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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4.21.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여덟가지 성품(4) - 장찬영 목사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마태복음 5:1-12
진짜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생각, 가치관, 삶의 모습등 많은 부분에 있어서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우선적으로 달라야 하는 것은 바로 성품입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성품,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도대체 의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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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에 나타나고 있는 여덟가지 축복은 다른 말로 하면 크리스챤이 소유해야 할 여덟가지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이 성품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 번째부터 네 가지 성품, 즉, 심령이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에 주리고 온유한 마음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대해 가져야 하는 성품을 나타내고, 다섯째부터 여덟 번째까지의 성품, 즉, 긍휼히 여기는 마음, 청결한 마음, 화평케 하는 마음,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마음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 어떤 성품을 가져야 하는가를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께 소개받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즉,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마음 그 네 번째에 대해서 나눠 보겠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을 바라볼 때 그는 하나님의 본질에 접근하게 되고 그때 하나님에 대해 강렬한 열망을 갖게 됩니다. 그 열망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모습입니다. 이러한 성품은 변화된 크리스챤의 가져야 할 성품의 극치이며, 동시에 크리스챤의 삶의 최정상에 올라선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여기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지배원리가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크리스챤의 성품의 극치인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기준이요 표준이란 뜻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잣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우리의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로 재어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기준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기준이 바로 의입니다. 뿐만 아니라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요 본질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신구약 전체의 말씀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의롭다고 하는 것을 옳고, 바르고, 정직하고, 의리있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0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사람의 의란 마치 아무 쓸모 없는 걸레조각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빌립보서에서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 앞에 보니까 일종의 배설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의를 말해야 의가 통합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이 아무리 의를 말한다 해도 본인 자신이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 주장하는 것 자체가 불의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자신을 대단히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출생이나 학문, 배경 이 모든 것에서 자신을 볼 때, 누가 보아도 자신은 의에 대하여 얘기할 수 있는, 자신의 의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에 눈을 뜨고 자신의 눈에서 잘못된 의라는 비늘이 떨어져 나갔을 때 '자신이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난 의 밖에는 없다'고 (빌 3:10)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얻어진 의가 아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의를 갈망하고 사모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이 주는 명예와 배경 그로부터 얻어낸 자신의 의로부터 벗어나 참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최고의 갈망일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그래서 애통해 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그 마음이 온유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이제 자신의 의의 옷을 벗고 하나님의 거룩의 의를 옷 입기를 원하는 마음에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역시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의 모습은 철저히 세상적인 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잣대로 이웃을 판단하고 자신의 경험고 배경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침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신의 의라는 비늘이 떨어져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들만이 소유하는 독특한 성품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철저하게 의를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자녀가 세상의 의, 자신의 의를 갖고 그것이 다인 것처럼 살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한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에서 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극진히 대접하게 됩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떠나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가 이제 곧 멸망당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고모라에 있는 조카 롯을 걱정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창세기 18장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주장하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할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2-25)
이 말은 아주 논리 정연하고 당당하며 하나님의 속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꼼짝 못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으로 멸망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그 중에 의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여기에는 할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좋다. 의인 오십 인을 찾아서 나에게 보여주면 내가 이 성을 용서하겠다." 이 말을 듣고 난 아브라함은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의인 오십 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사십오 인이면 어떻겠습니까?"
"좋다. 사십 오인을 달라."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 삼십 인이면 어떻겠습니까?"
"좋다. 삼십 인을 달라."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이십 인이면 어떻겠습니까?"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면 어찌하시려나니까?"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기서 또 절망하게 됩니다. 자기를 포함해서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을 용서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통일을 주시옵소서. 안정을 주시옵소서. 축복을 주시옵소서. 건강을 주시옵소서. 성공을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기도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역시 이러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간구에 앞서 당신을 향한 의를 요구하시고 의인을 찾으십니다. 또 지금도 하나님은 "내가 통일을 시켜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 땅을 고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너희의 삶을 부흥시킬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나는 먼저 너희들의 의로운 모습을 보고 싶다. 땅의 변화 이전에 환경의 변화 이전에 너희 모습의 변화를 보고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인을 달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예루살렘이 망한 이유는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한 사람의 의인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도시라는 뜻의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모두 거룩하게 의인인 것처럼 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다 위선자요, 저울을 속이고, 가격을 속이는 사기꾼들로 이웃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에 결국 예루살렘은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의로운 사람을 목마르게 찾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마른 마음은 본래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목마르다'라고 하셨던 말씀은 육체적인 갈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 세상을 위해 죽어 가시면서 여전히 세상에 의인이 없는 현실로 인해 안타까와 하시는 마음, 목마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목마른 사람 한 명이 있으면 가정이 새로워질 수 있고, 교회가 국가가 의로워질 수 있기에 주님은 의로운 자를 목마르게 찾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의에 대하여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몇 끼 안 먹은 갈증과 배고픔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원어의 뜻은 빈사상태 즉 죽을 지경이 된 상태를 뜻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는 돈도, 건강도, 친구도 다 잃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을 정도로 주려서 죽게 된 비참한 상태에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생명이 꺼져가는 절대적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상태, 쥐엄열매를 먹으면서 내가 아버지 집의 종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심정으로 아버지 집을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의 상태입니다.
주리고 목마를 때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고달픕니다. 이때 그 사람은 말할 수 없이 마음이 가난해지고, 온유해지고, 애통해지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그에게는 물 한 모금이 꿀물이요 밥 한술이 송이꿀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챤들이 오늘날 현실 속에서 느끼는 감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현대인의 가장 큰 비극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치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말처럼 감사와 기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이미 감사라는 단어를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자녀들의 문제입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도 끊임없는 불평과 한숨이 있을 뿐, 진정한 감사의 고백은 점점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이런 좋은 남편, 이런 좋은 아내, 이런 좋은 자녀를 주셨다니', '내게 이런 좋은 환경을 주셨다니. . .' 때로 세상적으로 보면 그것이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서 보면 무엇 하나도 눈물 흘리며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옷이 좋으면 어떻고 나쁘면 어떻습니까? 집이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떻습니까? 월급이 남보다 좀 많으면 어떻고 좀 적으면 어떻습니까? 좀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면 어떻고 떨어지는 대학에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 . . 생명이 있다고 하는, 살아있다고 하는 사실, 내가 지금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의 태도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품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배부르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의 충만함이 내게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상식적으로 누가 배부름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배고픔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배부름의 그 말할 수 없는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언제든지 마음껏 무엇이든지 일년 사시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배부르다는 의미를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리고 목말랐기에 배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것 같기에 진정한 영적인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 시편 23편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 무슨 말입니까?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에 이제 나의 삶은 무조건 형통할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나의 목자이시기에 내가 어려움을 당해도, 때로 억울함을 당해도, 사망의 골짜기를 다닌다 할지라도 염려하지 않는다, 배부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첫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거짓된 의를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감추고 살았던 위선의 덩어리를 솔직하게 통찰할 줄 아는 사람이 의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의를 고집하지 아니하고, 상대방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늘 찾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외적인 것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이 좋은 집, 좋은 직장, 좋은 환경, 자녀들의 성공, 세상에서의 명예와 같은 외적인 것들에 만족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진정 의에 대하여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한 외적인 것들은 우리들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들 중의 하나 일뿐이지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만족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셋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삶에 동기와 근거가 되는 사람입니다. 성경말씀에는 하나님의 의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말씀 묵상하기를 즐겨하고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앞에서 그 사건을 이해하는 원리와 기준에 기꺼이 말씀을 적용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이나 논리, 학문의 근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상식을 말씀 위에 두지 않습니다. 말씀이 자신을 이끌고 가도록 자신을 늘 비워두는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 . . 그 사람은 진정 배부름을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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