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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17. 사순절 첫째주일 - 조영진 목사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요한복음 5:10-18
하나님은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그분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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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에게서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인생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만을 믿고 살아오던 분들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새로운 삶의 감격을 누리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또 역경과 고난,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믿음으로 躈躈히 견디어 가는 모습을 볼 때는 복음의 능력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반면에 목회의 길에서 느끼는 가장 큰 frustration, 좌절과 고뇌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 문턱을 출입하면서도 믿음 안에서 임하는 변화와 생명을 맛보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아직도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고, 자신을 믿고 살아가는 고집을 꺾지 못하는 분들을 뵙게 될 때입니다.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될 때입니다.
요즈음 저는 우리 주님을 향해 그 어느 때보다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주차장이 심각한 문제가 될 정도로 교회가 자라는 것 감사드립니다. 교육시설이 모자라 대안을 모색하는 시점에 이른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최근 들어서 처음 교회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들을 더욱 많이 뵙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저희 교회에 나오시면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가까이 나아오시는 모습을 뵙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자취를 보게 될 때,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의 감사와 눈물 앞에서 저도 감사와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를, 우리 교우들을 생명을 살리는 이 일에 써주시는 그 은혜가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I.
성경의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도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하나의 사상이나 이념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상과 지식을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신 분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담겨지는 지식이나 사상의 일부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I & It, 나와 그것, 지식과의 관계이지, I & Thou, 나와 당신과의 관계라는 인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토의하고, 논의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심을 갖고 서 본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저 높은 곳, 천국에 앉아 계시기만 하는 정적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이 우주에 법칙을 정하셔서 돌아가게 하시고는, 당신은 팔짱을 끼고 수수방관 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삶에는 관심이 없으시고 홀로 거룩하시고, 고고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하나님은 사실 있으나마나한 하나님이십니다. 계셔도 그만, 안 계셔도 그만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과 역사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왜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어떤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일하시는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에집트 땅에서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내려오셔서 건져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 안에서,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상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 계신 정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그분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들 속에 오셔서, 이 세상 역사 속에 오셔서, 오늘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II.
오늘 봉독해 드린 요한복음서 5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38년이라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대부분의 세월을 병으로 고통하면서 살아왔을 지 모릅니다. 그는 연못의 물이 동할 때 뛰어 들어 고침 받고자 하는 가냘픈 희망을 안고 베데스다 못가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희망마저도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물이 동해도 먼저 자신을 넣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절망 속에 있던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고쳐 주셨습니다. 그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자리를 들고 아주 오랜만에 제발로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걸어간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기에 문제가 터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문제를 걸고 넘어졌습니다. 첫째는 안식일에 만성병 환자는 고칠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38년을 앓아온 이 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안식일에 공공장소에서 개인집으로 물건을 옮길 수 없는데, 고침 받은 이 병자는 바로 자기가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일어나, 이 자리를 자기 집으로 옮긴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겼다는 논란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기에, 예수님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일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일하셨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는 계속적인 창조 혹은 섭리의 역사, 돌보심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고는 손을 떼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돌보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 속에, 오고 계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역사는 바로 생명을 살리는 역사였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였습니다. 요한1서 4:9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생명을 살리는 역사라고 말할 때, 우리는 솟아오르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려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하나님 안 믿어도 살아있는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을 살리신다는 말씀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죽은 것이라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에 육체적인 생명은 살아있을지 모르지만, 그 영적인 생명은 죽은 것이라고.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도 성령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를 살리는 역사를 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적인 인생의 모습을 되찾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찾은 그의 자녀들을 통하여 이 세상을, 이 역사를 변혁시켜 가시려고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 인생들이 함께 손잡고 서로를 감싸주는 세상, 서로 붙들어 주며 짐을 나누어 지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성 프랜시스(St. Francis)의 기도처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기 위하여 우리를 쓰고 계십니다.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쓰셔서 세상을 살리는 역사를 이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인생들을 살리고 이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그의 자녀가 된 우리들과 함께 역사를 살리는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III.
여러분, 이 아침 하나님께서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살리는 역사를 행하고 계시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도전의 멧세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이 사실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이 시간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앉아 있다고 하는 깨달음과 두려움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도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꿈나라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이 깨달음, 이 경외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각성을 Rudolph Otto같은 사람은 놀라운 신비 앞에 압도되어지는 느낌, 경외감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거룩한 현존 앞에서 자신의 피조물 됨, 유한함을 깨닫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지식이나 사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경험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체험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저 자신도 이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교회 목사님의 충고에 따라 매일 기도하고 성경읽는 삶을 시작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출애굽기의 홍해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읽게 되었는데, 그 말씀이 저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홍해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오늘도 살아 계신 것이 분명한데, 그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지금 어떠한가? 지금 내가 홍해바다를 가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있다는 깨달음이 오면서,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혔던 경험이 지금도 제 가슴 속에 살아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 아침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그분 앞에 앉아 있습니다.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이 의식, 이 깨달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2) 둘째로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에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인생과 역사를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친구를 통하여, 혹은 아내를 통하여, 혹은 부모님을 통하여 부르고 계십니다. 혹은 고난을 통하여, 혹은 실패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 아침도 선포되는 이 말씀을 통하여 혹은 우리가 읽는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통로는 다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살리려고 하십니다. 역사를 새롭게 변혁시켜 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이 부르심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부르심을 귀중히 여기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거부하면서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아의 껍질 안에 있으면 안전하게 느껴지지만, 이 자아의 껍질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와 나를 차단하는 벽입니다. 자아의 껍질이 깨어지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은 결코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는 이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셋째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 믿음생활에 변화를 주시라고, 나를 살려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믿음이 지지부진한 것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두려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한분 한분은 오늘 이 세상 속에서 엘리트가 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믿음의 엘리트가 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십니까? 가장 중요한 참 사람 되는 일, 이 일을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세상에서도 뛰어난 엘리트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엘리트가 되는 이 일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 세상에 개방하는 최선의 통로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살리는 역사를 행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십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를 체험하시고 오늘 세례를 받으신 한 분의 고백을 들으시겠습니다. 이분은 3년 전 이곳 워싱톤에 오셔서 주미 한국대사관에 근무해오신 허철 교우이십니다.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모른 것이 아니라 거부했습니다. 중3때 처음 교회에 나가서, 고등부때는 학생회 간부와 성가대장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는 거리가 먼 과외활동일 뿐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세례를 받으라고 하시면 저는 세례식 질문에 '예' 하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교양강좌 듣듯이 교회를 들락날락 했습니다. 혹시 심방이라도 올까봐, 등록하지 않아도 눈에 안 띄는 큰 교회만 다녔습니다.
그 동안 성경은 계속 읽었습니다. 성경을 알기 때문에 기독교를 알고, 하나님에 대해 알만 한 것은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과 불신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교회를 드나들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믿겨지지 않는다고만 고백하는 악성 불신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부활을 정말 믿느냐? 믿는다면 나도 믿을 수 있도록 설명해 보라'고 따져서 당황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3년 전 주미 대사관에 부임하였고, 집사람은 혼자 교회에 다니다가 2년 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만은 저희 결혼기념일이기도 해서, 아들까지 데리고 와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그 동안 집사람이 매일 제 있는 자리를 피해서 기도하는 것을 알았으며, 그 기도의 첫 제목이 저에 관한 것일 거라고 짐작은 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얼마 지나서 교회에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제 심령이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은 읽어도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 같았고, 그렇다고 성경을 내려놓을 용기도 없었습니다.
30년이 넘도록 저는 그렇게 울타리 너머로 남의 집 구경하듯이 하나님 나라를 구경만 해 왔습니다. '저 집주인이 사람이 좋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일까? 아니, 주인이 살아 있기는 한가? 있다면 나한테도 잘 해 줄 건가?' 하는 의문만 가졌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없는 걸로 해야 한다고, 인적사항을 쓸 때 종교 난에는 항상 '무'라고 썼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저를 줄곧 지켜보고 참으셨습니다.
작년 어느 날 밤늦게 퇴근길에 66번 도로를 달리며, 여느 때와 같이 성경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부분을 듣다가,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혹시 지금 나와 같이 이 차안에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까닭 모를 눈물이 눈에 고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생각을 지우려 했습니다. 안전 운행에 방해가 되는 눈물도 재빨리 닦았습니다. 마치 아버지를 다시 찾은 고아가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나한테는 아버지가 없다"하고 도망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저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석달 전 어느 날, 집사람이 새벽기도를 가고 나서였습니다. 잠이 안 와서 시편을 두편 읽고, 고린도전서 12:3에 관한 설교문을 읽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저에게 찾아 오셔서, '성령이 너에게 임해 있고, 너는 나를 믿고 있다.'고 타일러 주셨습니다. 귀로 주님의 음성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 손길은 저를 당신의 아들로 인정하는 증서와도 같이 확실했습니다. 저같이 고질적인 불신자는 이렇게 직접 가르쳐 주지 않으면 평생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이겠죠.
저를 보고 이제는 그만 몸부림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저도 모르게 기도가 흘러 나왔습니다. 기적과 같은 은혜의 손길을 베푸신 데 감사하고, 하나님을 계속 부인한 데 대해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에 있는 두 아들도 예수님을 영접하므로써 우리 네 식구가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저의 세상 자랑을 일시에 무너뜨린, 저의 논리와 이성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평생 못 믿을 줄 알았습니다. 제가 집사람과 같이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서 집사람이 '당신도 세례를 받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냥 '욕심이 과하다'하고 일축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못 믿은 게 아니라, 믿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 뜻대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길인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늦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도, 제가 하나님을 더 이상 버리지 못하도록 그분이 계획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은 사람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다 보면 그 해답을 알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틀 후 한국으로 떠납니다. 제가 믿기 시작한 땅에서 세례도 못 받고 갈 뻔 했으나 목사님의 안식년 덕분에 막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다행이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너무 늦게 믿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역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속회에서 믿음의 교제를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희 내외는 와싱톤에서 새 생명을 가지고 떠납니다. 와싱톤은 생명의 고향이 되고, 와싱톤 한인교회는 우리가 새로 태어난 산실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에게 권면해 주신 목사님과 여러 성도님들께 감사드리고, 우리가 여러분을 만나도록 계획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장래에 다시 찾아와서 여기서 여러분과 같이 예배 드릴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오늘도 생명을, 역사를 살리는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에, 오늘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나를 살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허철 교우 가정에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우리 모두는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이 시간도, 살아 계십니다.
* 적용과 나눔을 위한 물음
1.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함께 나누십시다.
2.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내 삶 속에서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3. 하나님 체험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지식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자라갈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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