수가 싸운다는 말은 심지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도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이권과 관계의 깨어짐에서 오는 것임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제로 '의' 때문에 고난을 당한 분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아벨입니다. 그는 의로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가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사울에게 모진 박해를 당했습니다. 예례미야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는 구덩이에 처박히고 수염을 뽑히고 쫓겨나는 수치를 겪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열 두 제자와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겪은 핍박은 결코 열심이나 선행이나 대의명분 혹은 이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그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러한 분이셨습니다. 십자가는 의에 대한 핍박의 완벽한 예입니다. 환난과 핍박을 받지 않고 피해 가는 쉬운 길도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이 세상을 비판하지 않고 적당하게 닮아 가면 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6장 26절에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칭찬은 예수님께 받아야 합니다. 세상은 반드시 예수님의 모습대로 살려고 하는 자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또 9장 26절에도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부끄러워한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예수 믿는 것을 적당히 숨기고 그래서 예수 때문에 겪어야 할 고난이나 핍박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을 대하시겠습니까? 환난과 핍박은 참된, 진짜 크리스챤이 치러야 할 제자의 대가입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싸움은 진짜와 가짜의 대결입니다. 남자들은 모이면 군대 얘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대부분의 예기는 자기가 복무했던 군대가 군기나, 훈련이 제일 강했다는 일종의 무협지 차원을 넘나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마지막으로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한 사람에게 당신은 어디 출신이냐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특전대 출신이라든지 공수부대라고 하면 다들 조용해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앞에서 가짜는 너무도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짜끼리 살아야 마음이 편한데 진짜가 나오면 당황하게 되고 초라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대로라면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 진짜입니다. 정말 예수 잘 믿어 보기 위해, 아니 예수님을 전하느라고 자신의 시간도, 자존심도, 물질도 손해를 보는 사람, 이 사람이 진짜입니다. 혹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교회에서 살려고 하시오? 그러려면 신학교에 가시지. 적당히 믿으세요. 너무 지나치지 않으세요?"라는 식의 말들을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데 지나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열심히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죄송할 뿐이지요. 그러나 빛 앞에 어두움이 무력하듯이 거짓 헌신, 거짓 믿음, 거짓 행동들은 모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결코 우리의 헌신이나 사랑의 기준을 내려뜨리지 마십시오. 적당히 예수 믿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데는 최선이 없습니다. 항상 부족한 것이 주님을 위한 삶입니다. 핍박을 받아보지 못할 정도로 미지근하게 살고 있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산상설교는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이 납니다. 첫 번째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는데 여덟 번째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잇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의 현실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천국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며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즉 지금부터 시작되어 계속해서 자라며 육신의 몸을 벗을 때 완전하여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주어진다고 하셨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도 천국이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인격적인 모독과 육체적인 학대와 세상적인 음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오래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한 현재의 지위에서 천년만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는 다 두고 떠나야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실패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환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물질과 시간과 세상적인 것에 노예가 되지도 않습니다. 또한 불필요한 경쟁과 다툼에 빠져들거나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천국을 살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육을 가지고 있는 동안 지상의 천국에서 살다가 육을 벗을 때 영원한 천국으로 이동됩니다. 예수님의 방법과 생각과 뜻대로 살려고 하면 세상은 여러분을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크리스챤의 진정한 특권이요 진정한 축복이기도 한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고난을 받고 온갖 비난을 받으면 여러분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하늘에서 받을 여러분들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함께 생각합시다.
- 평상시 생각하셨던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무엇인지 함께 나누어 보십시다.
- "고난이 없는 시대에 산다는 것이 진짜 고난(불행)이다"라는 말은 오늘의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고난'의 의미는 오늘날 크리스챤들에게 어떻게 적용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아직도 복음으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는 민족이나 이웃이 있습니까?
-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천국관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당신은 천국에 대한 확신이 또한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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