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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7. 워싱톤서(33)/권사취임예배 - 조영진 목사

이름을 남깁니다

로마서 16:1-16

사람은 이름을 남깁니다. 그러나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 속에 담겨지는 삶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어떤 내용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로마서 연속설교도 이제 종점에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다음 주일에 로마서 16장 17절 이하의 말씀을 드리면, 작년 1월 첫 주일부터 시작된 금번 연속설교도 막을 내리게 되겠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름 석자를 사람들이 알아주고, 기억해 주기를 원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높은 산 바위 위에 자기 이름을 새겨 놓기도 하고, 무덤의 비석을 크게 세워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름 석자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 석자가 담게되는 인생의 내용입니다. 아무개라고 그 이름을 부르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 떠오르는 그 사람의 사람됨이, 또는 그의 살아간 모습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름은 부를 때 참으로 그립고 존경스러운 이름이 있는가 하면, 어느 이름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무덤의 비문을 남아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리교 운동을 이끄셨던 John Wesley 목사님의 묘비에는 세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꾼을 부르시지만, 그의 일은 이어가신다." 그리고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아주 귀한 삶의 자취였고, 그의 삶을 보여주는 멋진 비문들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를 읽다가 보니, 이런 비문도 소개하고 계셨습니다: "참 말많던 내 아내 드디어 입을 다물다." 또 이런 비문도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내 아내 여기에 잠들다. 제발 내 아내를 깨우지 말아다오."

I.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6:1-16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끝내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부탁과 함께 문안의 인사를 전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27명 정도가 되는데, 그 중에는 여자도 9명 정도 포함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들은 모두가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비록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그 모든 표현 속에는 함께 손잡고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성도들을 향한 사랑과 든든함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자매,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는 뵈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이굴라, 나의 사랑하는 예배네도, 나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 주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볼리아,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 등등, 짧은 소개의 글입니다만, 사도 바울은 이 귀한 동역자들에게 문안의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브리스가와 이굴라 그리고 바울의 친척같은 유대인들도 있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상당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사회적인 지위면에서 보아도 다양성이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암블리아, 우르바노, 허메, 빌를로고 등은 당시 노예의 이름으로 많이 쓰여진 이름들이었고, 또 아리스토불로와 나깃수의 권속들은 당시에 왕족 혹은 상류층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 명단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와 그의 어머니도 등장합니다. 어쨌든 다양한 종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로마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로마교회는 이 다양성 속에서도 건강한 하나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귀한 이름들이었습니다. 모두가 귀한 이름을 남겼습니다. 모두가 그들의 이름 속에 신실한 그리스도의 동역자의 삶을 남겨 놓았습니다.

II.

그렇다면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부딪쳐오는 도전의 멧세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이름 속에 아름다운 삶을 담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이름 속에 아름다운 삶을 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인생이 가치 있는 삶입니까?

이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제게 기억되는 설교가 있습니다. 이 설교는 Martin Luther King 목사님의 설교집 속에서 읽은 것인데, 요한계시록 21:16의 말씀을 중심으로 "완전한 생명의 세 차원"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신 것입니다. King 목사님은 우리의 삶이 온전해지려면, 적어도 세 가지 차원이 발전이 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첫째는 길이의 차원입니다. 길이의 차원이란 자신을 위한 삶의 영역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재능을 최선을 다해서 개발함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롱펠로우의 이야기처럼 위인이 도달한 높은 봉우리는 돌연히 비약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잠들었을 때 그 높은 봉우리를 향하여 밤새 노력함으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독특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능력과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게으름으로 이 귀한 달란트를 파묻어 두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짖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자기 자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참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길이의 차원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최선의 그릇이 되면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King 목사님은 거리의 청소부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리의 청소부로 부름 받았다면 그는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고,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고,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쓰듯이 거리를 청소해야 한다고.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길이의 차원, 내 자신을 위한 삶의 영역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데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존재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그러나 우리의 이름 속에 담겨질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은 길이만 가지고는 불충분합니다. 둘째 영역이 발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넓이의 차원입니다. 넓이란 남을 위한 삶, 이웃을 위한 삶을 뜻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자신을 위한 삶, 길이를 넘어서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길이만 있는 인생이란 자기 발전에 성공했을 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이웃과 사회에 공헌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삶입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 존경받는 삶의 모습은 바로 그 인생이 지니는 넓이, 폭에서 결정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나 혼자만을 위한 삶이란 실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함께 나누며, 함께 돕는 삶이란 자연적인 것이고 또 마땅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점점 인생의 넓이, 이웃을 위한 사랑과 관심의 폭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마지막 자리에서 주님께서 판단하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풀었는가? 바로 그 기준이 아닙니까?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얼마나 유명했었는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었는가? 주님은 이 질문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많이 나누었는가? 얼마나 이웃을 가슴에 품는 넓은 폭을 지니고 살았는가? 이것이 주님의 관심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판단하시는 기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같이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위해 함께 섬겨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을 나누고 관심을 나누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때의 감동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 그냥 있기에는 너무 안되어서, 또 저희 아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어서 저는 인도 대사관을 방문, 추모의 글을 쓰고 애도의 뜻을 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문을 마치고 나오니까, 밖에도 꽃다발이 많이 놓여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She saved my life. (테레사 수녀는 내 삶을 건져 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 청년은 어렸을 때 인도에서 고아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기관의 도움을 받아서 미국 어느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그는 양부모 밑에서 공부하면서 이제는 미국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펼쳐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테레사 수녀의 넓이가 품은 한 생명의 모습, 그 넓이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깊이 느껴 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 속에 가치 있는 삶을 담기를 원하십니까?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원하십니까? 넓이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폭, 이웃을 위한 삶의 차원을 넓혀 가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가치 있는 삶의 길이 있습니다. 뜻있는 인생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3) 그러나 우리 인생은 길이와 넓이만으로는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한가지 더욱 중요한 인생의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높이의 차원입니다. 인생의 높이란 하나님을 위한 삶을 뜻합니다.

여러분, 길이와 넓이만 있으면, 훌륭한 인도주의자(Humanist)가 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두 차원만으로는 우리의 인생이 바로,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결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게, 뜻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종교에 관심있는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 내 주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natural)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큰 어려움이 없이 모든 일이 잘 되어가면, 하나님은 거추장스러운 분으로까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온전한 삶입니까? 이런 인생에서 나타나는 것이 영적인 갈증, 무의미함을 느끼는 공허함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만족,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맛보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로 대리만족을 찾아보지만, 결코 충족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 앞에서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인생의 고아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생의 높이의 차원은 길이와 넓이의 차원에도 깊은 영향을 줍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의 길이와 넓이를 최대한 발전시켜 갈 수 있습니까? 그 길은 바로 높이의 차원에 달려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우리는 그만큼 길게 또 넓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보신 분은 모두가 이같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높이 떠서 가기 때문에 우리는 그만큼 길게, 멀리 내다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넓게, 많이 내다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의 영역에서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만큼 내 인생의 길이, 내 자신의 능력은 최대한 개발될 수 있습니다. 내 능력이 다섯밖에 안된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함께 하시면 나의 능력은 열도, 스물도 될 수 있습니다. 무능한 사람도 하나님을 믿게되면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우리의 지혜,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사람들은 바로 높이 오르므로 길이를 넓혀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넓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만큼 우리는 이웃을 폭넓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사랑하는데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폭을 간직하게 됩니다. 어떻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 넓은 폭, 그 넓이에 어떻게 이를 수가 있습니까? 내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 능력만으로는 분명한 한계를 갖습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하나님께 그만큼 더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만큼 넓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는 넓이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 높이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름 속에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담기를 원하십니까? 높이를 가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이 빈약하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가치 있는 삶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귀천을 불문하고, 높이를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에 넉넉하고 부유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 이름 속에 아름다운 삶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몇 단어 밖에 안되는 짧은 소개의 문장이었지만, 그 이름 속에 아름다운 삶의 내용을 남기고 갔습니다.

III.

오늘 우리는 다섯 분의 권사님을 새롭게 세웁니다. 오늘 취임하시는 권사님들, 여러분의 이름이 오늘까지 어떤 삶을 담아왔습니까? 이제 여러분의 이름에 어떤 삶을 담아 가실 것입니까?

비록 거창하지 않아도 신실한 그리스도의 동역자의 삶을 담아 가시기 바랍니다. 길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를 넓혀 가시고 발전시켜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이름을 아름다운 삶으로 가득 가득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길이를 발전시켜 가는데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속원들과 이웃을 향한 넓이, 사랑의 폭을 넓혀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높이, 하나님을 위한 삶, 높이의 차원에 더욱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취임하시는 권사님들 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 경주가 끝나는 날, 우리의 이름 속에 남아있게 될 그 삶에 신경 좀 쓰시기 바랍니다. 염려 좀 하시기 바랍니다.

작년 1월 저희 교회에 오셔서 말씀해 주셨던 정태기 교수님의 말씀 속에서 기억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자라나신 섬마을에 시집을 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아기를 낳지 못하게 되자, 이 여인은 결국 소박을 맞고 시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수치와 절망 속에서 자살을 계획한 이 여인은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 올라와 죽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유명한 한강 다리에서 뛰어 내리려고 했는데, 대낮이라 사람들이 많아서 자살할 수가 없어 밤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밤이 되어 다시 한강에 나아와서 자살을 하려는데 가까운데서 손뼉을 치면서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비관해서 죽으려고 하는데, 저 사람들은 뭐가 좋아서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를까? 죽기 전에 구경이나 해보고 죽자고 이 여인은 생각하고 찾아가 보니 바로 교회였습니다. 이 여인은 들어가지도 못한 채, 교회 문가에 앉아서 찬송소리를 듣고 또 이성봉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 목사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외치셨습니다. 낙심하고 실망한 사람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애기 못나아 소박맞고 쫓겨난 사람도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병들고 가난한 사람도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걱정과 근심에 쌓인 사람도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여인은 그날 거기서 이 부르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흥회가 끝난 후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강사 목사님은 이상한 소리에 교회 문밖에 나가 보았습니다. 한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누군디, 예수가 누군디 ..." 이 여인의 사정을 다들은 이성봉 목사님은 당신께서 섬기시던 목포의 교회로 데리고 가서 2년 동안 신앙의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고향인 섬마을로 보냈습니다. 섬마을로 돌아온 이 여인은 시댁의 양해를 얻은 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 찬송을 해서 사람이 모이면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을 외쳤습니다.

이렇게해서 정태기 교수님의 고향 섬마을에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의 전도를 통해서 그 섬마을에서만도 60명 가까운 목사들이 배출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신 성결교회 이만신 목사님, 한국 켐퍼스선교의 대부이신 김준곤 목사님, 한국신학대학 학장이신 고재식 목사님, 또 정태기 교수님도 그 섬마을이 배출한 목회자 속에 포함되신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도 이름을 남기고 갈 것입니다. 어떤 이름을 남기고 가실 것입니까? 아니 우리 이름 속에 어떤 삶을 남기고 가실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동역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길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가 크게 뻗어가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어떤 이름을 남기고 가시겠습니까?

*적용과 나눔을 위한 물음

1. 나는 내 인생의 묘비에 어떤 글이 새겨지기를 원합니까? 내 이름 속에 어떤 삶이 담겨지기를 원합니까?

2. 오늘 내 인생은 길이와 넓이, 높이가 잘 뻗어가고 있습니까? 내 삶 속에서 특별히 약한 차원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고쳐 가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