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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7.29. 장찬영 목사
당신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다니엘 1:1-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스트레스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온통 스트레스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까지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민자의 삶을 사는 우리로서는 신앙인일지라도 이러한 스트레스를 피해가지 못함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성경 속에서 우리와 똑같은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 야곱, 요셉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다니엘은 대표적인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인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또한 당신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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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왜 안식이 필요합니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린 후에 어느 교우
분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정말 좋은 안식, 제일 좋은 휴가가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스트레스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저보고 "목사님 직장에서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지
아십니까? 어디 스트레스 없는 직장 없나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되물었습니다. "집사님,
목사들의 소원이 뭔지 아십니까? 스트레스 없는 곳에서 목회하는 겁니다..." 그랬더니 옆에 계신 한 여
집사님이 "남자들은 엄마들이 얼마나 집에서 스트레스 받는 줄 모를 거예요, 매일 세 번의 식사를
준비하는 게 그리고 그렇게 준비한 음식을 가족들이 시큰둥해 하고 뭐 다른 거 없냐고 찾을 때 말입니다.
그리고 요즘처럼 방학 때 아이들하고 하루종일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모를 거예요"
하는 겁니다. 사실 그 자리에 아이들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아이들이라구 예외이겠습니까? 또 우리는 오늘날 이
땅위에서 이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일어나는 극단적인 사건들의 실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 개인뿐만
아니라 때로는 온 가정이 무너지는 비참한 사건들을 심심지 않게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접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스트레스란 말은 "일상적인 삶에서 변화에 대한 부 적응에서 오는
압박감"이라고 얘기합니다. 즉, 우리의 삶에서 오는 염려, 걱정, 부담들 등이 스트레스라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으면 스트레스도 없습니다. 이 말은 때로 스트레스는 우리가 변화하는 삶을 살면서 필연적
으로 겪어야 하는, 즉 적당한 스트레스는 적당한 긴장을 주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는 우리의 건강과 나아가
우리의 인생도 뺏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들의 삶에서 스트레스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 땅위에 사는 동안 우리 모두는 크고 작건 스트레스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 중에서 스트레스에서 자유하신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스트레스라는 것이 마치 암적인 존재 같아서 우리 안에 있는 행복, 기쁨, 생명
등을 뺏어갈 수 있는 위협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폭탄 같습니다. 요즘은 의학계에서도
전인치료라고 하여 모든 병의 근원이 어느 지정된 딱 한곳으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치료도 부분적인,
국소적인 치료가 아니라 전체적인, 전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병을 일으킨 이유가 삶의
과정에서 오는 전반적인 스트레스라는 것입니다. 바로 스트레스가 주범입니다.
요사이는 어린아이들도 스트레스를 받아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성인병까지 앓고 있지
않습니까? 스트레스에는 어린아이들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민을 와서 정착하면서 많은 어른들이
가지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아이들이 갖는 스트레스에 대한 무지입니다. 사실 많은 부모들께서 아이들 위해서
이민을 결정했다고는 얘기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부모의 일방적인 결정이지 아이들의 결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싫건 좋건 내가 결정해서 오지만 아이들의 경우는 선택의 기회가 없기에 일방적으로 강요된
자기가 전혀 모르던 환경 가운데로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저희 집 아이가 한국에서 이곳에 왔을 때가 6살 때였습니다. 영어 알파벳 하나도 모르는
아이가 제 손을 이끌려 이곳 한 유치원, Kindergarten에 들어갔습니다. 어린아이일수록 적응을 잘 할 것이라
생각하였고, 저희 부부는 저희대로 처음 미국생활에 적응하느라 서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어느 날 이 아이가 구석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겁니다. 깜짝 놀랐었는데 자기 신발 끈을 가위로 싹둑 싹둑
자르고 있는 겁니다. 저희가 그때 빨리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그저 혼을 좀 내고 지나갔습니다. 그러고
며칠 후 학교에서 편지가 오고 전화가 오고 소동이 났습니다. 그 내용은 다른 게 아니고, 저희 아이가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자기 고추를 보여줬다는 겁니다. 아시는 대로 학교에서 얼마나 난리가 났겠습니까?
편지 내용인즉, 이 아이를 정신과 병원에 보내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느니 대단하더라구요. 학교에다 편지를
쓰고 찾아가서 자초지정을 얘기하고야 겨우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왜 그랬냐구요? 이 아기가 하는 말이 도대체 반 친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한마디도 모르겠는데 이 아이가 옆에서 툭 치고 저 아이가 툭 치고 또 아무대답 없으니까 저희들끼리 킥킥대고
웃고 하니까 자기가 화가 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는 보여줘야겠는데 말은 안되고 보여줄 것은 없고,
그러다가 이 아이가 한국에서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있으면서 그분들이 자기를 귀여워해 주면서 고추얘기하고
장난치던 게 생각이 난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 얘기 듣고 그날 밤에 자는데 잠이 오지
않아요. 아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표현하지 못해서 신발 끈을 잘랐을까? 오죽 답답했으면 고추를
다 보여줬을까, 그 모습이 생각하니까 그렇게 눈물이 나고 괴로울 수가 없어요. 그날밤 참 회개를 많이 했어요.
여러분 우리의 아이들도 표현을 못하고 안해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까?
이렇게 스트레스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한다면,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이 스트레스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 이제 이민자의 모습으로 또 이민교회를 섬기면서 저에게 새롭게 다가온
말씀을 보는 눈이 열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성경은 온통 이민자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 이민자의 책이에요. 전에는 몰랐던 내용이에요.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아니 그는 전형적인 이민자의 모델입니다.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낯선 땅 갈대아 우르로 갑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부모를 떠나 하란에 있는 삼촌 라반의 집으로 정처 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떠납니다. 요셉을 아십니까? 남의 땅 애굽으로, 그것도 노예로 팔려가 옥살이까지
갖은 고생을 다하지만 마침내 한 나라의 그것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요셉을 보십시오. 그들은 공통점은
다 이민자라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한국을 떠나보지 않았다면 그들이 저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낯선 땅에서 격은 아픔과
좌절, 고뇌와 눈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특별히 오늘 본문의 다니엘은 어린 시절부터 낯선 땅에서
자라난 전형적인 1.5세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보통 이민자가 아니라 승리한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스트레스란 "변화의 부 적응에서 오는 압박감"이라고 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전에 한번도 와보지 않았던 새로운 나라로 왔습니다. 그것도 포로로
잡혀서 왔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간 것도 힘든데 이제 느브갓네살 왕이 어떤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이들을
3년 동안이나 인질로 잡고 훈련시킵니다. 아시는 대로 피 교육생은 힘듭니다. 훈련 자체가 스트레스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제가 아는 다른 교회 집사님 댁으로 초대받아 간 적이 있습니다. 식사 후에 그 집
화장실에 들어가게 됐는데 화장실 벽에 성경구절이 빽빽이 붙어 있는 겁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요즘
제자훈련을 받는데 그게 암송해야할 요절들이라는 겁니다. 제가 어디서 듣기로 화장실에서 볼 일 볼 때
스트레스가 가장 많이 풀린다는 얘기를 들어서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집사님, 화장실에서는
한가지에만 집중하세요. 아니 스트레스 받게 화장실에까지 왜 그럽니까? 그러면 변비 생겨요. 그리고 나도
그걸 보고 있으니까 스트레스를 받아서 볼일을 못 보겠어요" 그리고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훈련에는 경쟁이 있고, 상과 벌이 있고 대가와 책임이 따르기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한지 모릅니다.
홈즈(Homes)라는 심리학자가 "Social Readjustment Rating Skill" 이라고 소위
"스트레스에 대한 측정도"라고 하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 사람이 100이라는 최고의 수치를 어디에 두었냐
하면 '배우자가 갑자기 죽었을 때' 받는 스트레스로 본 거예요. 이런 기준에서 그는 말하기를... 새로운
환경에 접하거나, 주거지가 바뀌었을 때를 20으로, 포로상태, 감옥에 가거나,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할 때를
63, 훈련이나 학교에 들어갔을 때를 26, 새로운 생활패턴, 음식이나 문화의 변화가 있을 때를25, 식사습관만
바뀌어도 23, 가족과 떨어져 따로 사는 것이 44, 새로운 Job이나 새로운 일을 맡아 할 때를 36으로 보았습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다니엘과 이 세 친구에게 다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고, 새로운 훈련을 받아야 하고, 다른 문화의
쇼크를 받습니다. 식생활이 다릅니다.....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다니엘과
이 세 친구는 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어떻게 했길래 성경은 이들을 향해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을 살았다고 했을까? 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에게도 이 스트레스는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신앙인은 세상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나름대로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다니엘의 스토리는 크리스챤도 똑같이 스트레스를
받지만 결코 이 스트레스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거나 좌절하거나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것을 극복하고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참 모습입니다. 이러한 스트레스 속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긴 비결이 매우 simple하다는 것입니다.
즉, "뜻을 정하는 것" 이었습니다
1장 8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가 마시는 포도주를 먹지 않기로 하였다는 겁니다.
혼란한 한 시대를 헤치고 나갔던 사람 중에 뜻을 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때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기를 붙잡고 마침내 승리한 사람들 중에 뜻을 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뜻을 정한다는 것은 정신없이 밀려오는 사건들, 문제들,
가치들 속에서도 나는 밀려가지 않는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요즘 TV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광고들이 소비자를 유혹합니까? 끊임없이 공격해오는 설득들을 보십시오. 끊임없이 새로이 생기는 가치관들을
보십시오. 이제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이 상대적인 진리 가운데서 내가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내가 뜻을 정한다는 것은 무엇이 참 진리이며 우선순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뜻을 정한다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뜬구름 잡는 형이상학적,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변화가 주는 스트레스가 아주 구체적으로 다가오듯이 우리의 뜻을 세우는 것도
구체적으로 결단하고 마음을 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일상적인 삶을 돌아보십시오. 생활 속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세상의 과학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오히려 스트레스로 올 때도 많습니다. 우리가
늘 보는 TV를 보십시오. 무엇을 구입하라고 하는 반복적인 달콤한 선전광고는 충동적인 구매가 이루어지게 하고
그로 인한 지불의 스트레스를 가져오게 하고, 누구보다 더 싸게 샀냐 라고 하는 선택에 대한 스트레스도
줍니다. 무얼 먹기 위해 식당에 갈 때도 너무 많고 다양한 메뉴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한가지 메뉴만 잘하는 곳이 잘 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곳에 가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메뉴판 볼 필요도 웨이터 얘기들을 필요도 없거든요. 그저 "국밥하나!"
끝입니다. 먹을 때만이라도 스트레스 안 받겠다는 겁니다.
엊그제 한국에 있는 교우 한 분께 이 메일을 받았어요. 그 내용이 이랬습니다.
"목사님께. 목사님으로부터 메일이 하나 와서 혹시나 하고 기대하고 열어 봤는데, 목사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린 듯 싶습니다. 일명 'Hi' 라는 바이러스입니다. 컴퓨터 바이러스까지 조심하고 살아야하는
요즘, 목사님, 몸조심, 컴조심(컴퓨터조심), 자나깨나 바이러스 조심. 더 퍼지기 전에 목사님 메일이 갔던
분들께 다 연락하셔서 메일 절대 열지 마시라고 전하십시오." 저는 보통 설교준비를 컴퓨터로 하는데
이번 주는 일찍 설교를 마무리해야지 하고 서둘러서 마치고 있었는데. 목요일 밤에 회의하는데 중간에 전기가
한번 나갔다 들어왔는데 컴퓨터에 있던 그 설교내용이 다 날라 갔습니다.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지요.
여러분들도 다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즉, 이렇게 세상의 스트레스도 구체적으로 종목별로 오듯이 우리들이 뭔가 뜻을 정하여
내 마음을 이러한 스트레스로부터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결단 역시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배에서나 어떤 모임에서 은혜를 받고 결심할 때의 기도나 마음의 결단이
얼마나 애매 모호하고 추상적일 때가 많습니까? 예를 들면, "매일 매일 기도하며 매 순간 숨쉬는
순간마다 기도하겠다. 거룩하게 살겠다. 선한 일을 하며 살겠다. 말씀대로 살겠다." 이런 것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막연한 결심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구체적인 스트레스를 향해 막연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크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내가 행할 수 있는 손에 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결심이
필요합니다.
부부세미나를 하면 일반적으로 마지막 시간에 부부 자신들의 결심을 함께 쓰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때 구체적으로 쓰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루에 30분이라도 대화를 하겠다",
"이제 서로 존대 말을 하겠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온 가족이 꼭 식사를 같이 하겠다",
"하루에 30분 운동을 안하면 벌금 10불을 내겠다" 등등 구체적으로 씁니다. 그리고 그렇게 쓴
결심을 그분들의 수료장에다 금박으로 새겨서 좋은 액자로 만들어 줍니다. 깜짝 놀라지요. 그리고 거실에다
걸고 날마다 보고 구체적으로 행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추상적으로 쓰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제부터는 행복한 가정이 되겠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부부가 되겠다"
"세상가정과 구별되는 거룩한 가정이 되겠다" 보통 이런 가정들은 세미나 끝나고 돌아가면서
차안에서 싸웁니다.
자, 다니엘과 세 친구의 경우를 보십시오. "우리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겠다." 애매한 것이 없습니다. 분명하고 구체적입니다. 먹든지 안 먹든지, 그리고 무엇을 안
먹겠다는 대상이 분명합니다. 엄청난 스트레스가 나를 에워쌌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약점을, 부족한 부분을
하나씩 잘라가며 정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어디서 오는지 모른
채, 애매 모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작은 것부터 뜻을 정하십시오.
두 번째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뜻을 정하는데 있어서 왜 그들이 하필 왕의
진미와 그가 마시는 포도주를 먹지 않기로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에 대한 주석은 "그 음식들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대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당시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만 이겠습니까? 마치 우리들의 쓰고있는 생필품 중에는 여호와증인들이 세운
회사에서 만든 것도 있고, 반 기독교적인 회사에서 만든 것들도 많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상에게 왔다고
상품을 추적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당시에도 그들의 생필품은 다 바벨론 이라는 거대한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의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이미 그곳에서 교육받고 그 나라의 경제
정치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만약 그들이 이런 현실을 부인하고 그것이 우상들에게 절했던 것이기 때문에 안
먹었다 라는 것은 너무도 극단적이거나 다니엘을 부분적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은 이유는 그 좋은 음식과 그 좋은 포도주에
자신을 길들여지지 않게 하겠다는, 그 좋은 환경에 자신들을 빠뜨리지 않게 하겠다는, 처음 이 땅에 왔을
때의 그 마음을 지키겠다는, 고국에 있는 자기동족들의 고통과 아픔을 잊지 않겠다고 하는 분명한 결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생활의 안락함, 편안함이 나를 끌고 가게 하지 않기 위해, 이른바 처음에 가졌던 마음, 하나님의
마음, 그 비전이 자신을 끌고 가게 하기 위해 그들은 그 좋은 왕의 음식과 왕의 포도주를 멀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가 기억납니다.. . 독일군 장교가 타는 모터 싸이클 이야기
저는 이것이 나의 삶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삶. 끊임없이
다가오는 삶의 요구에 끊임없이 따라가다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에릭 프롬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소외'라고 했습니다. 소외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것" 즉 "처음 창조주가 우리에게 원했던
삶과는 관계없이 세상의 구조와 모순 속에서 아무 의미 없이 마치 다람쥐가 채 바퀴를 돌 듯이 살아가는
모습"을 '소외'라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소외, 물질적 풍요 속에 있지만 참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사는 것이 현대인들이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인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이나 취미생활로 해결할 수
있는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보다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다 그렇게 사는
게 아니냐구요.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만약 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인생의 전부라면 크리스챤과
일반사람들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크리스챤이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진정한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합니다. 현대의 문명이 주는 풍요와 세상이 주는 안락에
자기 자신을 맡기지 아니하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향해 왕의 진미와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거부하는 다니엘의
모습은 후에 느부갓네살 왕 이외의 어떤 신에게든 절하는 자는 사형을 처할 것이라고 하는 칙령 앞에서도
담대히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하루에 세 번씩이나 절을 하는 바벨론의 총리대신 다니엘을 그릴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최고의 복지국가를 자랑하는 스웨덴이 자살율이 세계 1위이고,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다고 하는 이 땅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이 스트레스로 인해 잠 못 이루거나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수면제와 위장약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반면 이번 10월에 우리교회 단기선교팀이
가게 될 방글라데시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의
자신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 행복지수는 세계 1위로 가장 높습니다. 물론 그들이 자기 나라 외에는 본적도
경험한 적도 없어서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가 오히려 우리들의 삶에 더 많은
스트레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누릴 수 있지만, 부하지만 그 누리는 것을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잇는 마음, 모든 스트레스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평생을 아프리카 선교사로 살다가 아프리카에서 죽은 영국 선교사 한 분이 있습니다.
죤 스터트(John Stuart)입니다. 그분은 영국의 상류 귀족가정에서 태어나 켐브리지에서 공부하셨습니다.
가만있어도 엄청난 명예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후에는 켐브리지 7인 중의 한 분으로
추대되었던 분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치 않게 한 교단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선교단체의 사무실에
들리게 되었는데 그 곳 지하실에 쌓여있는 선교지로 나갔던 선교사들이 쁹아가지 않은 짐들을 보게
됩니다. 이제는 주인 없는 짐들이 창고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안락한 삶을 돌아보게 되고
깊은 도전을 받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꿈을 꾸게 됩니다. 그곳을 나와 집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으로 갑니다. 한참동안 중국에서 같이
선교를 하다가 중국을 허드슨에게 맡기고 당시 아무도 가지 않는 땅 검은 대륙 죽음의 땅, 아프리카로 떠나게
됩니다. 그후 30년 후, 그는 노년의 나이로 아프리카 오지의 어느 조그마한 움막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스터트를 파송했던 그 선교단체의 사무실에 가보면 지금도 그의 남아있는 사진 두 장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스터트가 상속받았던 영국 런던의 3층 짜리 저택의 사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쓸쓸하게 죽어갔던 초라한 아프리카 움막의 사진입니다. 그는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모든 것을 다 누린다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누릴 수 있는데 누리지 않고,
가질 수 있는데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오고 가는 시간 속에서 영국 런던의 크고 화려한 저택을 소유한 사람은
그렇게 많았지만 지금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1평 남짓한 움막에서 쓸쓸히 죽어간
죤 스터트를 우리는 오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로 말입니다.
다 선교지에 나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가난해지자는 것도 아닙니다. 내 삶의 의미와
방향을 깨닫고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삼갈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은 오늘의 풍요함과
편리함이 주는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뜻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위하여 작은 것부터 행해 보십시오. 비록 스트레스 속에 살지만 모든 스트레스를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 같이 생각해 보십시오.
1. 당신이나 당신의 가족이 가장 많이 받는 스트레스는 무엇입니까?
2. 당신은 평상시에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결하시는지 나눌 수 있습니까?
3. 궁극적으로 당신의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그 뜻을 찾고 있습니까? 기도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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