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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4.14. 부활절 후 둘째주일 - 김상근 목사
부활의 길동무
누가복음 24:13-35
예수님을 우리 삶의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종된 우리의 모습을 인정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도 부활의 길동무되신 예수님과 함께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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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 지역에서 활동하시던 숭산 스님에게 하루는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찾아 왔습니다. 최근에 널리 읽히고 있는, 현각이라는 미국 스님이 쓰신, "만행 -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읽으신 분은 한국 선불교의 큰 스님이신 숭산 스님이 누구신지 아실 것입니다. 그 숭산 스님께 하버드 대학의 한 여학생이 물었습니다. "스님, 사랑이 무엇입니까? Master, what is love? 숭산 스님은 그 질문을 받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다가, 그 미국 여학생이 다시 물었습니다. "스님, 사랑이 무엇입니까? Master, what is love?" 숭산 스님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학생이 다시 똑 같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Mater, what is love? 그러자 마침내 숭산 스님께서 입을 여시고, 자신의 질문으로 그 여학생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Sister, what is love? 그 여학생의 질문에는 대답 하지 않고 그 여학생의 질문을 그냥 되풀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말했습니다. "아니, 스님, 그 질문은 제가 스님께 드렸던 질문입니다." 그러자 숭산 스님은 눈을 뜨시며, 대답하셨습니다. "You ask me, I ask you, that is love." "당신이 내게 묻고, 내가 당신에게 묻는 것 -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독백이 아닙니다. 사랑은 대화입니다. 사랑은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에게 묻는 것입니다. Do you love me? Yes, I do.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은 서로에게 묻는 것입니다. 서로의 위치를 묻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상도 사람들은 부부간에 서로의 사랑을 묻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에 참 어색해 합니다. 가끔 제 아내도 제게서 그런 사랑의 확인을 바라는 모양입니다. Do you love me? 그렇게 물으면 저는 대답합니다. "니 오늘 뭐 잘못 묵었나, 와이라노." 좀 촌스럽지만, 그것도 사랑의 대화입니다. 서로에게 묻고, 서로에서 확인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그렇게 사랑을 묻고, 서로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길동무를 만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인생의 좋은 길동무를 얻는다는 것, 평생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 Companion을 얻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2주 후면 제 둘째 동생의 결혼식이 한국에서 있습니다. 제 둘째 동생은 언젠가 한번 말씀 드렸습니다만, 한때 부산 지역 학생운동의 리더였다가 2년간 교도소 생활을 한 소위 "운동권" 학생이었습니다. 제 동생이 감옥에 있을 동안, 소위 "옥바라지"를 하던 같은 학교 출신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매 주일 교도소 면회를 가는 등, 제 동생이 감옥에 있었던 그 어려운 때에 참 좋은 동반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학생의 부모님은 운동권 출신의 사윗감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으시고, 다른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갈 것을 강요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여학생은 제 동생이 감옥에서 나와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부모님의 성화를 모면하기 위해서, 이화대학교에서 학부 과정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화대학 학생들은 졸업 전에 결혼이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제 동생을 기다리기 위하여 이미 졸업한 학부과정에 다시 입학하여, 4년 동안 시간을 번 다음, 이제 이주 후에 한국에서 제 동생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위에 좋은 신랑감도 많을 텐데, 못난 제 동생과 결혼하게 될 제 예비 제수씨를 생각하면, 인생의 여정에 참 좋은 동반자를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매일 기쁨과 슬픔이라는 인생의 교차로를 지나게 됩니다. 기쁠 때 뛰어가서, 전화통을 붙들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 참 우리를 살맛 나게 하는 것입니다. 삶의 곤고함과 인생의 슬픔이 우리를 억누를 때, 함께 어깨를 맞대고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들의 곤고한 삶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함께 웃고 또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좋은 길동무가 우리 곁에 있다면, 우리는 넉넉하게 이 곤고한 삶을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I.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곤고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믿고 따랐던,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믿었던(눅 24: 21)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형벌로 죽임을 당하고 난 후, 로마 군병들의 살벌한 감시를 피해 엠마오라는 마을로 도망하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두 명의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부활의 사건을 믿지 않고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 두 명의 제자들에게 "부활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다정한 친구처럼 그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십니다. 너희가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느냐? 그리고 성경말씀 중에 나타난 인자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눅 24: 27)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두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의 부활의 길동무가 되어 주셨습니다. 날이 저물자 피곤한 하루의 여행길을 마치고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말씀의 떡만 먹이신 것이 아니라, 일용할 하루의 양식, 오붓하게 저녁 한끼를 함께 나누시는 인자한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본문 3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길이 엠마오의 길입니다. 끝없는 슬픔이 앞 길을 막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나타나셔서 우리 인생의 참된 소망을 보여 주십니다. 죽음이 우리 인생의 종착점이 아님을 보여 주십니다. 죽음 뒤에 부활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친히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때로 지금 당면한 어려움이나 고난이 마치 우리 삶 전체를 괴로움으로 규정하는 것 같이 느낄 때도 있지만, 우리가 부활의 길동무되신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다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롬 8: 18)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안식년으로 안 계시기 때문에 그 동안 조목사님께서 담당하셨던 몇 가지 어려운 사역들이 제게 주어 졌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개인적인 어려움을 당하시는 교인들을 심방하는 일입니다. 저는 그 분들의 가정을 심방하기 위해 길을 가면서, 그 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엠마오 길을 가고 있던 제자들의 모습을 떠 올립니다. 절망의 길을 걸어갔던 두 제자들의 모습에서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의 모습을 떠 올립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길동무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가운데 있던 두 제자들을 만나 주셨던 예수님을 만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II.
더욱 중요한 문제는, 부활의 길동무 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부활의 길동무를 만나서 Happy해 졌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두 제자는 그들의 목적지인 엠마오에 도착했다." 엠마오 길에서 일어난 예수님과 두 제자의 만남은 이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엠마오 길에서 부활의 길동무를 만났던 두 제자는 그들의 행선지를 바꾸었습니다. 33절에 보니, 두 제자는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을 향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이 이미 기울었는데, 이제 저녁 먹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는데, 그 두 제자는 부활의 길동무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길이 어떤 길입니까?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께 묵묵히 걸어가셨던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던 곳, 배신이 기다리고 있던 곳, 죽음이 기다리고 있던 곳,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부활의 길동무를 만난 두 제자는 이제 엠마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십자가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엠마오는 "따뜻한 우물"이란 뜻입니다. 본문 말씀에 예루살렘과 엠마오의 거리가 불과 7마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멀지 않는 길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따뜻한 우물에 몸을 담그고, 평안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엠마오 길에서 부활의 길동무를 만난 두 제자는, 방향을 바꾸어 십자가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자기도 지고,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길동무를 만난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따뜻한 우물물이 기다리고 있는 엠마오가 아니라, 고난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골고다를 향해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욕심과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것에서 방향을 돌려, 고난의 십자가, 주 달린 십자가를 바라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 나도 같이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성서 고고학자들과 많은 학자들이 엠마오의 실제 위치를 찾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지만, 그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7마일 반경 안에 있는 도시를 다 뒤져 보았지만, 그 곳이 엠마오라는 문헌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구약 66권을 통틀어 딱 한번만 이 엠마오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히브리어로 "따뜻한 우물"이란 뜻의 엠마오라는 도시는 이 세상에 없는 도시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엠마오라고 믿는 곳은 우리가 쫓고 있는 신기루, 허상과 같은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엠마오를 찾기 위해 오늘도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성취욕이라는 엠마오를 찾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라는 엠마오를 찾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녀들에게 엠마오라는 이름을 붙이고 대리만족을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지위에 오르는 엠마오를 찾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는 엠마오를 찾고 있습니다.
III.
그러나, 부활의 길동무를 만난 우리들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엠마오가 우리 삶의 방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루살렘, 그 십자가의 길이 우리 인생의 참된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들이 부활의 길동무이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 그들은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늦은 밤에 길을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그들은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가자. 오늘 밤은 쉬고 내일 떠나도 늦지 않겠지 - 그렇게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발걸음, 세상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즉시 돌려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두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향해 인생의 발걸음을 바꾼 것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들은 부활의 길동무 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들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엠마오에 도착하는데, 그곳에 "따뜻한 우물"이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들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지금 당장 삶의 방향을 바꾸십시오. 엠마오로 향했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엠마오에서 여러분의 영혼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엠마오에 도착하면, 이 세상의 유혹이, 이 세상이 주는 풍요로움이, 이 세상이 주는 물질이 여러분의 영혼을 만족시킬 것 같습니까? 엠마오로 가는 길은 끝이 없습니다. 아니 엠마오는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엠마오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던 그 두 제자들도 무엇인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엠마오로 향해 갈 때 그 제자들이 지고 가던 것은 "걱정과 근심"이었습니다. "불안과 공포"였습니다. 그들이 지고 가던 것은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중의 하나는, 내 인생의 고민거리를 자신이 지고가야 할 십자가로 잘못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속을 썩이면, "그래,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야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식이 속을 썩이면, "그래, 내가 그 십자가도 지고 가야지." 시누이가 속을 썩이면, "그래, 좀 많지만 그 십자가도 지고 가야지." 여러분, 그것이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지 마십시오. 걱정 근심, 무거운 죄, 불안과 공포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지고 가던 것입니다. 부활의 길동무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 제자들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더 이상 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 벗어 버리고, 십자가를 바라 보았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고 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님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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