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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24.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여덟가지 성품(3)/종려 주일 - 장찬영 목사

온유한 마음

마태복음 5:1-12

그렇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변화된 성품을 통해 구별됩니다.
세상은 온유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강함과 심지어는 폭력과 모든 방법이 다 동원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온유한 자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음을 선포합니다.
당신은 이 말씀에 동의하실 수 있습니까? 정말 동의하십니까?

오늘은 참된 크리스챤의 성품의 세 번째 특징인 온유함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산상설교에 나타나고 있는 여덟가지 축복은 다른 말로 하면 변화된 크리스챤이 소유해야 할 여덟 가지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 . 오늘 말씀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발견하는 사실은 땅의 정복, 즉 이 세상의 정복은 온유한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폭력이나 무력 등 어떤 세상적인 힘에 의해서, 또는 어떤 지배적이고 공격적인 영웅에 의해서 땅이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온유한 자들에 의해서만 이 땅은 정복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시편 37편 11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시 37:11)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나라는 정복자의 힘과 능력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반대로 섬기는 자의 온유와 겸손으로 통치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군사적인 침략과 정치적인 압제, 경제적인 빈곤과 사회적인 혼란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시대의 형편과 아주 흡사합니다. 세상사람들은 투쟁을 통해서, 민중의 힘을 통해서, 어떤 역사의 힘을 통해서 이 세상이 정복되고 변화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왜 교회가 이런 투쟁 세력에 앞장서지 않느냐고 항변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천국은 투쟁이나 어떤 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영웅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고, 천국은 지배가 아니라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개념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젠 진정한 온유란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온유'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라우스'는 '짐승을 길들여서 주인이 하라고 하는 대로 하게 한다'는 뜻이 있는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부드럽고 나약하고 순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온유하다, 겸손하다, 이해심이 있고 예의 바르다'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는 우리가 세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온유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온유함이란 산상설교의 첫 번째 마음인 가난한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그가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서 볼 때 자기의 행위와 의는 아무 것도 아니며 자신의 마음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해있음을 발견하면서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성품인 애통함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불의와 불법 그리고 죄와 허물을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면서 자기의 죄처럼 대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까지 온 사람은 더 이상 교만하거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침략하지 않습니다. 그는 진실로 마음이 겸허해지고 낮아져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령의 가난함과 온유함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심령의 가난이 우리의 죄에 초점을 맞춘다면 온유함은 하나님의 거룩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가난은 죄를 발견하는 마음이며, 온유는 하나님의 거룩을 발견하는 마음입니다. 온유의 뿌리는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것이며, 그 마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을 보면서 그분의 영원한 가치를 깨닫고 그분으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배란 무엇입니까? 무가치한 존재가 예배를 받으실만한 가치가 있는 분에게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요, 그분의 한없는 은혜와 긍휼의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을 바라보는 온유가 없다면 우리 예배는 다 교만한 것이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진정한 크리스챤의 모습은 첫째,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애통하는 모습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기다리면서 그분의 거룩에 자신의 초점을 맞추고 그의 의를 사모하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로, 온유함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과 그 영광의 광채에 동참하는 데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부드러움, 연약함을 넘어서 성령의 내적인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온유라 했음으로 진정한 온유 속에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주석학자인 데니스 레인 목사님은 이것을 가리켜 '거인의 손안에 있는 갓난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진정으로 강한 자만이 온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속도란 제어장치가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속력을 조절할 수 없는 자동차는 그 순간부터 흉기로 둔갑합니다. 실로 온유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능력, 성격, 생각,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온유한 사람은 폭력과 복수, 그리고 어떤 기만이나 술수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사람들은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권력이 있으면 그 권력으로 사람을 흔들어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온유 그 자체가 폭력과는 반대의 개념이기 때문에 절대 힘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분노와 복수의 감정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또 시기와 질투로 자기의 인격과 성품을 유린시키지도 않습니다. 오직 사랑과 용서, 은혜와 긍휼로 변화된 성품, 바로 이 온유한 성품만이 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로, 온유함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의 엄청난 능력을 힘입었을 때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바치고 기쁘게 헌신하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자신의 방법을 정당화하거나 자기의 목적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권리를 주장하면 누군가 타인은 권리를 박탈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익이란 말에는 타인의 손실이란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항상 손해를 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권리를 먼저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권리와 입장을 먼저 세워줍니다. 그는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지만 주장하지 않고 따지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자신에 대해 민감하지 않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등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져있는 사람은 절대로 온유할 수 없습니다. 만약 누가 개인적으로 저에게 당신이 예수 믿고 나서 받은 축복 중에서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선은 구원받고 천국을 소유한 축복을 말할 것이고, 그 다음은 열등의식에서 해방 받은 것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가지, 그분이 내 삶을 다스리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열등의식에 빠져 지냈는지 모릅니다. 많은 시간을 잘못된 생각으로 허비했던 것입니다. 또 그와 반대로 우월감 혹은 자기편견에 사로잡혀 지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사람 가운데 때로는 열등감 때문에 예수 잘 믿는 사람도 있고, 우월감으로 예수 잘 믿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하든 지간에 마음의 평화나 자유나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는데 항상 긴장하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벽주의자들이나, 일등을 하지 않으면 못사는 사람, 항상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사실 모두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또 열심히 비교하면서 인생을 사는 사람이나 반대로 타인의 시선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도 있는데 역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실로 모든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결코 그는 누구를 자기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교만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연민에 사로잡히는 사람도 아니요, 인정받고 칭찬 받아야만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에 자신의 정과 욕심을 못박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다른 사람이 어떤 오해나 무시를, 경멸의 말을 해도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온유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하는 것에 대하여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실제로 온유했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을 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나 순종하고 떠났습니다. 순종은 온유의 표현이고 열매입니다. 자기 조카 롯과의 싸움에서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다음날 새벽 일찍이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온유였습니다.

우리는 또 요셉을 통해 온유를 봅니다. 그는 형들의 질투 때문에 부모와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애굽으로 팔려가 그곳에서 죽도록 고생을 하고 모함을 받아 결국 감옥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워주십니다. 그 후, 형들과 다시 만나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형들은 바로 이 총리대신이 자기들이 그렇게 질투하고 미워했고 죽음의 곳으로 내쫓았던 동생 요셉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무서워하고 떨었겠습니까? 이때 요셉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이제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 45:5-8)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여러분 중 일가 친척이나 배우자나 혹은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분노와 미움의 관계가 있으신 분은 안 계십니까? 온유를 베푸십시오. "지난 시간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돌이켜 볼 때 이렇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 보십시오. 여러분, 힘들어도 용서해 보십시오. 어려워도 인내해 보십시오. 힘들기 때문에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징계하거나 비판하거나 채찍질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40년 광야생활을 통해서 그가 얻은 것은 온유였습니다. 그는 실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쓰시고자 할 때도 "주여 저는 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온유함을 민수기 12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러면 온유한 사람의 받을 축복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은 성공하거나 출세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이 생존경쟁에서 밀려나 뭇 사람들의 이용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자세히 보십시오. 그 동안 역사를 지배해 왔던 수많은 영웅들과 침략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알렉산더, 시이저, 샤르망 대제,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등을 보십시오. 그들은 순간은 승리했을지 모르지만 그 최후는 언제나 패배였습니다. 결코 한 사람도 오늘날 인류의 마음에 살아남아서 인류를 지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무능하게 죽으신 그 분이 지금 여러분과 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바로 그분이 지금도 전세계를 지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의 능력이며 또한 온유의 축복입니다.

온유한 자만이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감격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은 온유한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같이 자기를 낮추고 겸허한 온유한 사람만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결국에 온유한 자는 심판 날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자유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스바냐 2:3,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외치는 그 소리를 들으시면서 골고다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 죽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묵묵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이 아침, 다시 한번 온유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온유의 성품이 없습니다. 혹 있더라도 우리는 사람을 구별하여 온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세리와 창기에게까지도 온유를 보여주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에게까지도 온유를 보여주셨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온유하기 원하십니까?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자기라는 것이 살아있는 한 교만의 끈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해방 받으십시오. 마음의 모든 상처에서부터 치료받으십시오. 그때 우리는 온유한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 온유하기 원하십니까?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힘과 권세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재능과 능력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때에 온유는 떠나갑니다. 오직 사랑과 긍휼을 의지하십시오. 힘은 절제될 때 위력이 있고, 재능 역시 겸손히 감추어져 있을 때 실로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이기려 하지 말고 져 주십시오. 성취하려 하지 말고 포기해 보십시오.

여러분 온유하기 원하십니까? 무엇보다 분을 품지 마십시오. 결코 화를 내지 마십시오. 분노와 화는 온유의 적입니다. 참고 기다리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오늘 여러분 주위에 어쩌면 화날 일들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만이라도 화내는 일을 포기해 보십시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온유한 마음 없이는 결코 주님의 십자가를 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제대로 바라볼 수 조차 없습니다. 온유함 없이는 고난의 십자가를 묵상할 수 없습니다. 종려주일, 주님의 이 온유한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