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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9.23. 워싱턴서(20) - 조영진 목사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것입니까?
고난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어떤 고난 속에서도, 죽음이 찾아와도,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승리의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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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제가 폐결핵으로 요양원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루는 40대의 남자 분이 새로운 환자로 우리 병동에 입원했습니다. 그때 요양원에는 목사님이 안 계셨고, 주일에 신학생이 와서 스피커를 통해서 예배를 인도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환자들 가운데 크리스챤들은 수요일 저녁에 함께 모여서 환자들끼리 기도회를 갖곤 했습니다.
새로 입원한 환자 분에게 제가 수요일 저녁 기도모임에 나오시라고 초청하자, 그분은 대뜸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나도 한때는 교회 나갔었습니다. 그리고 이 병이 발견된 후,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정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든지, 아니면 더 이상 계시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보고 기도하러 나오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산 속에 들어가서 며칠동안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기도를 좀 들어주시면 좋으련만, 왜 묵묵부답 하셨는지 애석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생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버리십니까? World Trade Center가 무너지면서 실종되거나 숨진 수많은 사람들, 과연 하나님께서 버리신 분들입니까? 우리의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오늘 봉독해 드린 로마서 8:35-39의 말씀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8장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속에서 결론적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삶임을 증거한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승리의 삶을 외치고 있습니다.
I.
지난번 설교에서 저는 8:31 이하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질문 가운데서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8:31b의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이고 둘째는 8:32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입니다. 셋째는 8:33의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이고, 넷째는 8:34의 "누가 정죄하리요?"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다섯 가지 질문 가운데서 마지막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 질문은 바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입니다. 이 질문은 이어서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되면서 계속됩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은 8:38, 39에서 확신에 찬 선언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누가,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Nothing!" 아무 것도, 어느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사랑은 끈질긴 것입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사랑은 튼튼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역경에 직면할 때, 제일 먼저 갖게되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님이 나를 채찍질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신 것인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의문을 갖게됩니다. 하나님, Why Me?(하나님,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불평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은 과연 그렇게 연약한 것입니까? 조그마한 어려움 앞에서 그렇게 무너지는 허약한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변덕이 심한 사랑입니까? 우리의 조그마한 과오 앞에서도 무서운 채찍을 내리시는 그렇게 무서운 사랑입니까?
No!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연약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허약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변덕스럽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고난이 닥쳐와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핍박이 다가와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굶주림, 헐벗음이 닥쳐와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죽음의 순간이 찾아와도 그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모두가 한계가 있습니다. 특별히 죽음이 우리를 나누어 놓게 되면, 우리의 사랑도 끊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금번 World Trade Center 폭파사고가 나면서 Center 안에서 혹은 납치된 비행기 안에서 전화를 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멧세지를 남겨놓고 죽어갔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연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하고 이름다운 사랑이었지만, 그래도 이 사랑은 죽음의 문턱까지만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그 사랑도 마침표를 찍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아름다운 추억은 가슴 속에 남아있겠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 앞에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참으로 아멘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같은 외침은 단순한 추리나 이론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환난과 곤고와 핍박, 기근과 헐벗음, 위험과 칼을 체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생스러웠던 인생 여정을 고린도후서 11:23b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했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여러분, 이만큼 고생하신 분 있으시면 한번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죽도록 고생한 사람입니다. 온갖 위험과 고난과 역경을 맛보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외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고, 그 어떤 것도, 아니 죽음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여러분, 이만하면 믿을만한 사랑이 아닙니까? 이만하면 끈질긴 사랑 아닙니까? 이만하면 참으로 위대한 사랑 아닙니까? 조그마한 고난 앞에서 끊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암 진단 받았다고 끊어지는 그런 사랑 아닙니다. 사업에 한번 실패했다고 끊어지는 그런 사랑 아닙니다. 가정에 좀 어려움이 있다고 끊어지는 그런 사랑 아닙니다. 며칠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끊어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마저도 이 사랑을 끊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끈질긴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II.
이 끈질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임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놀라운 특권이 있습니다. 이 은혜를 사도 바울은 8:37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어떤 고난, 어떤 역경, 어떤 실패, 어떤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의 백성들로 부름받았습니다. 고난과 역경 앞에서 주저앉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질병과 실패 앞에서 무너지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승리의 원동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심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심지가 굳은 사람은 안 믿어도 역경을 이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신념과 의지로 고난을 딛고 승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거둘 수 있는 승리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제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고난을 극복한 사람이라 해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게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유명했던 프랑스의 싸르트르 같은 사람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말하고, 20세기의 지성이라고 불리웠던 그였지만, 죽음 앞에서 마지막 보여준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 거둘 수 있는 승리란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한 승리의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의 승리의 요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 의지가 아닙니다. 내 힘, 내 신념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일, 어떤 고난과 역경, 죽음 앞에서 끊어지지 않는 끈질긴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거두는 승리의 의미, 혹은 승리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의 승리를 문제가 해결되는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즉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고, 실패했던 사람이 성공을 하게 되고 죽게된 사람이 살아나게 되면 승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승리란 훨씬 넓고 또 깊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첫째는 물론 우리의 문제를 풀어 주시는 것으로 승리를 거두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병든 몸이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망했던 사업이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풀리지 않던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픔을 주던 가정이 기쁨과 감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풀어 주심으로 승리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2) 둘째로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는 아직 고난과 문제는 그대로 있지만 이 고난을 보는 우리의 눈을 변화시켜 주심으로 승리를 거두게 해주십니다.
어제까지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고난이 새로운 의미를 안고 다가오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고난에만 매어서 앞뒤를 바라보지 못했는데,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보니 이 고난 속에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철인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길에서 부딪치는 고난 속에서 고난이 지닌 의미를 깨닫게 되면, 이미 그 고난의 가시는 뽑혀지게 됩니다.
(3)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임하는 승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은, 아픔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십니다. 주님께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니 이제는 그 아픔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실패의 멍에에 매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고난의 사슬의 포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문제가 그대로 있어도, 비록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이제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실패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실패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음도 기적입니다. Wheel Chair에 앉아서 살아가는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걷게 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Wheel Chair 속에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음도 기적입니다. 암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낫는 것만이 승리가 아닙니다. 암에도 빼앗기지 않는 기쁨과 감사를 안고 남은 세월을 살아가는 것도 기적입니다. 승리입니다.
저 역시 단순한 이론으로 이 말씀 드리는 것 아닙니다. 폐 수술을 받고 3개월 동안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 많았습니다. 제일 제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이미 목사가 되겠다고 헌신한 몸인데도 회복의 과정은 도무지 진전이 없고 괴로운 시간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목사 후보생이라고 특별히 봐주시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순조롭게 회복되어 퇴원하는데, 저는 도대체 앞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점심을 먹다말고 침대 sheet를 뒤집어쓰고 울었습니다. 너무도 괴로워서 하나님께 항의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있을 때, 제 가슴 속에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29-30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고통을 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고통을 아시는데도 왜 가만히 계실까?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의 고통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고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깨달은 감격, 그때 임한 평안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석 달만에 병원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완치되지 못하고 폐 안에 생긴 염증 때문에 8개월 가까이 고생을 해야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겨서 또 한번 폐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제 병을 고쳐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연약함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4) 네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폐배가 아닙니다. 죽음이 종착역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영원의 세계에 들어서는 입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이 전부이면, 죽음은 종말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사는 것이 승리이고 죽은 것은 패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면, It's a different story(이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그분은 철저한 실패자요, 패배자이십니다. 30대의 나이에, 제자의 배반 속에서 무참히 죽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으심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너머에는 빈 무덤이 있었습니다. 죽음은 생명의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는다고 패배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승리, 영원한 승리의 그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III.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은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보통 특권이 아닙니다. 우리는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고난, 어떤 역경, 어떤 질병, 어떤 실패 속에서도 우리는 오뚜기같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새날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새 역사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남가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결혼한 젊은 부부가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아픔은 이 가정에 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했지만, 1년, 5년, 10년을 기도했지만, 감감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16년째 되는 해에 마침내 아내가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출산을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해산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아내는 무서운 진통 끝에 사내아이를 분만했습니다. 고통이 사라지면서 엄마는 아이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간호원이 주저주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번 요구하자 간호원이 아이를 데려 오는데, 그만 부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온몸과 얼굴이 뒤틀린 흉칙스런 기형아였습니다. 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16년만에 주시는 아이가 어떻게 이런 아기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밤새 통곡하며 울부짖어 보았습니다. 의사도, 간호원도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아내의 병실을 찾았습니다. 아내는 조용히 눈물을 씻고 아빠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빠, 밤새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해답을 주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어느 가정에 보내면 가장 큰 사랑으로 키울까 10년 이상 고민하고 찾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러시다가 우리에게 맡기면 제일 많은 사랑을 받으리라고 결정하시고 우리 가정에 맡겨 주셨습니다. 나 이제 정성을 다해서 이 생명을 키우겠습니다. 아빠도 이 생명 도와주세요." 남편도 울고 아내도 울고 들어왔던 간호원도 울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자기 합리화, 자기 위로입니까? 자기 위로라 해도 잘못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눈물과 탄식 속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James Dobson박사의 말처럼 우리는 고난 속에서 두 가지 선택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일어서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고통과 탄식을 안고 살아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오늘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여기 승리의 길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입니까?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 나눔과 적용을 위한 질문
1.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함께 나눕시다.
2.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모습을 한번 정리해 보십시다.
3.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승리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함께 나누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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