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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6. 워싱톤서(31) - 조영진 목사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로마서 15:1-13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 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인생이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 가기를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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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생활을 하다가 보면 교회 안에서 종종 듣게되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 누구는 참 믿음이 좋다. 그분은 참으로 좋은 믿음을 지니고 있다. 또 아무개는 믿음이 없다. 이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믿음이 많고 적은지를 판단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에서 믿음이 좋고 나쁜지를 말합니까? 무엇을 보고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압니까?
어떤 분들은 이같은 말이나 판단에 대하여 아주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믿음이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남이 있다 없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 속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믿음이 많고 적음을 알 수 있는가고 되묻습니다. 어떻게 보면 옳은 주장입니다. 믿음의 많고 적음은 인간이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 대하여 우리는 100%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이론이나 이념을 넘어섭니다. 한사람이 갖고있는 내적인 사상도 넘어섭니다. 믿음은 삶입니다. 사람은 그가 믿는대로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서, 그분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을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교우 여러분께서는 믿음이 좋은 사람의 모습을 어떤 기준 위에서 말하십니까? 믿음 좋은 사람은 무엇이, 어떻게 다릅니까? 무엇을 보면 그분의 믿음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아침 믿음 좋은 모습을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 더 넓게, 일반적인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면, 인간 관계 속에서 보고 싶습니다. 그분이 다른 교우를, 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 나가는지, 어떤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면 믿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같은 주장에 대하여 반론을 펴시는 분들은 많으실 것입니다. 나는 내성적이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는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 성격 탓이지 내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음의 모습이 인간관계 속에서 표출된다는 이 주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I.
오늘 봉독해 드린 로마서 15:1-13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말씀, 14장의 말씀과 연결되어 지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렸습니까? 14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다름 속에서도"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들에게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영역이 있으며, 이같은 영역에서 교우들간에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이 다름을 어떻게 포용하며 믿음생활을 할 것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다르다는 사실이 잘못되었다는 단정으로 비약하든지, 다르다는 사실에 집착해서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려서는 안된다는 멧세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함께 살아가는 근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인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할 때, 제게 다가온 열쇠가 되는 말씀(Key Word)은 15:5 말씀 가운데 " .....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감리교 교리적 선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십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그리스도에게 까지 이르도록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518장 "Lord, I want to be a Christian(신자되기 원합니다)"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범이 되시고 우리의 스승이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서셔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II.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십시다. 교우 여러분,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물음에 대하여 어떤 해답을 주고 있습니까? 특별히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입니까?
(1)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란 연약한 사람의 약점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15:1의 말씀을 보십시다: "우리 강한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강한 사람은 너는 왜 그렇게 약하냐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 여기까지 이르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의 자리까지 내려 가라고 권고합니다. 그의 약한 점을 받아드릴 뿐 아니라, 그짐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빌립보서 2:5 이하의 말씀은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근본이 하나님과 같은 본체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 이 특권을 포기하시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거기에서 또 낮추셨습니다. 태어나실 때도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또 더 낮추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가장 낮고 가장 천한자리,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그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자신을 비우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감사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두분이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없는데도 교회 안에서 서로가 두터운 교제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학력을 비교해 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경력을 비교해 봐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조건이 어울리지 않지만, 그런데도 아름다운 사귐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게될 때는 정말 보는 저 자신도 기쁨이 충만해짐을 느낍니다. 끼리 끼리, 비슷한 배경, 비슷한 조건 안에서, 편안한 사귐을 추구하는 현대의 물결 속에서 이를 거슬러 올라가는 파격의 모습은 참으로 좋은 믿음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강한 사람, 힘이 있는 사람,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낮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약한 사람을 탓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그 연약함을 함께 짊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이같은 사랑의 모습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는 공부 많이 하신 분들이 많은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학위가 없으면 명함도 못내민다느니, 차가운 교회라느니, 변변한 배경이 없으면 알아주지도 않는다느니 같은 풍문이 제법 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우들이 저희 교회의 문을 두드리신 후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문과는 다르네요."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차분하고 문턱이 높지 않은 교회임을 체험하시게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계속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함께 스스로를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낮아지고 있다는 이 사실은 참으로 고무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파격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높아지려고 경쟁하지만, 우리는 낮아지려고 경쟁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2)둘째로, 그러기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 가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였던 본 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A man for others(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만족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 중심의 삶, 다른 사람의 기쁨과 만족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15:2에서 권면하고 있는 " ...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는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더 많이, 더 많이 하면서 자신의 만족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불만족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많이 자신을 비우며, 이웃을 위해서 더 많이 주는 사람은 더 큰 보람과 진정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많이 붙잡고 있어야 안전할 것 같지만, 안전은 쌓아 놓은데서 오지 않습니다.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비울 때 오히려 안전은 보장됩니다.
타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란 자신의 주관을 잃어버린 삶이 아닙니다.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의식 그리고 믿음이 있기에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셨던 삶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삶입니다.
(3)세번째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삶은 하나됨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15:5,6의 말씀을 보십시다: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한마음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표준새번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갈라지고 깨어진 이땅의 인류들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역사를 이룩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열을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넘어서게 하셨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열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고치셨습니다. 할례받은 사람의 종이 되심으로 그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확실히 증거하셨을 뿐아니라,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역사가 간직해 온 수많은 분열과 갈등을 고치시고 하나되게 하는 역사를 이룩해 오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흑인과 백인의 분리도 고쳐주셨습니다.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벽도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출신 지역의 차이, 남자와 여자, 나이의 많고 적음, 출생 성분의 차이, 이 모든 분열의 벽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설 땅을 잃어버려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됨의 역사를 창조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우리는 이 하나됨의 역사를 이어가야 합니다.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함께 손잡게 하는 역사를 이룩해 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split makers, 분열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peace makers,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평화를 가져오고 하나됨을 가져오는 사람들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이 사명에 투철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됨을 이룩하는 일에 전심 전력해야 합니다.
III.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스승이시며 길이십니다. 그 분을 통하여 우리는 성숙한 믿음의 삶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교회의 교회됨,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임원들이 헌신하는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일꾼, 집사님들을 임명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헌신하시렵니까? 어떻게 섬기시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를 낮추셔서 약한 사람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내 중심이 아닌 다른 사람 중심의 삶을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됨을 지켜가시기 바랍니다.
이 길을 통하여 우리 교회는 진정한 공동체성, 우리됨을 세워 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의 모임과는 다른 모습을 갖도록 세워 주신 교회됨의 모습을, 교우들간의 아름다운 사귐을 새롭게 세워가게 될 것입니다.
작년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월드시리즈가 끝난 후 이태일 이란 기자가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마음 한구석 뭉클케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이 글은 Diamondbacks의 김병현 투수에 관한 내용입니다. 김병현 투수는 정말 우리 모두에게 안타까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월드시리즈 4,5차전에서 연장전과 9회말에 홈런을 맞아서 졌을 때, 얼마나 안타깝든지 저도 한동안 잠이 잘오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김병현 선수는 팀내에서 잠 많이 자는 선수로 소문이 났었다고 합니다. 라커룸에서 안보일 때는 대개 한구석에서 잠자고 있었고, 버스에 타면 늘 잠을 잤다고 합니다. 기자는 썼습니다. 왜 김병현 선수가 잠을 많이 잤을까? 22세의 젊은 나이에 낯선 땅에 와서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 그는 그저 눈 붙이고 잠을 청했다고 합니다. 말없이 혼자 앉아 있느니,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번 월드시리즈를 통해서 이제 김병현은 잠을 깰 때가 되었다고 기자는 썼습니다. 왜 입니까? 금번 월드시리즈를 통해서 김병현은 더 이상 외로운 존재가 아님이 분명하게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김병현 선수가 4,5차전에서 팀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을 때, 그의 동료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김병현 선수를 감쌌습니다. 밥 브랜리 감독도 "그는 우리팀의 마무리 투수이다. 다시 그런 상황이 또 돌아 온다면 그 몫은 BK것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고 BK를 격려했습니다. 그가 홈런을 맞고 주저 앉았을 때, 그를 일으켜 세워준 마크 그레이스와 catcher 로드 바라하스, 마지막 7차전에서 "오늘 승리는 김병현을 위한 것(This win is for Kim)" 이라는 격문을 들고 나온 팬, 또 "We'll Be oK, Kim(우리는 괜찮아)"라고 성원을 보낸 팬들의 모습은 22살의 젊은 김병현 선수에게 너무나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7차전을 앞두고 김병현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까지 야구를 혼자 해왔다. 내가 투수였기 때문에 더 심했다. 나만 잘하면 모든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 시리즈를 통하여 나와 동료들이 가족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이겨도 '우리'가 이기는 것이고, 져도 '우리'가 지는 것이다." 이 칼럼은 제목을 "'우리'를 깨달은 김병현" 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실수에도 선수들은, 팬들은 김병현을 용납하고 격려했습니다. 프로야구팀도 이렇게 붙들어 주고 격려하는데 오늘의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 안에, 내 안에 과연 "우리됨"이 살아 있습니까?
* 적용과 나눔을 위한 물음
1.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삶을 나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습니까?
2. "타인을 위한 삶"이란 과연 가능한 것입니까? 어떻게 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3.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살아가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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