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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9.2. - 조영진 목사
워싱톤서(18)- 탄식소리
로마서 8:18-27
오늘 본문 속에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 탄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탄식, 그리고 성령님의 탄식입니다.
이 탄식의 소리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탄식의 소리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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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 강단에서 다시 뵙게 되어 반갑고 또 감사합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시고 여러 가지로 염려해 주신 교우 여러분들의 사랑으로 많이 회복되어서 이렇게 서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보니 뭐 달라진 것이 없다고 혹시 염려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몸무게 전선은 이상 없이 여전하니까 그 점은 안심하셔도 좋으실 듯 합니다.
쉬는 동안 여러 가지로 염려와 사랑을 베풀어주신 교우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지난 두 달 동안 격무에 시달리신 장 목사님, 김 목사님과 다른 동역자 여러분들, 평신도 임원 여러분들께도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주일에 두 달 동안 수고했으니 두 목사님들께 박수를 쳐야 한다고 여러분을 유도한 김 목사님의 호소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함께 웃으면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훌륭한 두 목사님과 함께 저희 교회를 섬기게 된 것이 감사하고 또 자랑스럽습니다.
금년 한해동안은 사나 죽으나 로마서의 말씀과 씨름하기로 했으니, 다시 로마서로 돌아오십시다. 그 동안 공백이 많았으니, 잠깐 돌이켜보고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아니 워싱톤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먼저 문안의 인사를 전한 후 1:16, 17에서 로마서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어서 1:18-3:30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인생들이 죄인임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도 예외 없음을 그는 밝힙니다. 그리고 3:21에서 4장 마지막 절에서는 이 같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이 은혜의 역사는 율법을 모두 지키는데서 임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를 통해서 이룩하신 역사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 선물입니다.
이어서 5장부터 8장에서는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되는 삶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삶, 6장에서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거룩한 삶, 7장에서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한 삶, 그리고 8장에서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삶에 대하여 각각 말해줍니다.
이제 8장을 살펴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8:9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란 하나의 타이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 그의 내면세계에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교제할 뿐 아니라 그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갑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상속받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깨우쳐 줍니다.
성령님,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참으로 amazing grace, amazing privilege, 놀라운 은혜이며 놀라운 특권입니다. 옛날 사도 바울에게만이 아닙니다. 2000여 년 전 예루살렘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거하셨던 성령님께서는 오늘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거하십니다. amazing grace, amazing privilege, 놀라운 은혜이며 놀라운 특권입니다.
I.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배경으로서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란 "already" 와 "not yet", "이미"와 "아직도"의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서 하나님은 아바 Daddy,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완성은 not yet,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신령한 몸을 입게되는 영광의 그날은 not yet,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이해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 위에 기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성경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already"와 "not yet", "이미"와 "아직"의 두 대칭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을 깨우쳐 주신 말씀입니다.
II.
이 같은 기초 위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세 가지 탄식의 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1) 첫째는 피조물의 탄식입니다. 8:22 말씀을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피조물이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인간을 제외한 자연세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면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이 역사가 완성되는 마지막 때. 그 종말의 날에 대한 기다림 속에서의 탄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 이 현실 앞에서의 탄식으로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 이 자연세계의 탄식이 오늘만큼 심각하게 느껴지는 때는 일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원 고갈, 환경오염에 따른 생태학적인 위기가 오늘만큼 심각하게 느껴지는 때는 역사상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한국의 남해안, 동해안에서 양식장을 망치고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는 적조현상도 사실은 산업 폐기물 혹은 도시의 폐수가 바닷물을 오염시키는데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농약의 사용으로 한국의 논에서 메뚜기가 사라진 것은 오래 전의 일입니다. 생활 폐기물이 가져오는 환경공해의 문제도 점차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1년 동안 발행되는 신문용지의 넓이는 한반도를 여섯 번 덮을 수 있는 면적이며, 이렇게 버려지는 종이의 양은 나무 3,000만 그루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또 미국사람들이 하루에 마시는 음료수 깡통을 길이로 세워 놓으면 지구 주위를 두 번 돌 수 있다고 합니다.
수질오염, 대기오염, 기후변화, 생태학적 위기는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가까이에 다가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피조물이 탄식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2) 두 번째 탄식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의 탄식입니다. 본문 8:23은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구원받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지만,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고난과 역경, 실패와 좌절 속에서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 우리의 몸도 구속을 받게되는 영광의 그날을 기다리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탄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세 번째 탄식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탄식입니다.
본문 8:26을 보십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 영, 성령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왜 탄식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하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III.
이제 이 같은 탄식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이 아침 탄식의 소리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 줍니까? 워싱톤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오늘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역사의 마지막 때를 향한 기다림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오늘 우리를 향한 탄식과 부름의 소리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뿐인 이 지구를 바로 관리하는 청지기의 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원을 아끼고, 환경의 오염을 막는 일에 책임있게 참여해야 합니다.
저의 집사람은 이 점에서 저보다는 훨씬 의식화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양치질을 시작하면서 칫솔을 물에 적시기 위해 물을 틀어 놓으면 수돗물을 그대로 틀어놓은 채 양치질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저의 집사람은 꼭 한마디 하면서 물을 잠급니다. 어떤 때는 잠깐 틀어 놓는 동안 물을 얼마나 쓰겠느냐고 항의해 보기도 하지만, 집사람 생각이 옳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쓰레기를 줄이는 것, 종이도 가능하면 recycle하는 것, 지극히 적은 일이지만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줄이는 길입니다. 처음 이 세상을 만드신 후, 잘 다스리고 관리하는 청지기의 책임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피조물, 오늘 이 세상의 탄식소리를 듣고 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2) 둘째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는 희망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갖는 희망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희망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갖는 기대입니다. 아직 오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서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하여 우리가 맞이할 미래를 열어 보여 주십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 이 약속을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갖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본문 8:18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오늘 우리 고난 당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탄식 속에서 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숨 속에서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절망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탄식으로 마감할 수 있습니다. 눈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내일이 있습니다. 영광의 그날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고통이 있어도, 오늘 탄식이 우리들의 앞길을 가리워도, 주님의 약속을 붙들면 우리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견딜 수 있습니다. 8:25의 말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 말씀 앞에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백성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일이 있는 백성들입니다. 오늘 어떤 고통이, 어떤 탄식이 밀려와도 우리는 내일이 있습니다. 영광의 내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참을 수 있습니다. 참으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희망을 가슴 안에 안고 참고 견디면서 탄식의 오늘을 헤쳐갈 수 있습니다.
(3) 셋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님의 탄식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무얼 구할지 모르고 헤매는 여러분을 안타까이 바라보시며 간구하시는 성령의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탄식하시는 성령님의 간구는 물론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한평생 사는 동안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우리 인생들을 향한 성령님의 안타까운 탄식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저의 아들과 가끔 언쟁을 할 때 저의 아들이 십팔번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Daddy, You don't know anything" 아빠는 뭘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저 역시 십팔번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Son, You don't know anything" 아들아 너 뭘 모르는거야. 아빠인 제가 정말 모르는 것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인 제가 볼 때 저의 아들이 모르는 것 많습니다. 모르고 우기는 것을 볼 때는 안타깝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느끼시는 심정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생들이 도무지 뭘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다 아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성령님께서 탄식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쉬면서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Bob Buford 라는 사람이 쓴 Halftime이란 책입니다. 이 사람은 일찌기 케이블 TV 비지네스에서 성공한 훌륭한 기업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정상에서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Halftime을 통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아직도 케이블 TV 비지니스에 관여하지만, 많은 시간을 교회의 지도자들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삶의 전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묘비에 어떻게 기록하기를 원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묘비 X100이라고 쓰고 싶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에 근거해 100배의 결실을 거두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바램에서였습니다.
저도 쉬는 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어떻게 기록되기를 원하는가? 저와 집사람은 화장하자고 했으니까 묘비는 없겠지만, 이렇게 기록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제가 1970년 감리교 신학대학에 지원하면서 썼던 신앙고백서의 내용이었습니다: "감사하면서 진리의 복음을 외치며 그리스도를 따라서 섬기는 삶을 살아보려고 한 사람"
저는 제게 주신 주님의 은혜, 교우들과 이웃들의 사랑이 크기에 감사하면서 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 감사의 동기를 안고 진리의 복음을 외치며, 예수님을 본받아서 섬기는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걸어온 또 걸으려고 하는 삶의 길이었습니다. 섬기는 삶을 산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보려고 한 사람은 저 자신의 삶을 아는 저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서 한가지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몇 해를 살던지, 성령님 걱정끼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Halftime 은 꼭 40대, 50대만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탄식을 듣고 여러분의 인생을 돌이키시면 오늘이, 지금이, 바로 halftime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묘비에 어떻게 기록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주님 앞에 서시는 그날, 주님께로부터 어떤 말씀을 듣고 싶으십니까?
지금이 Halftime입니다. 이제 바꾸시기 바랍니다. 이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이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향한 성령님의 탄식에 이제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였던 Bernard Shaw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새겨 놓았습니다: "우물쭈물 하더니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피조물인 자연의 탄식 앞에서 나는 어떻게 응답할 수 있습니까? 우리 속에서는 지구의 청지기로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2. 내 삶 속에 성령님께서 특별히 탄식하시는 영역은 무엇입니까?
3. 나는 내 묘비에 어떻게 기록되기를 원합니까? 그런 인생을 위하여 어떻게 내 삶을 정비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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