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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5.12. 어머니 주일/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여덟가지 성품(5) - 장찬영 목사

긍휼히 여기는 마음

마태복음 5:1-12

크리스챤의 삶의 본질과 그 특성은 그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기보다는 무엇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동기와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긍휼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인 긍휼이 여러분의 삶에 있습니까?

크리스챤의 삶의 본질과 그 특성은 그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기보다는 무엇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동기와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크리스챤의 외적인 행위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내적인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산상설교 첫머리에서 예수님은 크리스챤이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애통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을 바라보는 온유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며,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성품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크리스챤이 누구인가를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함께 나누게 될 성품들은 앞의 네 가지 성품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챤의 성품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 첫 번째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먼저 '긍휼'이라는 말의 근본 뜻은 '죄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거나 징계를 받아 죽게 된 사람을 다시 회복시키고 살리게 하는 도움'을 뜻합니다. 구약에서는 '헷세드'(Het-Ce-d)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약 150회나 쓰여졌는데 주로 하나님의 성품이나 행동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긍휼'이라고 번역되지만 '변함없는 사랑,' '친절, 자비' '따뜻한 마음'으로도 번역됩니다.

본래 긍휼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용서하고 치유하는 긍휼이 없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며 무한히 용서하시는 마음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과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즉 감정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용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긍휼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거나 용서한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때로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진노하시는 용서가 없으신 것으로, 또는 전쟁의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면에는 타락한 인류에게 보여주시는 당신의 끊임없는 긍휼과 자비가 강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마침내 이 땅위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기 까지 되신 것이고, 그렇기에 신약을 하나님의 긍휼의 눈으로 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긍휼의 단어를 적절하게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mercy)을 원하고 제사(sacrifice)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에 의하면 모든 제사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긍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도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fulness)은 버렸도다" 라고 하심으로 율법의 핵심이 긍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긍휼의 깊은 뜻을 보여주는 말씀은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 나타납니다. 여리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의 죽게 된 이 사람 옆에 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두 사람의 경우 아마도 동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단지 불쌍하다든지 안쓰러워 보이는 동정심이 있다고 그것이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때 또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길가에서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에게 상상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습니다. 10장 33절 이하에 보면 "1)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2) 가까이 가서 3) 그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4)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올 때에 갚으리라" 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보여준 것이 바로 긍휼이었습니다.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측은히 여기는 감정이 아니라 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일과 이익을 잊어버리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비유에서 우리는 긍휼의 세 가지 모습을 봅니다.
첫째로, 긍휼은 대상이 누구냐를 따지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의 신분이 누구냐를 보지 않고 절대 도움이 필요한 그 자체를 보는 것이 긍휼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인한 후에 도와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보다 당장 죽게된 그의 형편이 더 중요했습니다.

둘째로, 긍휼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자기 이익과 체면을 생각했다면 그는 결코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 시간과 돈과 정열을 다 쏟아 넣었습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은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이런 사람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미쳤다거나 바보라고 말입니다.

셋째로, 긍휼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임을 보여 줍니다. 긍휼은 머리와 가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에도 있습니다. 긍휼은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많이 흘리고 감격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말도 부드럽고 눈동자도 따뜻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가난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긍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긍휼은 구체적으로 말없이 행동하는 것이요, 아무도 모르게 실행하는 믿음입니다.

실제로 긍휼의 완벽한 예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한 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인생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죄를 짓고 법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절망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로 마음먹고 모든 것을 희생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자격이 없고 무가치한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를 아낌없이 부여하셨고 늘 변하기 쉬운 인간에게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조건 없이 무한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저주의 존재에게 생명과 부활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그렇기에 긍휼은 기독교 구원의 모든 것을 다 내포하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확신한 성도들은 긍휼의 삶을 살기 위하여 오지에 선교사로 나가기도 했으며,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과 평생을 살기도 했으며, 고아원과 병원과 학교 등 수많은 구제기관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긍휼은 크리스챤의 마크입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천사같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긍휼의 마음과 행동이 없다면 거짓말쟁이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향한 진실한 긍휼을 잃어버린 데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챤의 가장 큰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을 향한 긍휼을 잃어버린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해 잠 못 이루고 애통하는 심정을 가진 긍휼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에 난생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에 가게 되었었습니다. 그 동기는 단순히 같은 반에 있는 여자친구아이가 건네준 한 장의 카드였습니다. 그 카드에는 별다른 내용 없이 '찬영아, 나는 정말 네가 교회가 나갔으면 참 좋겠다' 라는 말과 함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는 이사야 41장 말씀을 적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그때 두려워 말라는 그 말씀이 이사야에 있는 말씀인지 뭔지도 몰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얘가 나한테 두려워말라 놀라지 말라 자기가 나와 함께 있겠다는 등 써 놨으니 그 소원을 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얼마나 간절히 교회에 가기를 바랬는지. . .하여간 어린나이였지만 무척이나 감동이 되었고 그 간절함 때문에 난생 처음 교회라는데 나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제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다는 겁니다. 제가 그 당시에는 괜찮았습니다. 사는 것도 괜찮았고 반에서 반장도 하고 공부도 괜찮게 하고, 키도 컸는데 말입니다. . . 그 아이가 가진 긍휼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 아이에게 전해 받은 긍휼은 저로 하여금 하나님 없이 사는 다른 친구들이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전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아픔과 하나님을 떠난 사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긍휼을 베풀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 .그것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제생활에서 수없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긍휼을 심으면 긍휼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실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이것처럼 은혜로운 말이 어디 있습니까? . . 사람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도 은혜가 되는데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아마도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없이 천국에 들어갈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집사람이 집에 들어오더니 하는 말이 오늘 운전하는데 어떻게 잘못해서 경찰에게 잡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drive license도 그날 따라 집에 놓고 나갔던 것입니다. 큰일 났구나 하고 낙심해서 뭐라구 얘기해야 하나 하고 차안에 있는데 경찰이 오더니 이것저것 묻고 돌아가서 한참 조회를 하더니 돌아와서 하는 말이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하면서 보내더라는 겁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한 경찰로부터 받은 자비에 집사람이 얼마나 그 순간에 감격이 되었겠습니까? 얘기를 듣는 제가 더 감격이 되더라구요. 왜 그렇습니까? 저는 집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기 때문이고 그 얘기가 남의 얘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LA에 한국으로부터 갓 이민 온 분들이 경찰에 걸렸을 때, 되지도 않는 콩글리쉬를 쓰는 대화를 조크로 들을 때마다 은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최근에 갓 이민오신 한 분이 운전하다가 경찰에 걸렸는데 이렇게 말하고 싶었답니다. "내가 어제 한국에서 미국에 왔는데 한번 봐 주라 그런데 혹시 너 앞으로 한국에서 월드컵하는 거 아냐?" 이걸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말하기를 "Yesterday Korea, Today America, Tomorrow world-cup, so look at me" 그러자 경찰이 뭐라고 합니까? 한국사람들의 콩글리쉬를 아는 경찰이 말하기를 '용서할 수 없다. 즉 국물도 없다'를 'No soup'라고 했다는 겁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은혜를 받습니다. 왜요? 이 얘기가 제 얘기거든요 . . . 긍휼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감사하고 감격할 뿐입니다. 이런 제가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얼마나 은혜 가운데 살았겠습니까? 왜요? 저는 저를 잘 알거든요? 아무리 봐도 도저히 목사가 아니, 기독교인도 나올 수 없는 저의 집안 아니 통틀어 가문, 문중에서 제가 목사가 되었다는 것도 완전히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요, 지금 여러분께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도, 여러분과 함께 와싱톤한인교회를 섬긴다는 것도 모두 다 여러분들의,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당연히, 아니 기꺼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긍휼함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 (당신의 긍휼하심을) 확증하셨느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이 받은 그 긍휼을 마음과 생각에 머물게 하지 마시고 행동으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로 옮기도록 해 보십시오. 이 말씀들을 들어 보십시오.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팍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신 15:7-8)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5-17)

끝으로 이 하나님의 마음 - 긍휼히 여기는 마음- 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물론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긍휼의 옷을 입게 합니다. 특별히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좌절할 때 기도하십시오. 특별히 하나님의 사역 앞에서 용기가 나지 않고 결단이 되지 않아 어떻게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를 때 기도하십시오. 분명 하나님께서 놀라운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긍휼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진정한 긍휼, 그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세상을 향해, 이웃을 향해, 한 영혼을 향해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줄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 긍휼히 여김을 도로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주님께서 주시는 긍휼히 여기심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손길이 닿는 곳에 긍휼을 베푸십시오. 아니,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긍휼을 날마다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 은혜 속에 살고 계십니까? 그 받으신 긍휼을 아직도 하나님의 그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모르는 민족과 열방에게 베풀어 주십시오.

공동번역 성서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