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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21. 워싱톤서(22) - 조영진 목사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9:14-33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함,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이며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수 있습니까?

지난 주일 우리 모두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50년의 역사를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모아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새롭게 시작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제가 주보의 "목회실에서"난에도 썼습니다만, 금번 50주년 감사예배를 위하여 헌신해 주신 교우 여러분들 참으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두루 두루 감사를 드립니다. 또 저희 예배에 참여해 주셨던 목사님들, 또 함께 기쁨을 나누어주신 동포사회 여러분들께 이 방송을 통하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 10월 첫 주일 저는 새로운 단락에 접어든 로마서 연속설교의 스물 한 번째 주일을 맞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큰 근심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세계의 그 어느 백성들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등을 돌려대고 있는 이 현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가슴을 털어 놓았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바로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그의 이 고백 앞에서 저는 우리 모두도 이 가슴이 필요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 이 땅을 살아가는 한인동포들, 나아가 미국, 이 나라 이 백성들이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도록 우리 함께 염려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50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가 이 나라, 이 땅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함께 참여하자고 호소드렸습니다.

오늘은 지난번의 말씀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성경 속에서 가장 많이 논란이 되어지는 말씀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9:4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된 것은 결코 그들의 노력이나 뜻, 혹은 선함 때문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 가운데 이삭이 택함을 받은 것과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가운데 야곱이 약속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 것을 예로 들면서 사도 바울은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같은 하나님의 선택이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역사 앞에 필연적으로 질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하나님의 선택의 은총 앞에서 제기되는 두 가지 중요한 물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I.

먼저 첫 번째 질문은 9:14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여러분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두 아들들 가운데서 한사람은 택하시고 한사람은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삭을 택하셨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마엘과 에서는 택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이란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정의롭지 못하신 분이 아닙니까? 이 질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질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단히 적절한 질문입니다. 당연히 제기될 수 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No!"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같이 결론적인 대답을 한 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불의하실 수 없다는 근거로 모세와 바로의 예를 듭니다. 본문 9:25의 말씀은 출애굽기 33:19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보십시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머문 후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 우상이 자신들을 에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면서 한판 축제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분노하여 십계명을 새긴 돌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어던진 후,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목숨을 걸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셔야만 이 백성을 인도할 수 있다고 탄원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이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한 부분이 바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신가? 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대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첫째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둘째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라는 이 두 물음입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모세의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쉽게 은혜를 잊어버리고 쉽게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인된 존재들입니다. 모세가 자리에 없었던 40일을 참지 못해서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변덕스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런 인생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된 인생들,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백성들이지만,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한번 긍휼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를 알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9:17 이하의 말씀입니다. 바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은 이해가 되는데, 바로를 강팍케 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인가? 하는 점입니다. 9:18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팍케 하시고자 하는 자를 강팍케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난해한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성서연구가들의 대답 가운데 한가지는 하나님께서는 강팍하지 않은 사람을 일부러 강팍하게 만드시는 역사는 결코 없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에집트왕 바로의 경우를 보아도 그가 먼저 강팍했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팍하게 하셨다는 말씀의 뜻은 이미 강팍한 바로를 그 강팍함에 버려두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강팍케 하시는 역사 역시 결코 불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신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단호히 대답합니다. 아니라고, 그럴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II.

이어서 제기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강팍케 할 사람을 강팍케 하신다면, 한사람이 강팍케 된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강팍케 된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제기 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까? 오늘 씨름하는 이 문제를 신학에서는 예정론(Predestination) 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이 문제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앞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즉, 우리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누구신가? 라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해답을 찾습니다.

(1) 여러분,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오늘 본문 9:21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인간이란 질그릇과 같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바로 이 그릇을 만드시는 토기장이 이십니다. 그렇다면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귀히 쓸 그릇을 만들 수도 있고, 천히 쓸 그릇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뜻에 달려있는 것인데, 어떻게 지음받은 그릇이 공평하니 불공평하니 하고 탓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앞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고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성서학자는 사도 바울의 비유는 부적절한 것이 아닌가 질문하기도 합니다. 그릇은 그릇이니까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귀한 존재이기에,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혜의 원천이 되시고,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참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모순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하나님께는 하나도 모순이 안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좁은 판단만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내 지식의 우물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논리, 우리의 지식의 틀 안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9:20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표준새번역)"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각의 틀에 갇히시는 그런 유한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앞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왈가왈부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왜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지 않으셨기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 답변입니다.

(2) 그리고 이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성경 속에 나타났고, 증거되어진 것임을 사도 바울은 밝힙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따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남은 자들, 그리고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영광의 그릇, 긍휼의 은총에 참여케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이방인들,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던 사람들도 구원에 참여케 될 것은 이미 구약성경 호세아 2:23과 1:18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다고 해도 남는 자들이 구원받을 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멧세지 속에 이미 나타난 바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부름을 입어 구원의 은총에 참여케 되는 사람들이 있게 되리라는 사실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사실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의 말씀 속에서 증거되어진 것이 이제 이루어졌음을 밝힙니다. 그러니 이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앞에서 인간이 왈가왈부 할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III.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증언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어떤 사람은 선택하심을 받고 어떤 사람은 택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허물을 탓하시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아니라고,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불의한 분이 아니십니다. 또 그분은 우리 인생들을 지으신 토기장이,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의 역사에 우리 인생들은 왈가왈부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이렇게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리라는 사실은 구약 성경 속에서 증거되어져 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셨다는 사도 바울의 외침을 정리하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1) 먼저 이같은 예정론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의 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된 존재들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역사로 우리를 택하셔서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인간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9:16의 말씀처럼 사람이 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전적인 은혜일 뿐입니다.

(2) 그러기에 예정론은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한일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를 택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예정론의 초점은 하나님의 구원해 주시는 은혜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시고 택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에 초점이 있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해명에 중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전개하는 논리로 기록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3) 이렇게 말씀드려도 아직도 무언가 께름직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우리는 "신비"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신비란 우리의 이성으로 다 이해될 수 없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신비가 모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합니다. 옛날 거울은 오늘 우리들이 쓰는 거울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희미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신비, 희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는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뵈올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믿고 기다리며 살아가십시다. 하나님께서 내 머리 속에 들어오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으로 별 볼일 없는 인생인데, 건강치도 못해서 갈비뼈는 온전치 못해 기울고, 위장은 1/3을 잘라내야 했고, 간은 시원치 못해 늘 한계를 지니고 살고 .... 그렇다고 속사람이나 시원합니까? 연약하고 게으르고 정결치 못하고... 그런데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 그래도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아오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신 것 어떻게 감사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같이 별 볼일 없는 인생을 꾸짖지 않으시고, 부르시고 사명을 맡겨 주신 것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시원치 못해도 기다려 주시고, 영원의 빛에서 보면 70년, 80년 살아도 순간에 불과한데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으니, 택해 주셨으니,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Amazing Grace,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이제는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 앞에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 주셨습니다. 불러 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찬양할 일입니다. 참으로,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할렐루야.

* 나눔과 적용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택하셨다는 사실 앞에 무엇을 느끼십니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2.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셔서 부르셨다고 깨달은 적이 있으십니까? 함께 나누십시다.

3.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 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