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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10.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여덟가지 성품(2)/사순절 넷째주일 - 장찬영 목사
애통하는 마음
마태복음 5:1-12
진짜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생각, 가치관, 삶의 모습 등 많은 부분에 있어서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우선적으로 달라야 하는 것은 바로 성품입니다.
당신은 오늘 그 두 번째 성품, 애통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도대체 애통한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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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백성 즉, 거듭난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갖추어야 할 요소는 새 사람으로 변화된 새로운 성품입니다. 우리는 세상 백성들과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 가치관, 삶의 모습 등 많은 부분에 있어서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우선적으로 달라야 하는 것은 성품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의 성품을 소유하지 않으면 훌륭한 생각과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것을 이행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어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백성,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여덟 가지 본질적인 성품이 어떤 것인가를 산상설교 맨 처음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크리스챤의 성품 중 첫 번째는 마음의 가난함에 있습니다. 이 가난하다는 말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주장할 것도, 아무 드릴 것도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상태입니다. 즉, 영혼이 가난한 사람이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이러한 사람이 갖는 두 번째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성경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5장 4절의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자기의 심령에 아무 것도 없다고 깨닫는 순간 이 사람이 실로 심각하게 느끼는 마음은 애통함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성품이었던 가난한 마음과 두 번째의 애통하는 마음은 동시적으로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기가 괜찮은 사람인 줄 알고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예컨대 머리가 좋다든지,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다든지, 남들이 갖지 않은 재능이 있다든지, 잘 생겼거나 예쁘다든지, 집안이 좋다든지 등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이러한 자부심과 긍지를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속으로 감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드러나고 안 드러나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습관이 되면, 사람 앞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어서 스스로가 이제 이만하면 내 삶은 성공했고, 이만하면 나는 이 정도의 부는 유지할 자격이 있고, 신앙적으로는 예수 믿을만한 자격이 있고, 이만하면 어떤 모임에서도, 그래서 교회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처해 있어야 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모든 위선의 껍질을 벗고, 또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던 환상의 세계에서 깨어납니다. 그때 그는 무서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어떤 한 순간에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자랑했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영혼 앞에서 이런 것들이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의 내면의 세계가 뜻밖에도 너무도 황폐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40대 이후, 50, 60대에 받는 충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인생의 모든 경우가 나이에 맞게 정확하게 오겠습니까? 한참 열심히 살고 돈을 벌 때는 잘 모르는데 어떤 위치에 이르고 어떤 성취감이 있을 때 그가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도대체 나는 인생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는 무엇을 남겼는가?', '내가 지금 시한부 인생으로 판명 받는다면, 아니 당장 죽는다면 과연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인생의 깊은 회의와 절망과 허무에 빠지는 충격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 그는 가슴을 치면서 오로지 자기 안에 있는 것은 죄와 허물뿐이고 기억하기 싫은 과거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조용히 내면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울어도 끝이 없고 옷을 찢고 마음을 찢어도 그 애통함이 끝이 없는 비참한 상태. . . . .성경은 이 상태를 애통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애통은 세상적인 애통과는 다르다고 하는 점입니다. 세상에서의 애통은 손해를 보거나 남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이유없이 피해 또는 고난을 당했을 때 겪는 아픔을 말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거나 헤어질 때 느끼는 몸부림치는 아픔도 있습니다. 혹은 배우자 때문에 자녀들 때문에 겪는 고통의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애통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은 영적인 애통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죄와 허물을 목격하면서 그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 죄의 결과는 심판이요,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음을 깨닫고 그로 인하여 몸부림치며 애통하는 것이 바로 성격에서 말하는 애통에 더 가까운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한 사람의 예를 사도 바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것은 세상에서의 애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고 싶어도 행할 능력이 없고 또 행하는 것마다 죄뿐인 자기를 발견하고 갈등을 느끼는 자신을 보며, 또는 원치 않는 죄에도 어쩔 수 없이 죄의 노예가 되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낼 것인가?"라고 하는 애통입니다.
(2) 둘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의 의미는 단순한 죄의 고백, 죄의 인정함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잘못된 것을 깨닫고 죄를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애통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동에서 서가 아니라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즘 현대인들은 죄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죄의 규범을 규정된 법에 걸리지만 않으면 죄가 아니라는 데 두고 있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죄짓고 그래서 대통령도 죄짓고 심지어 목사도, 신부까지도 죄짓는데 이 정도 가지고 무엇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느냐고 오히려 따지기도 합니다. 좀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구요. 이렇게 사람들은 죄를 하나의 본능으로 해석하고, 심리학적인 현상으로 혹은 이 세상은 죄를 안 짓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 아니냐고 스스로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나 크리스챤들의 생각도 이런 생각들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단에서는 설교자들이 죄에 대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듣기 싫어하고 교인수가 준다고, 죄의 문제를 좀 더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조심스럽고, 교양있게 다루어서야 한다는 안타까운 기사가 인터넷에 뜨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보다 사람들에게 들켰느냐 안 들켰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형무소에 가서 죄수복을 입고 있은 분들은 들킨 죄인이요, 여기 있는 사람은 안 들킨 죄인들일 뿐입니다. 안 들키면 영웅이요, 애국자요,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삶을 돌이켜보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생각을 하면 괴롭기 때문에 그 생각을 자꾸 하지 않으려 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않느냐고 변명하여 자기영혼에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하게 변명해 놓고 보니까 편안할까요? 양심의 갈등이 없을까요?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하나님 앞에서 이 죄의 본질을 깨닫고 자신의 죄성 때문에 가슴을 치면서 "어찌하면 좋을꼬" 라고 통회자복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을 위한 선교사였던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1740년 10월 18일자 일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의 아침기도 시간에 나는 나의 영혼이 녹아 내리는 것을 느꼈다. 내 속에 있는 사악함과 타락함을 목격하고 나는 깊이 울었다. 아 내가 주님의 자녀라니, 선교사라니. . ." 바로 이러한 애통함입니다. 또 다음과 같은 시편기자의 고백도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시 32"1-4)
'하나님의 손이 나를 누르니 내가 여름 가뭄의 마름같이 말랐고, 내 뼈가 녹아 내리는 아픔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인데 사람들은 이런 애통을 하면 살 수 없으니까 가능하면 안 느끼려고 술이나 마약, 또는 쾌락에 취해 잊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이것을 느끼는 사람, 그가 바로 애통하는 크리스챤입니다.
(3) 셋째로, 이 애통함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안에 있는 죄와 허물을 보고 고통하고 아파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까지도 자기의 죄로 알고 대신 애통하는 마음까지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이 사람은 이웃의 죄와 허물이 바로 자신의 죄와 허물이라고 생각하고 대신 아파하고 대신 눈물을 흘리며 대신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모습이 시편 119편 13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 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요즘 세상에는 특별히 고발자가 많아졌습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똑똑하고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나는 잘못과 허물이 없는데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다 너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당신 때문에 정치가 나빠졌고, 당신 때문에 사회가 혼란해 졌고, 당신 때문에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고, 그리고 당신 때문에 교회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 때문'이라는 소리는 참 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 반대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 41절,44절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면서 우셨고, 요한복음 11장 35절에서는 나사로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으실 때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이란, 내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허물과 죄악, 이 민족의 죄악, 이 나라의 죄악, 교회의 죄악, 또한 가정의 모든 죄악이 내가 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그 죄악을 같이 짊어져야 한다는 애통함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예수님의 원리는 타락한 오늘의 사회를 개혁하고 부정의 뿌리를 뽑으려고 하는 개혁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나약하고 대단히 미온적이고 심지어 어리석은 방법으로 느껴질지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강해져야 하고 지배해야 하고 적극적이며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보다는 인간의 이상의 실현과 자아의 실현을 최고로 생각하며 이러한 성취를 위해서는 심지어 투쟁도, 폭력도, 자신이하고 있는 모든 과정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그들은 또 자신이 남에게 저지르는 실수는 정당화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저지르는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를 갖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당신이 하면 스캔들이고, 내가 저축하면 근면한 것이요 당신이 저축하면 부정축재이고, 내가 자녀를 사랑하면 부모의 도리요, 당신이 자녀를 사랑하면 과잉보호이고, 내가 출세하면 인간승리이고, 당신이 출세하면 줄을 잘 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그리고 진정으로 애통하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며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소금이요 빛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렇게 애통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위로가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참 위로인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4)
"이는 보좌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 이러라" (계 7:17)
위로란 단순한 위안이 아닙니다. 사람의 위로는 그냥 안위해 주는 것뿐이나 하나님의 위로는 단순히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힘이 되어 주고, 용기가 되어주고, 지혜가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도록 까지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약한 사람뿐만 아니라 강한 사람에게도 위로가 필요하고 심지어는 항상 남을 잘 위로해 주는 사람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강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위로를 거부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목사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나 다 위로 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격려 받고 싶어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기 원합니다. 그 위로를 받으면 우리는 안심하고 세상에 나가서 고난을 겪을 수도 있으며 애통의 눈물을 흘려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아침 여러분에게 진정 애통하는 자의 모습을 가지고 살았던 한 분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진정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애통하고 눈물을 흘리고 끝까지 참으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와 죽음에 얽매여 살고 있고, 사단에 얽매여 있고, 병에 얽매여 있고, 물질과 쾌락에 얽매여 살고 있는 우리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시며 애통하는 심정을 가지고 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여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묵상하면서 오늘 이 아침 애통하는 마음을 사모하십시다. 아니 때로 애통할 수 없는 마음을 애통해 하십시다. 울고 싶어도 울어지지 않는 마음을 슬퍼하십시다. 가슴은 차디차졌고 모든 것에 대해서 냉소적이요 비판적이 되어버린 우리의 가슴을 주님께 고백하며 애통해 하십시다.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했던 마음을 주님께 내려놓고 슬퍼하십시다. 오늘날 하나님의 권위를 잃어버린 교회의 허물과 죄악을 보면서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부정부패와 거짓이 판을 치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애통의 눈물을 아끼지 마십시다. 주님, 이 아침 저희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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