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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8.26. 장찬영 목사
바울의 삶의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빌립보서 4:4-7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보낸 글입니다.
두발이 착고에 매여있고, 온몸은 태장을 맞아 찢기고 갈라져 있고, 지하 감옥의 환경은 도저히 사람이 살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곳인데 그곳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슨 일을 겪든지 항상 기뻐하십시오. 또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마음을 넓게 가지십시오. 또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
도대체 이 바울의 삶의 여유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에게는 어떤 삶의 원칙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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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둣가에 자유공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공원 안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습니다. 혹시 그곳에 가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그 동상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구나. 그 삶의 질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한국민족은 특별히 이 맥아더 장군에 대하여 6.25 전쟁과 관련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역사는 그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평가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참 뛰어난 전략가였고, 멋있는 군인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1964년 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물들, 기록들을 추적하고 그의 후손들에 의해 발견된 그의 또 다른 모습은 그는 실제로 자신이 어떤 지위나 명에의 모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그저 평범하지만 신실한 한 신앙인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후손들을 위해 남긴 기도문을 보면 잘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런 아들이 되게 하옵소서!" 라는 자녀를 위한 기도문입니다.
"주여 이런 아들이 되게 하옵소서.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강한 힘과/
무서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담대성을 주시옵고/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게 하는 온유한 힘을 주시옵고/
바라건대 쉬움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옵고/
곤란과 도전에 대하여 분투하고/ 항거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도 용감히 싸울 줄 알되/
패배를 인정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도 가르쳐 주옵소서/
웃을 줄 아는 동시에 울음을 잃지 않는 힘을/
미래를 바라보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것을 다 주신 다음에 이에 더하여 유머를 알게 하시고/
인생을 엄숙히 살아감과 동시에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시고/
자기자신을 너무 중대히 여기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은 소박함에 있다는 것/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유머를 알게 하시고 인생을 엄숙히 살아감과 동시에 삶을 즐길 줄 알게 해 달라" 는 구절에서는 뭔가 삶의 여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전기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그분이 웨스트 포인트 육군사관학교 학생시절 때, 과학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학생들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배웠는데, 이 과목이 어찌나 까다롭던지 모든 학생들이 다 고생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독 이 맥아더만이 만점을 받았습니다. 교수님도 깜짝 놀라서 학교 개교이래 이 과목을 만점 받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맥아더를 교수실로 불렀답니다. 그리고 물었지요. 어떻게 이 상대성이론을 만점을 받을 수 있니? 넌 참 대단하구나. . .그랬더니 이 맥아더 왈,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 상대성원리를 하나도 이해 못합니다. 다만 온통 다 외웠을 뿐입니다" 라는 겁니다. 이것도 보통 학생으로서는 할 수 없는 얘기 아닙니까? 100점을 맞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맥아더의 대답을 들은 교수가 하는 말이 "사실 너만 모르는 게 아니고 나도 잘 몰라. 네가 100점 맞았길래 너에게 물어보려구 그랬어" 라는 겁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얘기입니까? 그 학생에 그 교수, 얼마나 여유롭고 얼마나 유머스럽습니까?
실지로 만점을 맞고도 "교수님 저는 하나도 모릅니다." 또 그 가르치는 교수도 "야 사실은 나도 잘 몰라" 그랬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얘기입니까? 그렇게 여유있게 살아 나가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해보는 겁니다.
종교심리학 분야의 거목 가운데 한 분이신 하버드 대학의 종교심리학 교수, 고든 올포트(Gorden Allport)는 그의 저서 'The Individual and his religion' ('개인과 그의 종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에서 말하기를 "참 인간의 속성 중에는 자기를 객관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생활에 대해서 항상 반성적이고 타인이 자기를 보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서 투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 . .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만의 성을 쌓지 않고 생활에 쫓기지 않는다. 그는 상대방에 대하여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고도로 발달된 여유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숙한 인간의 모습에로 회복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여유 있는 감각', 맥아더의 기도대로라면, "유머를 알게 하시고 인생을 엄숙히 살아감과 동시에 삶을 즐길 줄 알게 해 달라" 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비단 맥아더만의 비밀이겠습니까? 기독교 역사상 가장 파워 있는 삶을 살았던 분 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powerful한 만큼이나 고난과 역경 속에 살았던 분이 있습니다. 가만 있어도 그의 조상 때문에 그가 배운 것 때문에 상류층의 삶이 보장되었지만, 스스로 밑바닥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오늘 우리에게 들려준 본문은 빌립보 감옥에서 보낸 글입니다. 두발이 착고에 매여 있고, 온 몸은 태장을 맞아 찢기고 갈라져 있고, 지하감옥의 환경은 도저히 사람이 살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곳인데, 그곳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이 구절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무슨 일을 겪든지 항상 기뻐하라. 또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마음을 넓게 가져라.. 또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뭔가 그 믿음 안에서의 깊은 평안, 삶의 그 어떤 여유 있는 경지, 또 인생이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어떤 힘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이 바울이 갖고 있는 삶의 비밀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감옥 안에서도 자기가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편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삶의 모습에서 우리가 그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그가 누렸던 삶의 여유'에 대한 몇 가지 원칙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서 제거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유 있는 삶'에 대한 오해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TV광고가 제시하는 여유 있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명 돈과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온갖 풍요와 편리함입니다. 더 좋은 집, 더 안락한 차, 더 맛있는 음식, 더 편리한 생활용품, 더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여행 스케줄 . . .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그들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 이것들을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때로 우리 스스로를 시간의 노예로 전락시킬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 쉼과 안식을 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시대는 이런 것들이 여유 있는 삶의 전부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것이 정말 사도바울이 얘기하는 삶의 기쁨, 삶의 감사, 그 여유입니까?
바울은 자신의 인생이 매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늘 복음증거를 위해 옮겨다니는 불안한 삶을 살면서도, 자기가 배운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까지 낮아지면서도, 그렇게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첫째,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복음전하는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9장 23절에서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 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그 일에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태도에서 우리는 중요한 인생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선교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소명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대수롭지 않은 세상 직업에 종사한다고 해서, 아니면 가정에서 아이들 키우고 살림만 하는 주부라고 해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하나님 말씀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습니다. 그 소명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이라 우리 가슴에 얼른 와서 닿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좀 더 구체화시켜서 각자 개인이 어떻게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어떤 소명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소명을 분명히 찾을 때 우리는 당황해 하지 않습니다. 쫓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란 그 자체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드리는 예배에 대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되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부터 내 인생을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예배에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를 향한 뜻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독교적인 교육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gift, 혹은 달란트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소명을 찾으셨습니까? 그럴 때 어떤 환경에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여유 있는 모습'입니다.
둘째로, 자기를 정확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때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의 비극은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말입니다. 그런데 보통 분수라는 말은 그다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자주 안 쓰지만, 실제로 바울은 자기의 능력과 시간의 한계점을 인정하고 자기분수를 넘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의 한계점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로마서 12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나를 정확히 볼 때 쫓기지 않습니다. 나를 정확히 알 때 염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면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놓고 선명하게 선을 긋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달란트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그 비유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몇 달란트 받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를 받았든 그 받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달란트 비유에서도 말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가진 자와 자기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자존심의 상처를 받았을 겁니다. 한 달란트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보니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족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어떤 상황에든지 감사할 수 있는 마음. 그 사람은 진정 여유 있는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로, 진정한 삶의 여유는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할 때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결정하는 생활태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덜 중요한 것을 앞세우다가 더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잘못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하버드 대학의 고든 올포트 교수는 참 인간, 성숙한 인간의 특징을 말하기를 "그는 육체적 욕망(Viscerogenic desire)보다는 정신적인 관심(Psychogenic interest)에 무게를 두고 산다" 고 정의합니다.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삶"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에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우선 순위입니까?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을 했다하더라도 그의 배우자가 그의 자녀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선 순위의 문제를 다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주전에 80세 되신 어르신이 개인적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분은 자녀들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이곳에 잠시 들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어르신은 지난 80년 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하셨던 분입니다. 우선 순위를 아는 자녀입장에서는 이번 기회가 아버님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기회가 되기를 얼마나 바랬겠습니까? 드디어 이곳에 오신 날부터 아버님을 설득하고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얼마나 공을 들였겠습니까? 그리고 마침내는 딸과 사위가 손주들이 바라보는데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80년의 세월을 사셨어도 그 분의 삶에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자녀들의 우선 순위가 있었기 때문에 이일은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선 순위를 바르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치 갑자기 죽음을 예고 받은 임종을 앞에 둔 사람처럼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임종이라는 절박한 사건 앞에서는 우선 순위가 삽시간에 바뀝니다. 건강할 때 덜 중요하던 일이 가장 중요한 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정신없이 그저 쫓기다가 주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우선 순위가 분명할 때 우리는 비로소 여유 있는 삶이 무엇인지 이해 될 수 잇는 것입니다.
어떤 통계자료에 의하면 다섯 명 중에 네 명이 시간에 쫓긴다는 하소연을 한다고 합니다. 또 이 하소연을 하는 사람 중에는 중산층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즉, 지적수준이 높고 경제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한 잡지에 난 어떤 토막기사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호레이스 윗텔이라는 영국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영국의 길링햄에 있는 어떤 조선소에서 일을 하는 기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유달리 자기의 자명종 시계를 미워했습니다. 직장에 나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자기를 괴롭게 흔들어 깨우는 그 시계, 언제나 저 놈의 시계 없이 살 수 있을 날이 올까 늘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드디어 그에게 소원하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47년만에 직장을 퇴임하는 날이 된 것입니다. 그날 그는 자명종 시계에게 멋진 복수를 시도했습니다. 그 시계를 수압기중기 밑에 놓고는 힘껏 스위치를 눌러버렸습니다. 윗텔은 금방 가루가 되어버린 자명종 시계를 바라보며 환호했습니다. "야, 기분좋다. 나는 드디어 해방되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만큼 시간의 노예가 되어 시달리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언제 삶의 여유 로운 깊이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언제 그러한 마음으로 쫓기는 삶이 아닌 풍요로운 삶의 원칙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아침,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권면합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삶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아십니까? 당신의 능력과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며 자족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인생 전체의 그리고 하루하루의 우선 순위가 있습니까? 온전한 우선 순위가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삶의 여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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