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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5.26.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여덟가지 성품(6) - 장찬영 목사
청결한 마음
마태복음 5:1-12
그렇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변화된 성품을 통해 구별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을 깨끗하게, 청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깨끗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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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이 다른 사람에게 대해야 할 첫 번째 마음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마음은 성경전체의 테마이고, 궁극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마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특별히 다른 사람에게 갖아야 하는 첫 번째 성품인 것입니다.
오늘은 크리스챤들이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대할 때 갖아야 할 두 번째 성품인 마음의 청결함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말씀은 얼핏보면 평범하고 단순한 것 같지만 실은 그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청결은 '거룩'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이 '거룩'이라는 주제는 성경의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광범위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한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등지고 축복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또 최초의 인간의 자식이었던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죄가 죄를 낳는 인간역사의 출발이었습니다. 가인의 5대 후손이었던 라멕을 보십시오. 그도 살인을 하고는 창세기 4장 23절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for wounding me)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for striking me)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여러분,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였고,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였다고 한다면 과연 오늘 우리를 위하여는 벌이 몇 배이겠습니까? 아마 칠백 배, 칠천 배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후로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살인과 죽음, 미움의 역사로 이어져왔기 때문입니다. 라멕의 사건 이후에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노아의 홍수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고 그 심판 후에도 불행하게 인간은 바벨탑을 쌓으므로 하나님께 대항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모세라는 사람을 통해서 한 공동체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을 통해 한 국가를 선택하셔서 그 혈통을 통해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우리에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주제는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다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어떻게 인간이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구약적인 배경에서 이해해야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은 굉장히 충격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정말 여러분의 전 인격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면 여러분의 삶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비결 즉 열쇠를 우리에게 던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메시지는 짧은 한 구절이지만 기독교의 전 진리를 말하는 본질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비결인 청결함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청결이란 말은 헬라어로 '카타로스(καθαλοσ)'라고 합니다. 여기서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 카타로스는 때가 묻은 더러운 옷과 비교된 깨끗한 옷을 설명할 때 가리킵니다. 그래서 깨끗한 물, 순수한 포도주, 완전한 육체, 가라지와 티가 제거된 곡식, 순금, 순은, 순수한 혈통 등을 설명할 때 씁니다. 또 특별히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현대 심리학이나 상담학에서도 카타르시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마음과 정서에 쌓여있는 모든 중압감이나 상처 등을 깨끗이 제거하고 씻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이 자주 사용되었던 구약에서는 주로 제사를 드릴 때 정결함을 묘사하는데 쓰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불결하고 죄로 더러워진 인간은 성막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동물의 피로 속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야 했으므로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정결한 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정한 동물을 만지면 안된다든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든지, 시체를 만져도 안된다는 등 여러 가지 율법이 자연적으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 속죄일에는 제사장이 깨끗한 물로 몸을 다섯 번 씻어야 하고 손과 발은 열 번씩 씻어야 했던 의식도 바로 여기서 기인했습니다. 이 모든 제사적인 행동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깨끗하게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손과 발을 씻고, 목욕을 해도 더러워진 인간임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염소와 양을 잡아 피를 뿌리고, 거기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고, 불로 태워서 번제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복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죄라고 하는 더러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죄를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목마름이었고 제사였습니다.
또한 구약에서는 청결함이 한 사람의 인격과 삶에도 적용된 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완전함을, 욥에게 있어서는 무죄함과 정직함을, 이사야에게 있어서는 죄로부터 정결함을, 하박국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깨끗한 눈을 묘사할 때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청결하다고 하는 말을 어떤 의미에서 사용하셨을까요? 이 '청결한 마음'에 대해서 우리는 오늘 두 가지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청결한' 것은 무엇보다 이것이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대상은 당시 종교적인 형식으로 완벽했던 바리새인들을 의식하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십계명과 구약의 율법들을 확대 해석하여 탈무드를 만들었고, 성경에 없는 것까지도 좀 조목조목 해석을 해서 어떻게 완벽하고 율법적으로 흠 없게 살아야 하는지를 평생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안식일에 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죄의 범위를 규정지었습니다. 예를 들면 물건을 어느 정도 이상 들어올리면 노동으로 간주되어 죄가 되었고, 몇 발자국 이상 길을 걸으면 죄가 되었고, 바느질도 세 번 이상은 노동이므로 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완벽한 행위 때문에 그들은 '분리주의자'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의 세계에는 말할 수 없는 불결함과 부패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율법적인 행위 이면에 숨어있는 그들의 내면을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들처럼 법적으로, 겉으로만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잇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살인하지 아니하고, 간음하지 아니하고, 거짓말하지 아니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인격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은 기막힌 미움과 질투, 끊임없는 정욕으로 사로잡혀 있고 기술적으로는 우리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노출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우리 마음속에서 엄청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죄수복을 입은 들킨 죄인이요, 하나는 들키지 않은 죄인,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촌스럽게 죄짓고, 많이 배운 사람은 기술적으로 교양 있게 죄짓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내면세계를 꿰뚫어 보셨기 때문에 의식적이고 외적인 청결함에 몰두해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눅 11:3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7).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완벽하고 지성과 교양이 풍부하다고 마음이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양 있게는 만들겠지만 거듭나게는 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고 성경공부만 한다면 성경공부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뿐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여기서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라고 할 때 동의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마음이 청결하다는 뜻은 단순히 행위의 문제만도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청결함은 사람이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보다 더 본질적인 마음의 동기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남을 긍휼히 여겨서 도움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잘 도와주어서 자신의 자만심을 만족시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분명 긍휼이 아니요 구제도 아니며 다만 자기만족이요, 교만일 뿐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동기 즉 마음의 깊은 곳에 사랑이 있는가, 용서가 있는가, 과연 마음이 깨끗한가 입니다.
그러면 마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은 감정이 아니라 인격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란 그 인격의 중심이 깨끗하고 모든 행동의 근원이 순수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성이나 세상의 교육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령님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만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청결하다라는 뜻은 두 마음이 아니고 한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즉 순결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순결의 정신은 일편단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돈과 명예가 우리의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 되고, 반면에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다면 그것은 한 마음을 품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에서도 두 마음을 품은 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약 4:8)
우리의 불결의 문제는 두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한 아내와 한 남편을 주신 것은 가정의 근본정신이 순결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자신의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그래야 사랑이라는 단어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청결함은 바로 순결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순결'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무참히 짓밟혀 본적이 없을 정도로 세상에서는 순결이라는 단어를 화장품 광고에서만 등장하는 단어가 되었고, 부모는 자녀에게 순결을 가르치는 대신 피임방법을 가르쳐야만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순결이 어떻게 육체적인 문제에만 국한되겠습니까? 순결한 마음이란 한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향하는 것 영적인 일편단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여호수아의 마지막 유언같은 설교는 이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우상들이 판치는 가나안 땅에서 영적 순결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악하게 보이거든 홍해 건너편에서 너희 조상이 섬기던 신들이거나 너희가 거하는 땅의 아모리인들의 신이든 간에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날 너희가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리라" (여호수아 24:15)
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음녀가 지배하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순결한 신부인 교회가 어떻게 그 순결함을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순결하게 산다는 것은 마치 세상과는 담을 쌓고 거꾸로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순결하게 산다는 것은 바르게 산다는 것이요, 자신의 육과 영을 지배하는 주인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성결과 순결을 요구하십니다. 이 세상은 더이상 성결과 순결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그 성결과 순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하나같이 지난 시간의 순결하지 못했던 자신을 깊이 뉘우치며 돌아섰던 자들입니다. 아무에게도 성결에 대해 순결에 대해 배워본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순결과 거룩에 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부이기 때문이요, 우리는 그분의 순결한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영적인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깨끗한 자는 순결한 자는 항상 떳떳합니다. 그는 쫓기지 않습니다. 그는 업적위주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랑이 자신의 이룬 일을 보고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부의 조건은 순결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모함이나 오해 핍박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거룩과 순결은 투명하기에 오래가지 않아 모든 것이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풀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언제나 마음의 평화와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 마음이 청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 순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자유와 평안과 기쁨이 우리를 감싸며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겉모습이 아닌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고, 순결한 신부의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참으로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평화가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는 하나님을 보았다"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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