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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6.16. 아버지 주일/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여덟 가지 성품(7) - 장찬영 목사

화평케 하는 마음

마태복음 5:1-12

그렇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변화된 성품을 통해 구별됩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함께 깊이 묵상하고 싶은 주제는 크리스챤이 세상을 향해 나갈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말씀해 주신 부분입니다. 그것은 바로 화해자의 모습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진정한 크리스챤은 평화를 사랑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챤은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의 태도를 취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재 역할을 함으로써 평화가 임하도록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주제인 이 평화는 우리가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을 하시면서 말씀을 들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요, 둘째는 이웃과의 평화이며, 셋째는 자기 자신과의 평화입니다.

먼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평강의 근원이시며 평강의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또 먼 훗날 예수께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하시면서 쓴 글이 이사야에 있습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사도바울도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롬 15: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평강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 14:33).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는 평화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평화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평화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천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러한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 2장 14절-16절에는 바울이 예수님의 역할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록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습니다(공동번역)."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을 십자가를 통해 하나로 만들어 화해시켜 주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최대사명이 화평의 역할이었으므로 크리스챤의 최대의 사명도 역시 화평케 하는 역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평케 하는 역할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즉,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너희의 화목제물이 되었으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감당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과는 정반대로 오늘 우리의 역사와 현실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며, 화해가 아니라 분열이요,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며, 용서가 아니라, 분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이제는 더 이상 평화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벨 평화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있고 평화에 관한 시위 그리고 수많은 문서가 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세월이 지날수록 악해지고 잔인해지며 계속해서 더 무서운 전쟁과 폭력과 파괴만이 증가될 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지금보다는 미래가 더 무서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의 전쟁과 분열은 어디서 왔겠습니까? 바로 그것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사라졌고, 이후 살인과 폭력, 술수와 거짓이 인간의 역사에는 이어져왔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아니 예루살렘거리에서 한사람의 의인이라도 찾는다면 그 성을 구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안할 만큼 그렇게 인간의 마음에는 부패와 죄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진정한 평화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평화란 신약에서 '에이레네'라는 말을 쓰고 구약에서는 '샬롬'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 고난과 역경이 지나간 후의 성숙함, 완전함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른 인격적 관계를 뜻할 때도 이 말을 썼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인사말로 '샬롬'이라는 말을 할 때 그것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선'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란 참된 번영과 조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있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정의는 하나님의 의와 연결시켜서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모든 것이 다 잘되고 문제가 없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것, 하나님의 의가 통치하는 것, 그 나라와 그 의가 있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에는 평화가 사라집니다. 언제나 죄가 있는 곳에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자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를 깨드리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평화란 의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주권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5장 1절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렇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우리의 본성이 거듭날 때에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평화란 단순히 마치 그림에 그려진 초가집이 있고, 시냇물이 흐르고, 새들이 깃들이는 전원풍경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 상태요, 하나님의 통치하심, 다스리심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평화라는 주제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은 한가하고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이 아니라 비바람 치고 폭풍이 부는 무섭고 험악한 날씨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절벽 벼랑사이에 안심하고 깃들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결코 안일한 것이 평화가 아닙니다. 전쟁이 없다고 평화가 아닙니다. 기가 막히는 현실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의 통치를 바라보며 피난처이신 그분께 피난해 있는 상태가 바로 평화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화평케 하는 자'라는 단어에는 다음의 세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화평케 하는 자란 고발자도 방관자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챤은 고발하고 충고하고 심판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 세상은 온통 고발하고 지적하고 그래서 투쟁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없는 자와 있는 자가 싸우고, 노동자와 고용주가 싸우고, 백성이 정부와 싸웁니다. 그래서 마치 기독교인은 무조건 약자의 입장에 서야하지 않겠냐고 몰아 붙입니다. 그것이 마치 이런 행동이 성서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 성서의 어느 구절에도, 예수님의 어느 말씀에도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고 부자를 미워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길 뿐이고, 부자의 잘못된 물질관을 깨우쳐 주셨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노동자와 고용주를 다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시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까지도 말씀하시므로 이스라엘이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음에도 세금을 걷어들이는 로마 정부의 존재까지도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어느 한편을 지지하여 평화를 만들어 내는 자가 아닙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둘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원수 된 것을 폐하고 새사람으로 지음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화평케 하는 크리스챤은 고발자도 아니고, 차디찬 지성적인 냉소주의식의 방관자도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화평케 한다는 뜻은 단순히 평화를 사랑한다는 뜻보다는 아니 평화를 원한다는 뜻 이상의 적극적인 의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지 분열과 싸움, 전쟁을 싫어하고 단순히 평화로운 상태만을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으로 평화를 위해 잠 못 이루는 가슴앓이를 하거나 희생하거나 헌신하지는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병들어 죽어가도 소외당하는 것을 보고,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굶주림으로 혹은 학대와 핍박을 보면서 그들의 상황이 그러니 어떻게 하겠냐고 얘기하고 걱정스러운 동정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화평케 하는 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근심하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이 분명 당신을 환영하지도 않고 오히려 죽일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 땅위에 화평케 하는 자로 오신 것 같이 화평케 하는 크리스챤은 그 상황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뛰어 든다는 것을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쾌함, 인기하락, 오해, 손해, 고통 심지어는 치명적인 손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혹 여러분이 평화를 위해 좋은 직장을 포기하게 될지도, 사업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무력하게 보이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도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반항이나 고발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해를 위해 폭력을 쓰신 일이 없습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데모를 하거나 화염병을 드신 일도 없습니다. 그분은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비난과 오해 그리고 핍박을 받으셨고 드디어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이러한 주님은 진정한 화해자 이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서는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 . ." (벧전 2:22-24)

영어 속담에 "No cross, No crown" 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 없이 십자가의 영광이 없고 십자가 없이 부활의 승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너무나 십자가 없는 면류관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크리스챤의 가장 무서운 질병은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을 원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진정한 자기부인, 자기 포기는 없고 값싼 자기 P. R과 축복에만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땅위에 교회는 많지만 세상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하면 여전히 분쟁과 분열이라는 단어를 지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고 은혜로운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시간의 손해를 보고, 누군가가 자존심의 손해를 보고, 누군가가 물질의 손해를 보고, 누군가가 그렇게 진정한 수고와 고난의 대가를 치를 때입니다. 따질 것 다 따지고 주장할 것 다 주장하면 이치와 논리를 따지면 덕분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성적인 논리와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여러분 행복한 가정의 원칙과 비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제적인 배분의 법칙입니까? 정확한 역할분담의 법칙입니까? 논공행상의 철저한 상과 벌의 원칙입니까? . . . 만약 이것이 행복한 가정의 비밀이라면 이 세상에는 이미 가정이라는 단어자체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진정한 제자의 삶이란 진정한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원리는 먼저 손해를 보고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진정 화해자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이 화해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로, 자기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화해가 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화해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깊은 평화를 직접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화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고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화해를 통해서 오는 자신의 유익이 설령 있을 지라도 그것을 구치 않는 자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자신은 단지 다리 역할을 했을 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는 이렇게 그 평화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 진정한 화해자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공격적이고 비판적이 되지 마십시오. 분을 자주 내거나 쉽게 말로서 상대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자기 의와 자기업적에 빠지지 마십시오. 화해자는 하나님과 먼저 자신이 화해를 경험한 사람이요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그 빚의 고통과 무게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상대방을 섬기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화해자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도자입니다. 전도의 의미를 가장 소극적인 입장에서 얘기한다면, 그것은 전도를 한 사람을 그저 교회에 데리고 나오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전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화해자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본인 자신이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고 나서 죽음과 절망의 깊은 상처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줄 수 있는 자, 이 사람이 바로 화해자, 즉 전도자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평안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안을 보여주며, 인간의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화해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화해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인간에게 근본적인 화해란 없습니다. 사실 모든 불화는 하나님과의 불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의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만 해결이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사람과도 가깝고, 진정 하나님과 친한 사람은 사람과도 친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신이 친구이심을 말씀하시고, 다윗에게는 당신의 속마음을 다 말씀 하셨으며, 그 하나님은 사람의 아들로, 그리고 사람들의 친구로 이 땅위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화해자는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이 서로 화해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그 사람은 서로의 약점이나 문제점들을 용서하도록 도와주고, 서로의 장점을 보게 하며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해 주도록 그래서고 같은 점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권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8절에서도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화해되지 못한 마음이 예배에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언급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해하는 마음이라고, 아니 화해되지 않은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고 까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크리스챤은 예수님처럼 화해자의 모습을 갖아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예배는 화해의 예배요, 용서의 예배입니다. 만약 설교하는 목사가 화해하지 않고 설교한다면, 만약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이 화해와 용서 없이 설교를 듣고 있다면 분명한 것은 다 진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인 척 할 뿐, 진짜 꽃이 아닌 인조로 만들어진 조화에는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나비도 벌도 겉모습을 보고 오기는 하다가도 이내 가버리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으로 소금인 것을 알 듯이,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들의 성품과 행함을 통해 구별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품어야하는 일곱 번째 성품인 화평케 하는 마음의 소유자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비판자나 고발자나 선동자가 아닙니다. 설령 다른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격려할 수 있는 마음으로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화해자는 방법에 있어서도 최선의 분열보다는 차선의 일치를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화해자는 영웅이 아니라 순교자입니다. 화해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화려한 스타가 아니라 모퉁이 돌의 역할을 묵묵히 하는 그래서 자신의 몸을 녹여 짠맛을 내는 소금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놀랍게도 당신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좋은 가문,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도 사람들은 큰복이라 하거늘, 하나님은 화평케 하는 자들을 당신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확증과 자격을 주시고 이것은 말로만이 아닌, 이 땅위에서 당신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그 아들에게 상속되는 아버지의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은 다 아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기에 오늘 여기에, 그분께 예배드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화해자로 오신 것같이 우리 역시 화해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십니다. (아멘)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혹시 화평하지 못한 관계나 마음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2. 왜 화평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손을 내민다는 것이 왜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3.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고백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탕감 받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