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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7.22. 장찬영 목사

왜 안식이 필요합니까?

창세기 2:1-3

현대문화의 한가지 현저한 특성이 있다면 스피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단 한번의 클릭으로 전세계를 접속하여 온 세계의 정보를 한순간에 공유할 수 있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삶은 좀 더 편리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딜레마는 이 편리함이 우리의 삶의 바쁨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게 되었지만, 우리들의 바빠짐이 삶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로 인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고 있지만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안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왜 안식이 필요합니까?"

I

현대문화의 두 가지 현저한 특성이 있다면 하나는 스피드요 다른 하나는 정보의 폭발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단 한번의 클릭으로 전세계를 접속하여 온 세계의 information을 한순간에 공유할 수 있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한 권의 베스트셀러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한 기간을 조사한 타임지는 1956년도에는 6개월 이상을 한 권의 베스트셀러가 독자들을 소유했지만, 이제는 두 달을 채 끌지 못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만큼 새로운 책, 베스트 셀러의 책들이 매주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간 그 결과로 우리의 삶은 좀더 편리해 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딜레마는 이 편리함이 우리의 삶의 바쁨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게 되었지만, 우리들의 바빠짐이 삶의 의미를 더해 주고있지는 못하다는 사실로 인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고 있지마는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나간 한 해 동안에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주목했던 베스트셀러 가운데 이러한 바쁜 현대인들에게 어필해온 책이 하나 있습니다. 불란서의 철학자이면서 에세이 작가이신 삐에로 쌍소란 사람이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느림과 신속함이 벌리는 열띤 공방전의 세상에서 속도가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현대문화를 스스로 기소하는 검사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느리다는 것을 게으름으로 아니 기업에서는 마치 무슨 죄로까지 정죄할지 모르지만 이 저자는 오히려 느림이 미덕일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아침마다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는 감동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저자는 연못의 어두운 물과 밤이 뒤섞일 때 그것을 느긋하게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밤의 얼굴을 최근에 목격해 본적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현대속도문화의 가장 커다란 비극이 있다면 "안식의 상실"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는 현대문화의 구원이 있다면 안식을 회복하는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는 전교우 수양회를 갖는 주간이기도 하고 또한 이 여름철에 짧더라도 휴가를 계획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오늘 우리가 다룰 안식에 대한 문제는 매우 중요한 학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안식 혹은 휴가"하면, 그것을 참 현실을 모르는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나에게 무슨 안식의 여유가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질문은 생활고에 바쁜 분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임하는 전문적인 분야에 있는 분들께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오랜 시간을 가져야만 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가져도 안식하지 못할 수가 있고, 짤막한 시간을 가져도 그 질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안식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의 형태 또한 매우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늘 책이나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 혹은 활동범위가 사무실에 한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 들어가 흙을 만지며 땀을 흘리고 노동하는 것이 오히려 안식일 수가 있고, 반대로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을 내어서 커튼을 닫고 조용히 책을 읽고 열중하는 것이 오히려 안식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안식! 그렇다면 이 안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안식을 처음으로 만드신, 그리고 안식이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안식이 필요 없는 유일하신 분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도 쉬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엿새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음을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그분이 쉬셨을까요? 여기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안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II

"안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오늘 본문에서 안식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일반적으로 왜 쉬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거의가 피곤해서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인 안식의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1절과 2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쉬신 중요한 이유가 한가지의 동사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그 다음에 2절입니다. 창세기 2장 2절에는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어떤 단어가 강조되어 있습니까? "다 이루니라" 또 지으시던 일이 다했기 때문에 "그분이 쉬셨다"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분은 창조의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마치셨다는 말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창조하신 만물을 돌봐야 하는 엄청난 섭리의 사역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쉬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창세기 1장을 들여다보면 그 대답을 쉽게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루하루 창조의 과정이 마무리될 때마다 또 다음날에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한 날의 창조를 마무리하면서 그 소감을 매우 인상 깊은 한 단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나타납니까? 창세기 1장에, 예를 들어서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보신 하나님의 소감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좋았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히브리어로 좋았다는 단어는 "토프(Toph)"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우리말에 "좋다"라는 단어와 상통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격, 마치 노래하면서 외치는 추임새같은 "좋구나!"하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안식이라는 것은 지나간 엿새동안의 창조를 돌이켜보며 그것을 즐거워하는 시간이셨던 것을 여기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일종의 하나님의 자축의 시간, celebration의 시간이었다 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가 있을까요?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안식이라는 것은 즐거움과 감사의 시간일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일생(一生)이란 말은 말 그대로 "딱 한번 주어지는 삶"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한번의 인생을 마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불행한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일만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전혀 enjoy하지도,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사는 그런 모습의 사람들이 우리주변에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 까지도 예외 없이 지나치게 바쁘고 서둘러 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쫓겨가고 있는 삶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한 기독교문화 신학자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있는 세속적 가치관에 설득되었거나 영향을 받은 까닭이라고 지적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있는 중요한 가치관의 하나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입니다. 혹은 기능주의적 가치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는 시간이 생산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마음, 일을 할 때 비로소 왠지 편안한... 이것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인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가치관 중에는 심미적 가치관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솜씨와 창조를 바라보는 여유 또한 일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뒤에는 바로의 군대와 앞에는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바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고 아우성을 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했습니까? 그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그만 가만히 있으라!" 당황해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라고 모세는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서두르는 제자들에게 잠시 길을 멈출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좀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전도 갔다 와서 서둘러 보고하는 제자들에게 잠시 중단하자고, 먼저 가서 쉬자고 제안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리고 역사하신 그분의 역사하심을 좀 생각해보라고,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깊이 있는 생각으로 바라보면 이 바라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바라볼 때 감사가 나오고 바라볼 때 은혜를 회상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찬양이 나오며 비로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배가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안식에 관한 놀라운 성경의 말씀가운데 하나는 히브리서 4장 10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즉,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안식 속에 들어가 있는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인생의 장에서는 잠시 과거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안식일의 break time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 무더운 여름의 계절, 여러분들에게 과거를 돌이켜보는, 그리고 예배를 회복하는, 감사를 회복하는 이런 안식의 여유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III

안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로 안식이라는 것은 현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안식이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이라면 둘째로 안식은 현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안식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피곤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이 우리에게 피곤함에서의 회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에너지의 소모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소모되면 일단 그 에너지가 보충되지 않고는 우리는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을 계획할 때 그 안식이 우리의 회복에, 육체적 회복에, 또 정서적인 회복에, 또 우리의 영적인 회복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 안식인 것인가를 반드시 먼저 우리는 고려하고 물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식, 휴식을 취한 후, 배우는 가장 큰 교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아! 이렇게 하면 휴가를 잘못 지내는 것이로구나"입니다. 그래서 흔히 휴가를 위한 또 다른 휴가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곤 합니다.

그렇다면 original한 처음 안식일의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과거를 돌아봄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메시지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여기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복 주사" 그리고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안식이란 날을 구별하신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의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날을 축복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거룩하다는 말은 여기서 '구별하다'는 뜻이 더 합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을 재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날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정말 축복되고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을 그 분은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가를 계획하실 때 안식을 계획하실 때 반드시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번 여가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축복된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가 있겠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중세기의 수도사들이 수도하는데 힘들다가 안식년을 맞이하면 도시로 나가 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광야, 더 메마른 사막으로 나가서 안식년을 가진 이유를 조금은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예배와 기도에 전념하면서 그들은 영성을 다시 회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Holy Vacation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휴가를 혹은 안식을 제대로 보내기 위해서 광야에 가서 수도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안식의 플랜이 무엇이든 그것이 나를 거룩하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나를 건강하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여러분 자신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휴식의 플랜을 갖고 계십니까?

여러분, 놀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건강한 놀이가 건강한 안식을 가져다 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교육은 놀이를 정죄하는 풍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 있어서 아마도 전통적인 한국 부모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 단어일 것입니다. 하나는 "공부해라!" 그리고 또 하나는 "놀지마라!" 그것입니다. 한 아이는 자기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Michael Don't"라고 하더랍니다. 부모님이 하도 자기에게 Don't, Don't '하지말라'고 하여서 자기의 last name이 Don't인줄 알았다는 겁니다. 요사이 현대의 교육학은 놀이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놀이는 학습이라는 것입니다. 놀이를 통해서 우리는 건강한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그리는 천국에 대해 공부하다가 저는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회복된 예루살렘, 혹은 새 예루살렘, 시온의 거리, 천국의 거리를 그리면서 스가랴 8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성읍 거리에 동남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치리라" 천국은 천진난만한 어린 소년 소녀들이 장난치고 있는 거리라는 것입니다. 놀이는 유치한 것이거나 나아가 죄악이 아닙니다. 건강한 놀이는 우리의 여가와 우리의 안식의 회복에 도움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볼링이 기독교에서 만든 것이란 것을 아십니까? 볼링 교과서를 보시면 1페이지에 볼링의 시조가 마르틴 루터라고 되어있습니다. 본래 볼링은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다가 잠시 쉼의 여유를 갖기 위해서 공놀이를 하던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합니다. 종교개혁을 하던 루터가 얼마나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스트레스가 심했으면 핀을 세워놓고 이것은 마귀다 그리고 거기에 공을 굴려 쓰러뜨리며 좋아했겠습니까? ...

놀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놀이에 빠지지는 마십시오. 건강하지 못한 놀이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놀이가 끝난 후에 힘을 얻기 보다 내가 더 지쳐야 한다면, 그리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놀이를 생각한다면 나는 놀이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놀이가 나의 인생에 활력을 더해줄 수가 있다면, 육체적이고 정서적이고 영적인 회복에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놀이도 안식의 한 방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꼭 놀이만 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도 훌륭한 안식일 수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도 말입니다.

불란서 남부에 있는 떼제 공동체라는 곳이 있습니다. 유럽의 영성은 깊은 밤이고, 어둠입니다. 그런데 떼제의 언덕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넘쳐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수많은 교파의 젊은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있는데도 너무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선한 평화가 있습니다. 떼제 공동체의 곳곳에는 작은 팻말들이 계속 붙어있었습니다. 그 팻말은 바로 Silence, silence, silence 영어로, 독일어로, 혹은 불어로 Silence라는 간판이 쓰여있었습니다. 침묵! 침묵! 침묵! 거기에서는 오직 한가지의 규칙을 요구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침묵하는 것입니다. 며칠 동안 그 동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모두가 다 침묵하는 것입니다. 별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그냥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겁니다. 이따금씩 수사들이 인도하는 찬양시간에만 단순히 찬양을 부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거기서의 며칠이 지나고 나면 그들이 치유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새로워집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병원에 가지는 않아도 될 정도이지만 이따금씩 아플 때 우리가 무얼 합니까? 아프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 치료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음, 그것이 나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부러 그런 시간을 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치유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경험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7절에 보면 하나님도 안식하시고 이 하나님이 안식을 통해서 얻으신 하나님의 경험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하나님이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영어성경 King James Version에 보면 좀 더 의미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지막 말씀, "하나님이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가 "He rested and was refreshed." 즉, "그분은 안식을 통해 새로워지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안식의 필요가 있었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얼마나 이 안식이 필요하겠습니까? 안식은 곤고한 나의 현재를 새롭게 합니다.

IV

안식의 의미, 첫째로 안식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안식은 현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 번째로 안식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안식은 안식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만약 안식자체에 의미가 있었다면 하나님이 쉬셨다! 그리고 성경은 거기서 끝이 나야 됩니다. 창세기 2장 3절로 성경이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에 다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그가 창조한 만물을 돌아보시고 인생을 돌아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류의 위대한 섭리를 그 안식의 타이밍을 통해서 더욱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안식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미래를 planning하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안식의 또 하나의 의미요 축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은 결코 낭비가 아닌 것입니다. 바쁜 것만이 좋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어느 민족보다도 더 바쁘게 삽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본래 한국인들이 급한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농경문화라는 것 자체가 태양과 비, 자연의 은혜를 기다려야 하는 기다림의 문화이기에 또한 우리민족은 노래와 춤을 즐겼던 민족이었고, 아는 대로 그 박자나 춤사위가 결코 빠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몽룡을 기다리며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이의 마음은 기다림 자체라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밥을 짓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장작으로 불을 지피다가 나중에는 벼로 불섶을 만들어 오랜 시간동안 밥을 만들고 뜸을 들이는 것을 보아도, 또 밥이 다 된 후, 다시 그 밥으로 누룽지를 만들어 주시고, 뜨끈한 누룽밥으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디저트를 만들어 주십니다. 또 그 밥이 온기가 지속되도록 아랫목에 그 밥그릇을 조용히 묻어 두고 밖에 나가있는 식구들을 기다리는 그 마음을 회상해볼 수 있습니다.

한때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이어령 교수가 쓴 글에서 그는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이 언제부터 바빠졌느냐? 그것은 바로 라면이 나온 때부터 바빠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동의하실지 모르겠지만, 소위 인스턴트 문화가 출현한 그때부터 한국 사람들이 급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라면은 일본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한국처럼 라면이 발달된 나라가 없을 정도로 라면의 종류를 다양화시킨 것은 한국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는 숫자마다 라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 일번지 라면, 이, 이백냥라면, 삼, 삼양라면, 사, 사발면, 오, 오양면, 오뚜기라면, 육, 육개장 라면, 칠, 칠보면, 팔, 팔도라면, 구, 구운면, 열, 열라면... 이런 소위 인스턴트 문화 속에서 우리는 너무 급해지고 기다림의 여유를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V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서두름의 졸속에서 자유 하십시오. 느긋하게 기다리시면서 하나님의 그 멋진 간섭을 기대해 보십시오. "인생은 짧지만 각자의 삶에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라고 말한 어는 철학자의 말을 여러분 앞에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친히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분은 쉼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 오는 순간, 그 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진정한 평안이 회복됩니다. 그는 진실로 안식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을 잃어버렸습니까? 다시 그 분 앞에 오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십시오. 그곳에서 멈추지 마십시오. 그 분의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그 풍성하신 은혜 그리고 그의 넓은 평안 안에 거해 보십시오. 내 안에서 그 안식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회복되는 안식의 마음속에서 다시 본 하늘과 땅, 그 하늘과 땅은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과 땅인지,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을 위해서 예비하신 그 놀라운 미래, 또 미래를 향해서 손짓하는 하나님의 손길의 인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발행하는 월간 소책자에 무명으로 실린 어느 환자의 글을 전해 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헬렌 켈러에게 당신이 만약 시력을 찾는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가장 먼저 바닷가로 달려가 새벽의 동터오는 그 황홀한 모습을 보고싶다고...
그리고 시내 사거리에 서서 일터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 그 활기찬 아침의 모습을 보고싶다고... 그리고 그동안 만져보기만 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밤새도록 바라보고 싶다고.

만약 내가 이 침대에서 일어나 병원 문을 나설 수 있다면, 나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 이제는 물어보는 사람도 없지만 말이다. 그래, 나도 헬렌 켈러처럼, 새벽의 동터오는 바닷가로 달려가야지. 그 장엄한 새벽태양을 온 가슴으로 맞이해야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저 아무 느낌 없이 스쳐갔던 모든 계절들을 손으로 만지며 뺨에 비비며 감격해야지.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울까! 그래, 그리고 나도 다시 일터로 달려가야지.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일할 수 있었던 그 축복을 다시 느껴봐야지. 그들이 내게 잘했건 못했던 같이 일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 그래, 다 사랑해야지. 다 용서해야지... 돌이켜보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어. 그리고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봐야지. 연애할 때 자세히 본 후, 한번도 제대로 본적이 없는 것 같은 나의 사랑스런 아내의 얼굴. 사랑스런 눈길로 나는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얘기해 줘야지. 그리고 나의 분신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나도 밤새도록 바라봐야지. 나와 똑같이 생긴 그 얼굴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솜씨에 감격해야지...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그리고 그분께 용서를 구해야지.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바쁘게만 살아온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용서해달라고... 그리고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해야지.

(부천 성가병원 '샘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