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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30. 워싱톤서(30) - 조영진 목사

다름 속에서도

로마서 14:1-23

다사다난했던 2001년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50주년을 맞는 금년 한해동안 저는 "워싱톤서"라는 제목 밑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를 통하여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멧세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금년 첫 주일을 로마서와 함께 시작했었는데, 마지막 주일도 로마서의 말씀으로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서른 번째를 맞는 금번 연속설교는 내년에 네 번 더 드림으로 끝을 맺게 되겠습니다.

오래 전 신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구약을 가르치시는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 가운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는 교단정화니 사회정의니 해서 한참 데모할 때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확신은 대단히 귀하고 중요하지만, 그 확신이 닫히지 않도록 하라고, 열려있는 확신의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닫힌 확신은 자기만이 옳다는 독선에 빠지기 쉬우며, 성숙의 길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 교수님의 말씀은 30년이 지난 오늘도 제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겪는 가장 큰 아픔 가운데 하나는 빈번한 분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같은 분열은 목회자는 물론 평신도들의 가슴속에 깊은 아픔과 상처를 안겨주고, 또 교회가 교회되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한인교회에 건물을 빌려주는 미국 연합 감리교회 목사님들도 가끔 한인교회의 분열을 말하는 데, 이럴 때는 할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분열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큰 문제보다는 사소한 문제들이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내용 때문에 갈라서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절차상의 문제, 혹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크지 않는 문제들이 교회에 분열을 낳고 있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르면서도 하나됨을 지켜간다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I.

오늘 집사님께서 봉독해 주신 로마서 14장의 말씀을 살펴보면, 로마에 있던 교회 안에도 이같은 문제들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두 가지 이슈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음식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절기와 날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로마교회 안에는 유대교의 율법과 규례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고, 또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당시 시중에 나오는 고기의 대부분은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지낸 후, 판매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신,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그들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또 어떤 고기가 바쳐졌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채식주의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과 각종 절기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사람들을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반면에 또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자유함을 얻었으므로, 음식에 관한 규례나 안식일 혹은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거나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로마교회 안에는 두 그룹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강한 사람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반면에 연약한 사람들은 모든 율법과 규례로부터 자유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한 교회안에서 한 주님을 섬기지만,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비판하고 또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 이같은 문제는 로마교회만의 문제입니까? 오늘의 교회들에는 이 문제가 없습니까? 아니 우리교회에는 이런 문제가 없습니까?

이 같은 문제는 21세기, 워싱톤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한인교회들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많이 이슈가 되는 것이 현대적 스타일의 예배입니다. 또 이러한 예배와 연관되어서 복음성가를 예배 시간에 부를 것인가 말 것인가가 문제가 되고있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엄숙하고 정숙한 예배만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바른 스타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손뼉을 치고, 복음 성가를 부르면서 찬양하고 예배드려야만 산 예배를 드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같은 문제로 서로의 갈등이 있고 나아가서 교인들간의 분열로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주여 삼창"을 하면서 소리를 질러 기도하는 것만이 기도의 참 모습이라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귀 잡수신것도 아닌데 왜 소리는 그렇게 지르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름 속에서 오는 갈등과 대립은 로마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에도 있습니다. 21세기 워싱톤에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이 같은 갈등, 이 같은 대립을 경험합니다.

II.

여러분, 이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까? 서로간의 다름 속에서 겪는 갈등과 분열의 위협에 대하여 오늘의 `말씀은 어떤 멧세지를 전해주고 있습니까? 이 상황 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같은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갈 수 있습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영역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상황속에서 처방전과 같이 세부적인 사항을 지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문제는 대개 근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지엽적인 문제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해서 자신의 생각만이 성서적이고 옳다는 확신에 사로 잡히게 되면,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교회에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말아야 된다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에,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를 비판하고 또 업신여겼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권고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12:1-2)" 여기서 받는다는 말은 용납하다 (Accept)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믿어도 어떤 문제에 대하여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14:5이하의 말씀을 보십시다;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똑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데, 이 날을 저 날보다 중히 여길 수 있고, 모든 날을 같이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데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손뼉을 치며 복음 성가를 부를 수도 있고, 조용히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할 수도 있고, 조용히 기도드릴 수도 있습니다. 66번을 이용 워싱톤에 갈 수도 있고, GW Parkway를 통해 워싱톤에 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같이 믿음 생활을 하지만,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해야 합니다. 다르다는 이유에서 비판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기 혼자 진리를 독점한 것처럼 생각하면 이것은 독선입니다. 이것은 위험한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2) 둘째로 우리의 믿음의 삶에도 다양한 단계가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쪽에 섰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사실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었다고 해서,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연약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성서적인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믿음은 Being이 아니고 Becoming입니다.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끝없이 자라가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련 속에서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또 부지런히 심음을 통해서 믿음은 자라갑니다.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연약한 믿음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자랐다고 해서 연약한 사람들을 업신여긴다면, 이것은 분명히 문제있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아니 아직도 갈 길이 먼 신앙의 모습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적을 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난 79년 처음 우리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을 때, 몇 분들께 여쭈어 본적이 있었습니다. "실례지만 미국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그 때 제가 들은 대답은 대부분이 20년, 25년 이상들이 되셨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저는 더 이상 이 질문을 드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다 미국에서 안정된 삶의 터전을 가꾸어 놓으셨기에 저같이 지금 막 와서 Struggle하는 사람과는 저 자신 거리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 분들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힘드세요. 저도 처음 왔을 때 생각이 납니다." 그때 해 주신 격려는 미국 생활을 이제 막 열어 가는 제게 큰 용기와 희망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했다고 자랑할 일 아닙니다. 앞섰다고 뒤에 선 사람들 업신여길 일 아닙니다. 왜 그 모양이냐고 비판하거나 내려다 볼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판 대신에 격려를, 책망 대신에 용납을, 내려다보는 대신에 그 사람 자리에 내려서서 이해함이 필요합니다.

(3) 세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혹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납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왜 생각을 달리하는 형제 혹은 자매를 용납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그 형제도, 그 자매도,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을 위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14:15).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생각을 달리하는 형제 혹은 자매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다른 의견에만 사로잡히면, 다른 것만 보입니다. 그 의견 때문에, 그 사람도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연약해도, 비록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 분도 하나님의 작품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을 위해서도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한 형제, 한 자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 받아들이는 마음을 싹 틔울 수 있습니다.

14:3, 4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 혹은 강한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들의 주님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비판합니까? (14:8이하) 그 분이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주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관하실 일입니다. 또 14:10이하의 말씀처럼 그 사람도, 우리도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다르다고 비판할 일이 아닙니다. 다르다고 업신여길 일이 아닙니다. 다름을 넘어 서서 그 사람, 그 존재를 보아야 합니다. 비록 생각을 달리 한다해도, 그 사람도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형제와 자매를 용납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이 근거를, 기억해야 합니다. 서로 의견을 달릴 할 때, 이 성경의 멧세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네 번째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넘어서서 우리가 함께 추구하는 보다 근본적인 것, 보다 중요한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지엽적인 일, 서로 다름에 집착해서 보다 중요한 일, 보다 근본적인 일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14:15의 말씀을 보십시다: "여러분 각자가 음식 문제로 형제 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또 14:20a를 보십시다: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많은 경우 우리는 지엽적인 다름에 매달려 형제를 넘어뜨리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저렇게 갈 수도 있는 일을 이렇게 가야한다고 고집 부리다가 분열과 상처를 낳습니다. 지금 할 수도 있고, 내일 할 수도 있는 일을 지금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다가 형제를, 자매를 넘어뜨립니다. 내가 할 수도 있고, 남이 할 수도 있는 일을 내가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다가 분쟁과 아픔을 안겨줍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14:17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일한다고 나섰다가, 하나님 나라 위하여 헌신한다고 고집 부리다가, 의와 평화와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작은 문제에 매달리다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분열과 상처를 낳는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한 걸음 물러섬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화평을 누릴 수 있다면, 내 생각을 접어 두는 마음가짐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포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양보할 수 없는 궁극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인 교회들이 갈라지는 이유를 보십시다. 얼마나 많은 경우가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갈라집니까? 얼마나 많은 경우가 양보해서는 안되는 궁극적인 문제 때문에 분열의 아픔을 맛봅니까? 오히려 비본질적인 문제로 인한 아픔과 상처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리우고 있지 않습니까? 전도의 문을 막고 있지 않습니까?

보다 본질의 문제를 위하여 자기 의견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공식적인 채널에서 지혜를 모아 결정을 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자기 의견대로 결정되지 않았을 때, "당신들이 결정했으니 당신들끼리 해 보시오.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리다." 여러분, 이런 태도를 주님께서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자신의 생각에 매어서 더 큰일,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 하나됨을 지켜 가는 일을 깨뜨리는 모습이 아닙니까?

문제에 사로잡히면, 더 큰 것, 더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리기에 사도 바울은 권고하고 있습니다. 음식 때문에 형제를 넘어뜨리지 말라고. 이같은 문제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III.

로마교회가 지녔던 분쟁과 갈등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믿음안에서 자라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다른 생각을 가졌어도 그 사람 역시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뿐 아니라 그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다 중요한 문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왕조 초기에 황희라는 명재상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종들이 서로 다투다가 황희 정승을 찾아 와 호소했습니다. 한 사람이 일이 이렇게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황의 정승은 "자네 말이 옳구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종이 "그게 아닙니다. 사연인즉 이러 이러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황희 정승은 "자네 말도 옳구만"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아내가 참견을 했습니다. "아니 두 사람 말을 들었으면 누가 옳고 그른지 이야기 해 주어야지, 두 사람 다 옳다니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러자 황정승은 말했습니다. "당신 말도 옳구려."

여러분 줏대없는 이야기입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흐지부지한 태도입니까?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열린 마음이 아닙니까?

2000년에 열렸던 연합 감리교회 총회는 Augustine의 말을 총회의 표어로 내세웠습니다.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 charity (love that cares and understand)."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사랑을. 그렇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하나되어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수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다름 속에서도 사랑해야합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 나눔과 적용을 위한 물음

1. 우리 가운데 분열과 갈등을 가져오는 문제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2. 쉽게 대립하고 갈라서는 한인교회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3.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사랑을" - 이 말의 의미를 함께 나눕시다. 어떻게 하면 이 말을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