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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17. 사순절 다섯째주일 - 김상근 목사

큰 아들을 위한 변명

누가복음 15: 11-32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오늘 말씀은 이미 수많은 설교의 본문이 되어왔습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 혹은 사랑으로 기다리셨던 아버지의 인내를 주제로 설교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들판에서 돌아온 큰 아들의 모습에서, 우리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I.

우리가 함께 지내고 있는 사순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40일간의 기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순절은 단순히 부활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40일간의 기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지키고 있는 사순절은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지은 죄를 고백하고, 함께 애통해 하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은밀한 죄를 주님 달리신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첫 설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였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은 예수님의 첫 멧세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심판의 때를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분이십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이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듣고 그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였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이번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까지 당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리면, 만약 우리가 지금 회개하지 않는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지금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말씀은 지금 당장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번이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년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까? 회개로 번역된Metanoia 라는 헬라어는 원래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발걸음을 돌려서,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은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셨습니다. 회개의 시간,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II.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탕자의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 아들이 어느날 아버지께 찾아와 요구합니다. 제게 상속할 재산을 일시불로 다 주십시오. 이 둘째아들은 탕자였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재산을 허랑방탕하며 다 탕진하여 버렸습니다. 졸지에 거지가 된 이 둘째 아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돼지들이 먹는 더러운 음식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고향으로 향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리고, 이제 거지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 갑니다. 돌아온 탕자를 그 아버지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그 아버지는 사랑으로 다시 받아 주었습니다. 오히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부자의 상봉 장면입니다. 아니 너무나 감동적인 회개의 장면입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던 회개의 장면입니다.

이 유명한 탕자의 비유는 수많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이미 여러분께 여러번 소개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돌아온 탕자에 촛점을 맞추어, 또 어떤 설교자는 기다리셨던 아버지의 사랑과 인내에 촛점을 맞추어 설교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이 탕자 비유에서 늘 잊혀져 왔던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들판에서 돌아온 큰 아들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는 들판에서 돌아 온 그 큰 아들을 위한 변명입니다.

저는 이 탕자의 비유를 읽고 묵상할 때마다, 들판에서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큰 아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을 자주해 봅니다. 제가 보기에 이 큰 아들은 성실하고 책임감있는 사람입니다. 동생이 자기 아버지의 유산을 일시불로 챙겨들고 집을 떠났지만, 그는 연로하신 아버지와 가업으로 내려오는 농장을 성실히 지켰습니다. 왜 큰 아들이라고 세상의 기쁨이, 물질이 주는 편리함을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그 큰 아들은 동생이 허랑방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들판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한 착한 큰 아들,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큰 아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염소 새끼" 한 마리 잡고 잔치 한번 벌려 보지 못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제 연로하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농장을 운영하며, 수 많은 가축들을 돌보고, 일꾼들을 다스리던 성실한 맏아들이었습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그 큰 아들은 들판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집에 가까이왔는데, 어디서 풍류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곧 집을 떠났던 동생이 돌아 왔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그 동생을 위하여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그 큰 아들이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큰 아들의 기분을 이해할 만 합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판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하고 돌아왔는데, 자기는 딴데 눈돌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성실히 살았는데, 자기한테는 잔치한번 베풀어 주시지 않던 아버지가 자기 동생을 위하여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려주다니! 나는 그 송아지를 잘 키워서 우리 농장의 재산으로 불리려고 했는데, 그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해? 그것도, 그 버르장머리 없고 무책임한 동생녀석을 위해서? 염치도 없는 녀석 같으니,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뻔뻔스럽게 돌아와서, 또 잔치를 벌려? 그럼 난 뭐야? 장남으로서의 책임을 지기위해, 농장과 연로하신 아버지를 돌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한 내 인생은 도대체 뭐야?

III.

저는 목사로써 가끔 황당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계기를 통해 소명을 받고 목사님이 되셔서 아주 특별한 방면의 목회를 하시는 분을 만날 때 그렇습니다. 갑자기 죽을 병이 걸려서 다 죽게 되었는데, 이 병만 낳게 해주시면, 목사가 되겠습니다라고 기도한 분이 나중에 목사가 되는 그런 경우입니다. 잘 나가던 사업가가, 한번 거래에 강남에 백평짜리 아파트 한 개를 사던 그 실력있는 재력가가 주님을 영접하고 목사가 된 이야기, 심지어 깡패짓을 하다가 교도소에서 회심하여 목사가 된 이야기, 그런 간증을 들을 때마다, 저는 가끔 황당함을 느낍니다. 저는 죽을 병에도 걸려 본 적도 없고, 강남에 백평짜리 아파트도 없고, 물론 교도소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아버지도 목사였고, 삼촌 두 분도 목사였기 때문에, 저는 그저 평범한 목사 집안의 큰아들이었습니다. 16살때 무척산 기도원에서 소명을 받고, 목사가 되기로 서원하였고, 지금까지 계속 이 길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그저 평범한 목회자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죽을 병에서 살아나서 목회자가 된 분들은 그 분을 보기만 해도 은혜가 넘칩니다. 재력가 출신의 목사님은 교회행정을 잘 하셔서 큰 교회를 개척하십니다. 교도소 깡패출신 목사님은 아주 박력있는 목회를 하십니다. 이런 분들에 비해서, 저는 그저 평범한 목사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렇게 특별한 계기로 목사님이 되신 분들의 간증을 들을 때, 한편으로 부럽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들판에서 돌아온 큰 아들의 모습에서, 저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거지차림으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 탕자입니까? 아니면 하루 하루 열심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하다가, 들판에서 돌아온 큰 아들입니까?

오늘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열심히 들판의 삶을 사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큰 아들의 분노가 혹시 여러분의 분노 아니십니까? 이 큰 아들의 질투가 바로 우리들의 질투가 아닙니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자신과 동생의 삶을 비교하면서, 질투를 느끼고, 분노를 느꼈던 그 큰 아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열심히 일하였지만, 그 가운데 기쁨이 없었던 큰 아들처럼, 우리도 하루 하루를 의무감과 책임감에서 살고 있지만, 사는 기쁨이 사라지고, 하루 하루를 그냥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장에서, 사업체에서 열심히 일하고, 꼬박 꼬박 Pay-check 받고, 한달 한달 Mortgage Payment 성실히 내고, 자식들 자라는 것에 희망을 걸어보지만,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고 있지만, 삶의 기쁨이 사라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나보다 더 큰 집을 가진 사람, 나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을 볼 때마다, 질투가 나고, 분노가 나고, 나는 지금까지 무엇하고 살았나, 자신에게 화를 내는 우리들 아닙니까?

내가 지고 있는 이 책임들, 부담감 다 떨쳐버리고, 나도 허랑방탕했던 그 탕자처럼, 막가는 삶을 한번 살아볼까, 그런 유혹은 없으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의 큰 아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왜 내게는 염소한마리 잡아서 친구들과 잔치한번 벌리게" 해주지 않았냐고 항의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잘못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주어진 일에만 정신없이 매달리다가, 잔치에 초대할 만한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어진 삶의 목표에 충실하기 위하여, 친구도 없이,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친구를 다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그래도 탕자 동생은 함께 놀수 있던 친구라도 있었지만, 큰 아들은 너무 성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너무 성실했기 때문에, 너무 평범했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져서, 한번도 유쾌하게 춤한번 춰본적 없었던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IV.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시는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큰 아들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탕자처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지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돌아가야 하지만, 저와 여러분 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먼길을 돌아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큰 아들처럼 평범한 우리들은 그렇게 멀리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인내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느니, 내 것이 다 네것이다."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데, 우리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에만 너무 집착하였습니다. 무엇이 삶의 우선 순위인지를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큰 아들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분노와 질투했던 지난 삶을 깊이 회개하면서,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큰 아들이 집 밖에서 불평하고 있을 때, 그 아버지는 한명씩 한명씩 아들들을 만나셨습니다. 넓은 사랑과 오랜 인내를 가졌던 그 아버지는 두 아들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는지,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버지의 넓은 품에는 전혀 다른 두 아들이 함께 안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비교하지 않으시는데,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남과 비교합니까? 왜 남보다 못한 우리 자신을 비하하고, 남을 질투하고 분노합니까?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큰 아들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같이, 평범하고 성실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속에 분노가 있고, 질투가 있고, 마음이 돌처럼 굳어진, 우리들도 이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온 동생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부자간의 눈물의 상봉을 보면서, 동생과 아버지의 뺨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면서, 언제까지 우리는 냉소의 눈초리로 바라보고만 있겠습니까?

우리 죄를 위해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형제 자매들의 애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까지 싸늘한 비판의 눈초리로 바라보고만 계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함께 그 넓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 바라보면서, 이번 사순절 기간,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실뿐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을 자세히 보십시오. 두 팔 넓게 펼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고난의 십자가 앞으로 가기만 하면, 예수님은 그 넓게 펼치신 두 팔로 우리를 꼭 안아 주실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그것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저와 함께 찬송가 471장,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찬송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돌아가기를 결단하십시다.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 우리를 위해 살 찢고 피 흘리신 예수님 앞에서, 고백하십시다. 주님, 나를 받아 주옵소서. 주님, 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