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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31. 부활 주일/방글라데쉬 단기선교 파송예배 - 장찬영 목사
빈 무덤
마태복음 28:1-10
주님께서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멧세지는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무덤에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더 이상 빈 무덤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떠나는 종교입니다.
건물에, 제도에, 이해관계에 매여 머물러 있는 빈 무덤을 지키는 죽은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부활을 믿느뇨? 그렇다면 가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
. .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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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싸여 무덤을 막은 돌에 단단히 인봉을 하였습니다. 또한 특별 경계령을 내려 파수꾼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이제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굳게 닫힌 돌 안에 갇혀 있습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이틀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삼일 째인 안식일 다음날 새벽, 엄청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 처음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했던 이 여인들이 부활을 믿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을 뿐이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던 여인들, 부활신앙이 없었던 여인들, 인간적으로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던 여인들에게 부활의 사건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기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한편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당신의 부활에 대해 듣기는 했어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 주님의 시체를 훔쳐갔다 생각하니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 . 그래서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고, 불길한 예감에 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에게 천사는 세 가지의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메시지는 "무서워 말라. 두려워 말라"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찾아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서울만 해도 수 백만 명이 넘을 것이고, 이곳 워싱톤 지역도 이제는 이민교회의 수가 300여 개가 훨씬 넘었다는 것을 보면 많은 분들이 교회에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면서도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여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따르면서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는 나오지만 여전히 죄책감과 갈등 속에서 양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미래가 불안하고 세상살이가 모두 불안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살아 계실까? 지금 여기 계실까?'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죽음 이후에는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일까?' . .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는 찾았지만 살아계신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지 않습니다. 불안의, 두려움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어떻게 고난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정말 믿느냐? 그러면 두려워하지 말아라, 불안해하지 말아라"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근본적으로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안한 세상, 위험이 많은 세상, 때로 한 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 살면서도 분명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사는 이유는 바로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갔다고 생각하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기쁨과 감사와 감격과 승리만이 있을 것입니다. 시체가 없어진 것이 더 이상 슬퍼할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고난과 역경과 억울함과 손해보는 것이 고통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안경을 통하여 볼 때, 즉 부활의 앵글로 모든 사건을 볼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은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아프다는 것은 더 이상 끝도 절망도 아닙니다. 병이 저주가 될 수 없고 실패가 끝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억울함도 낭패도 절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두 번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천사가 말하기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두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은 예수님이 실종되셨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듯이 삼일 후에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6에도 천사가 말하기를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24장 5절에도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다시 살아나셨고, 천사들은 이 기쁜 소식을 여인들에게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말입니다.
'살아나셨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천년 전에 아리마대 요셉이 예비한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가 뉘여 있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것은 그때만 살아나셨다는 뜻이 아니라 이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분은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살아나셨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이천 년 전의 초대교회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에, 이천 년 동안 전세계에 전파되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영원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죽은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나 공자처럼 위대한 성자에 불과했다면, 예수님도 성자들과 같이 땅 속 그대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역사를 통치하시고 지배하시며 앞으로 장차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들의 영적 상태, 마음의 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부활의 사건은 그렇게 쉽게 '척'하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성이나 경험, 상식, 합리적인 사고의 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부활의 사건이 처음 전달되었을 때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가셨다는 말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의심하다가 또 믿었다가 그렇게 세월이 지나가면서 점점 내 마음속에 자리잡히는 것입니다.
이 부활 사건이 언제 결정적으로 역사 한 줄 아십니까? 바로 오순절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을 때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완전히 통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제자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고, 세상살이가 두렵지 않고, 성공과 명예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첫 목격자였던 여인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충격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이란 그냥 교회에 나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 에야만 우리는 신앙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무릎만 꿇었다고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도마처럼 그의 손을 만져보고 그의 옆구리를 만져보아 그의 살아있는 인격체를 내 삶 속에서 경험할 때, 정말로 살아 역사 하시는 주님을 목격할 때에, 내 삶과 인생이 결정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만 오고 있을 뿐이지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찬송도 부르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애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옛날 세상적인 육의 생활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는 다른 세 복음서에 없는 아주 독특한 기사가 있습니다.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 ." 예수님이 거기 서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의 문제는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신데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에만 관심이 있었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모습하고 똑같습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하면서 예수님의 시체만 붙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무런 기적도, 위로도, 능력도, 축복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껍데기를 찾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 성령의 눈을 뜨지 못한 신앙, 육신적인 신앙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계속해서 여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요한복음 26:16에서 "마리아야"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러 줍니다. 이 때 여인들은 동산지기의 음성이 아니라 그렇게 사랑했던 주님의 그 부드러운 음성, 바로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음성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히브리말로 "랍오니여(선생님)"하고 반응합니다. 드디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옆에 계신 주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 주고 계십니다. "마리아야"하고 불러 주셨던 것처럼,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해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려 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 옆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배신을 당할 때도 옆에 계셨고, 여러분이 실패할 때도, 그래서 절망할 때도 옆에 계셨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마 그 순간부터 이 여인들은 변화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신앙이란 부활에 눈을 뜰 때부터 능력과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모든 제자들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보고 예수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고난의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와 부활은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마치 동전의 앞과 뒤같이 하나의 사건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고, 부활 없는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천사의 세 번째 메시지를 들어보십시오. 이제까지의 천사의 메시지는 "두려워 말라.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다. 승리하셨다"였습니다. 이제 이 부활의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세 번째 메시지는 "가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여기 무덤에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덤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빈 무덤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종교가, 많은 기독교가 예수 없는 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건물을 지키고, 교파를 지키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제도 안에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교단도, 제도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이러한 것에 머물러 만족해 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박물관이 되어버린 유럽의 그 크고 화려한 교회당들을 기억합니다. 백성들은 굶어 죽는데도 그 어마어마한 돈을 드려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 주님을 머물게 하고 그곳이 좋아 자신들만의 법과 제도를 만들었던 당시 기독교는 세월이 지나면서 마치 시체처럼, 무덤처럼 변해갔고, 그 기독교의 물결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서 이곳 아메리카로 왔던 것입니다. 집이 귀한 것은 집을 떠날 때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땅위에 영원한 내 집이 없듯이, 언젠가 그 집 또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집 자체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순간을 소유한 사람은 순간의 것에 애착하지만, 영원을 소유한 사람은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종교는 지금을 위해 머무는 무덤의 종교가 아닌, 여기가 좋다고 여기에 주님을 모시고 우리끼리 살자는 종교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영원을 향해 떠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못 떠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걸리고, 사업이 걸리고, 건강이 걸리고, 인관 관계가 걸려 못 떠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이를 두고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에게 부활신앙이 있었다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떠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소유와 집착과 현실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무덤을 떠나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무덤을 찾는 신앙이 아니라 무덤을 떠나는 신앙, 예수님의 시신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닌, 교리적 신앙이나 제도적 신앙이 아닌, 살아계셔서 내 삶 속에서,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내 삶의 터전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신앙입니다.
이제 이 부활을 믿은 사람들이 받게 되는 메시지는 "가라!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캠퍼스에 가서도 전하고, 직장에 가서도 전하고,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인류 절반의 사람들에게, 아직도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갖지 못해 말씀을 읽지 못하는 3000여 종족들에게로,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이 땅위의 1500여 종족들에게, 잘못된 이데올로기와 미움과 증오로 뭉쳐있는 종교심으로 인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10/40 Window 안에 있는 모슬렘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것은 이 천년 전에 예수님이 무덤에 갇혀 있다가 그 시대에만 살아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천 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분은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기극은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든 안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태양은 존재합니다. 때로 안 보인다고 부인해도 태양은 오늘도 뜨는 것입니다. 진실은 감출 수 없습니다. 부활은 감출 수 없습니다. 부활을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결코 도둑 맞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주님은 불안해하는 여인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 "평화가 그대 안에 있을지어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라. 가서 전하라.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여라.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내 증인이 되어라. 내 양을 먹이라.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아멘.
* 같이 생각해 봅시다.
- 나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었습니까? 아직도 나에게 존재하고 있는 염려와 걱정은 무엇입니까?
-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내가 복음을 전할 곳은 어디입니까? 문제는 가깝게든 멀리든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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