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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5.19. 성령강림절 - 김상근 목사
소금과 빛
마태복음 5:13-16
우리는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로서, 우리는 이 시대에 맡겨진 우리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것,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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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구성하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성도'라고 하는데,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 사람들입니다. 성도의 생활 중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믿음의 공동체로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개인적인 믿음의 선택인 동시에, 하나님과 개인 사이에 발생하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실존적 만남, 하나님과 나만의 일 대 일의 인격적 만남이 없이는 누구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가 "함께" 믿음의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모두, 다함께, 공동체로서, 집단으로서, 와싱톤 한인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공동체를 우리는 "교회"라고 표현합니다. 오늘은, 이 교회됨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공동체"로서 우리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함께 성경을 펼쳤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믿음의 공동체로서, 집단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시는 예수님을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한글 성경의 "너희"라는 표현은 단수로 표현될 수 있고 복수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성경의 깊은 의미를 놓칠 수 가 있습니다. 이 때 "너희"는 헬라원어에서 복수를 말합니다. "너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는 세상의 빛이라"가 아니라,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다"라고 예수님은 우리를 집단적으로, 공동체적으로, 교회적으로 다함께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우리 와싱톤 한인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로서 다함께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 와싱톤 한인교회는 "함께 부름 받은 믿음의 공동체"로서 어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저는 50년 전에 세워진 이 와싱톤 한인교회가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굳게 믿습니다. "몬저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보고 그 후 사무처리를 열고, 교회 건설에 관한 구체적인 안을 토의하고저 합니다. 이 날은 만사 제폐하시고 참석하야 주심을 앙망하나이다." 1951년 10월에 이 곳 와싱톤 지역에 살고 있던 한인들에게 발송된 초대장의 내용입니다. 저는 순원 친교실에 걸려있는 그 초대장을 볼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해 집니다. 그렇게 해서 이곳 와싱톤에 최초로 한인교회가 세워졌고, 벌써 5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지난 반세기동안,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하여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은, 앞으로 다가올 50년 동안, 우리 와싱톤 한인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어떻게 감당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도전 앞에,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성서적 도전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동남부의 몇 지역에서 교회를 섬긴 경험이 있습니다. 코넬 대학교회를 담임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섬긴 모든 교회는 "생존" 자체를 위해서 발버둥치던 교회였습니다. 교인 수도 100명을 넘지 못하고 예산도 항상 부족해서 담임 목사님 사모님과 함께, 교회 잔디를 깎기도 했습니다. 험악한 동네에 교회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목사님 사택으로 총알이 날아온 적도 있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교회에 좀도둑이 들어서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민교회가 이런 어려움 속에 처해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야 하는 그런 교회들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수많은 이민교회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와싱톤 한인교회는 다릅니다. 이미 50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셨고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제 "생존"의 단계를 넘겼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집단적으로 "믿음의 공동체"로 부르신 이유를 분별하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는 교회,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과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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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말씀하시며, 집단적으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짠 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짠 맛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짠돌이, 짠순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소금이 왜 짠 맛을 냅니까? 61%의 염화물과 39%의 나트륨이 합쳐져 100%의 염화 나트륨이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쉬운 말로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왜 소금이 짠 맛을 냅니까? 간단합니다. 소금이 짠 이유는 소금이 바다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좀 다른 각도에서 소금이 짠 이유를 살펴보십시다. 여러분, 바닷물이 왜 파랗습니까? 손으로 바닷물을 퍼서 보면, 바닷물은 색깔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멀리서 바다를 보면, 항상 푸른 색으로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바닷물이 푸르게 보이는 이유는, 바닷물이 시퍼렇게 멍들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를 보십시오. 철썩, 철썩, 계속해서 그 단단한 바위에 부딪히고 부서지고, 깨어집니다. 그렇게 부딪히고, 부서지고, 깨어지니까, 바닷물이 멍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파랗게 멍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푸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도 제 말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조금 더 설명을 덧붙여야 겠습니다. 철없던 고등학교시절, 저는 어느 똑똑하고 예쁜 여학생을 짝사랑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 출석하던 여학생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그 때도 제가 변변치 못했기 때문에, 항상 마음으로만 좋아하고 있었지, 속시원히 말 한번 건네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났습니다. 그 여학생은 동삼동이라고 하는 부산의 바닷가 근처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그 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을 맞추어 버스 정류장에서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몇 시간동안이나 기다렸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기다렸습니다. 밤 10시가 다되도록 기다렸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기를 하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골목길을 걸어서 밤 바닷가 해변으로 갔습니다. 밤 바다를 바라 보았습니다. 거센 파도가 밀려와서 바위에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파도들이 바위에 부딪히고,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그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 저는 청마 유치환 선생의 "파도"라는 짧은 시가 기억 났습니다. 그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처럼 꿈쩍도 않는데
파도야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그 때 저는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왜 바닷물이 푸르게 보이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부서지고 또 부서져서, 깨어지고 또 깨어져서, 부딪히고 또 부딪혀서, 시퍼렇게 멍이 든 것입니다. 바닷물이 푸르게 보이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가슴에 멍들어 본 사람입니다. 그 멍든 바닷물에서 소금이 나기 때문에, 소금에서 짠 맛이 나는 것입니다. 눈물이 짠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때문에, 사랑 때문에 울어본 사람만이 눈물의 맛을 알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눈물의 찝찌르한 짠 맛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웃의 아픔 때문에 가슴에 멍들어본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의 슬픔 때문에 함께 눈물 흘리고, 이웃의 슬픔 때문에 가슴에 멍든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 우리 교회 교우이신 이동우 권사님, 함두찬 장로님께서 아시아 지역 정신대 문제를 협의하시기 위해서 북한을 다녀오신 다음, 기자회견을 가지셨습니다. 이 권사님의 발표내용을 옆에서 들으면서, 그리고 함 장로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참 두 분이 고맙고 자랑스러웠습니다. 평생을 아픔과 눈물로 지내고 있는 그 불쌍한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해서, 그 할머니들의 멍든 가슴을 쓰다듬고, 그 멍든 가슴 속 깊이 채워져 있는 슬픔과 아픔을, 애틋한 사랑으로 돌아보시는 두 분의 노력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와싱톤 한인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시퍼렇게 멍든 이웃의 아픈 가슴을 부둥켜 안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교회, 이웃의 슬픔과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는 교회, 우리 와싱톤 한인교회는, 우리 모두는, 그렇게 부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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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우리를 "믿음의 공동체"로서, 집단적으로 부르시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세상의 어두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서만 드러납니다. 대낮에 촛불을 켜 보십시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태양의 밝음 앞에서는 촛불의 밝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어두운 밤, 깜깜한 한 밤에, 한 자루의 촛불은 주위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두움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할 때, 그들의 앞길을 밝히 비추는 빛과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경기도 포천에서, 포천 막걸리나 이동 갈비로 유명한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장암리에서3년간 군 복무를 했습니다. 저는 제 5 군단 육군 항공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육군 항공대 소속의 헬리콥터를 제가 조종했다는 것은 아니고, 그 비행기 유리창을 닦는다든지, 그 비행기가 뜨기 전에 기름을 넣는 일 같은 것을 했습니다. 항공부대에 근무하면서 한가지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하루는 밤에 긴급 야간 비행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헬리콥터들이 제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날아가서 몇 시간 동안 작전을 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너무 갑자기 야간비행을 해서인지, 부대로 귀환하는 헬리콥터들을 착륙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날 따라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는데, 활주로의 비상등이 고장나서 켜지지 않았습니다. 유도등 없이 헬리콥터가 착륙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비상조치를 취하여야 했습니다. 부대에 있는 모든 차량의 라이트를 켜서 헬리콥터들이 착륙할 장소를 알려 주겠다고 무전으로 통보했습니다. 그런데, 조종사들이 무선으로 회신을 하는 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정확한 부대의 방향과 위치, 그리고 자기가 조정하는 헬리콥터가 착륙할 장소를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제탑 요원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어두움 속에서 부대의 위치를 찾고, 착륙장소를 찾습니까? 조종사들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우리 부대 바로 옆에 있는 포천 이동 장로교회의 종탑 위에 세워져 있는 붉은 십자가 네온 사인을 보면서 자신이 위치를 파악하고, 어디 쯤에 착륙을 할 지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종탑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붉은 십자가 네온 사인을 보면서, 조종사들은 어두움 속에서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교회, 우리 와싱톤 한인교회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그 조종사들이 교회 종탑 위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찾았던 것처럼, 낙심하고 절망한 사람들이, 상처받고 괴로움에 있는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바라보고, "그래, 저 교회에 한번 가보자. 저 교회에 가면, 이 답답한 마음, 이 억울한 마음, 이 상처받은 마음이 위로 받고, 회복된다는 데, 저 교회에 한번 가보자." 우리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이 희망의 마음을 품고 바라볼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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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상의 소금이 되는 사명, 세상의 빛이 되는 사명을 받은 우리들이 항상 기억하고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서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공동체로 부르셨는데, 소금이 되라고 빛이 되라고 부르셨는데, 그 중에도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금이 먼저 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순서를 보십시오. 소금이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빛이 되기 전에, 먼저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합당한 순서입니다. 한국에서 나오는 신앙잡지 중에, "빛과 소금"이란 잡지가 있습니다. 저는 그 잡지 제목을 볼 때마다 아주 비성경적인 제목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소금"이 먼저입니다. "빛"이 되는 것은 "소금"이 된 다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잡지의 제목은 "빛과 소금"이 아니라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소금이 되는 것보다 빛이 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소금이 물에 녹으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물 속에 소금이 녹아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소금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물에 녹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소금입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도 않습니다. 반면, 빛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화려해 보입니다. 남이 나를 잘 알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먼저 소금이 되기보다는 먼저 빛이 되고자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의 순서대로 우리는 먼저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조용히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벽제단에 엎드려 예배당의 한 모퉁이를 붙들고 기도하는 교인들, 그런 소금과 같은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야 합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지만, 섬기는 속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속원들을 심방하시고, 속회를 성실히 이끌어 가시는 속장님들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야 합니다. 우리 와싱톤 한인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먼저 소금이 되는 교인들이 우리교회에 차고 넘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먼저 소금이 되는 교회, 그리함으로 세상의 빛의 역할을 다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원래 빛의 근원이었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어둠의 자녀였던 우리를 빛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빛의 길, 생명의 길은 우리 모두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 모두 손잡고, 우리를 "믿음의 공동체"로 불러주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빛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을 따라서, 다시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 가운데,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교회가 되어야 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소금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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