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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7.1. 장찬영 목사
아름다운 사랑을 위한 두 가지 법칙
요한복음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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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랑과는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 같은데 사랑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배워야 하고 다가서야 합니다.
여기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아름다운 사랑의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
I
예수님께서 부활 후,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른 말씀 일절 안하시고 하시는 말씀이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반복되는 질문에 얼마나 베드로의 마음이 당황스럽고 무안했을까 우리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간 자기 처지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이 말씀의 원어적인, 본래적인 뜻은 이렇습니다.
처음,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쓰인 사랑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아가페'(agape)입니다. 아시는 대로 이것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무조건 사랑하기에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즉, "시몬아 너는 나를 죽을 수 있을 만큼 정말 사랑하니?"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간 처지에 어떻게 시몬이 주님을 아가폐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것은 베드로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는 주님을 '필레아'(phillea)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즉, "나는 당신을 동료애로, 혹은 스승을 섬기는 사랑, 친구의 우정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 꼴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을 부인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한번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으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두 번째 대답에도 여전히 아가페의 사랑을 말할 수 없어 필레아로 대답합니다.
이제 세 번째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한 사랑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묻습니다. 똑같이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니?" 그런데 여기서 사용하신 사랑이란 말은 앞에 두 번 동안 물으셨던 '아가페'가 아니라 시몬이 대답했던 '필레아'라는 것입니다. 즉, "시몬아, 그래 네가 나를 필레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니?"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그의 눈높이로 내려가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끝까지 필레아로 대답하는 베드로의 마음을 탓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냐고 한 마디 내색도 않으십니다. 마침내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아로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사랑을 받아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II
여러분, 수영선수가 수영을 못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고, 축구선수가 축구를 못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듯이, 그리스도인과 사랑의 관계는 결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기독교인에 대한 정의는 아무 의심없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그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양식도 당연히 사랑이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기 때문입니다. 안 닮았다면 그것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 . .교회학교 교사들과 얘기하다보면 재미있는 얘기를 듣습니다. 보통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아이만 알고 부모들을 몰라도 나중에 보면 그 부모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쩔 때는 뒷모습만 봐도 안다는 겁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나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똑같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 아이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가 교회 일로 아이가 잠든 후에 집에 들어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 자는지 궁금해서 아이 방에 들어가 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기가 막힌 장면을 보게 됩니다. 자는 모습이 저와 너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 때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깊이 잠들면 우리가 마치 의자에 앉을 때 자연스레 두 다리를 포개듯이, 그렇게 다리를 꼬고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집사람이 저에게 그렇고 하고 자면 안 힘드냐하는 겁니다. 하여간 저는 자는 통에 기억도 없지만 분명한 건 제가 그렇게 잔다는 것입니다. 집사람 말은 "억지로 해도 어려울 텐데 어떻게 그렇게 하고 자느냐"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저희 꼬마가 그렇게 하고 자는 겁니다. 기가 막히더라구요. 아니 처음 볼 때는 소름이 끼치더라구요. 여러분, 제가 그걸 가르쳤겠습니까? 또 가르친다고 또 그게 됩니까? . . .그게 얼마나 고난도의 자세인데요. . . 맞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원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만약 무엇보다도 내게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를 닮은 것입니까? 극단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도는 좀 못해도, 성경은 좀 몰라도, 봉사는 좀 못해도 용서될 수 있지만 사랑이 없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III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위한 두 가지 법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법칙이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말처럼 사랑에는 기술이 필요하듯이, 주님의 진정한 사랑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아픔공유의 법칙"입니다.
작년 이맘 때쯤에 타임지에서는 금세기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 100인을 선정했습니다. 예상했던 사람들이 뽑히기 시작했는데 유독 한 한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놀라움과 호기심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지금도 현역에서 TV 토크 쇼 진행자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흑인 여성,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입니다. 사실 그녀가 여성이고, 게다가 흑인이라는 것이 놀라울 뿐이지, 오프라 윈프리는 명실공히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방송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녀의 쇼는 지금도 매일 평균 1,500-2,0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시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32개국의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위성으로 중계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가 어떤 책을 방송 가운데 추천하기만 하면, 당장 베스트 셀러에 진입하는 엄청난 대중적 영향력이 있습니다. 일전에 한번은 장애자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한 모금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을 때,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100만 불의 성금이 모였었습니다. 또한 2년 전 세계적으로 광우병이 돌 때, 윈프리가 방송중에 무심코 한마디, 조크를 던졌습니다. "이제부터는 햄버거를 먹지 말아야겠다." 그런데 이 한 마디가 미국 전역의 햄버거 매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축산산업의 도산을 야기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오프라 윈프리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고, 축산업자들이 수백만 달러의 소송을 거는 웃기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침에 우리가 이 윈프리에게 배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흑인 여자가 그토록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수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윈프리의 비즈니스 마인드나 방송인으로서의 쇼맨쉽의 차원이 아닌 진실한 사랑의 이야기, 그녀의 작지만 따뜻한 마음이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에 대한 글을 썼던 사람이 있습니다. 데보라 탠넨(Deborah Tannen) 교수로 지금 Georgetown 대학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분입니다. 그녀의 글을 읽어 보면 실제로 윈프리의 지나온 삶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윈프리, 그녀는 실제로 많은 상처와 아픔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1954년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지냈을 그의 어린시절을 생각해보면 어렸을적부터 얼마나 상처가 많았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그녀는 세 살 때 처음으로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고 암송하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아마도 그녀의 어린 시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준 영향력은 상당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말씀의 힘이 그녀로 하여금 불우한 환경을 원망하기보다는 더 밝은 면을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했던 시절의 아픔과 약함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과거의 아픔을 또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과 나누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녀는 아픔을 가진 자의 친구입니다. 모든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윈프리를 자기의 친구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윈프리는 그들의 아픔에 동참합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나오면 같이 울기도 하고, 진심으로 안아 주기도 하고,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폭로하기도 합니다.
한번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폭식하는, 이른바 거식증에 걸린 여인이 출연했습니다. 그녀의 아픔을 함께 동감하던 윈프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나도 과거에 그런 폭식의 경험이 있어요. 핫도그를 한 박스나 먹은 적도 있어요" (방송국에는 눈물과 함께 폭소가 터졌습니다.)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한 여인에게 윈프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과거에 코카인을 했던 적이 있어요." . . .여러 남자에게 윤간을 당한 충격에 사로잡힌 여인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강간당했던 경험이 있어요" . . .그녀에게는 비밀스러운 숨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감화시키는 능력을 '자기 폭로형 친밀감'(self-revealing intimacies)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녀는 상대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공유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앞에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졌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나 혼자만 이렇게 고통스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구나"하면서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로 아픔이 나누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윈프리의 사랑은 이미 2000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아픔을 가진 자는 갈대 같은 사람, 시몬 베드로요, 그 아픔을 공유하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의 아픔을 아시고 그를 안아주시고 같이 울어주시는 예수님. 이미 주님은 살면서 겪어야 하는 인생의 모든 아픔을 친히 경험하시고, 마침내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내가 아플 적에 같이 울어주시고 내가 고통스러울 때 같이 힘들어하십니다. 진정한 사랑, 그 사랑의 원칙은 아픔을 함께 나누는 '아픔공유의 법칙'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사랑을 나눠주십시오. 힘들어하고 지쳐있는 지체들에게 찾아가셔서 같이 아파해 주십시오. 그저 같이 울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번 멕시코 단기선교를 준비하면서 한 단원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제가 그 기도에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기도는 대략 이런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또 무엇을 준들 그들의 마음이 감동이 되겠습니까? 그저 가서 그들을 붙잡고 울게 주세요.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의 불쌍한 영혼을 보면서 가슴아파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아직도 냉랭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주세요. 부족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통해 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세요. . ." 옳습니다. 아픔을 공유하겠다는 마음, 이 마음이야말로 어떤 무엇보다도 중요한 마음인 것입니다.
IV
이제, 진정한 사랑을 위한 두 번째 법칙은 끊임없이 격려하고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즉, '격려와 기회부여의 법칙'입니다.
만약 주님이 베드로에게 끝까지 아가페의 사랑을 고집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그분은 기다리고 참으시는, 그래서 다시 격려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무례한 사랑을 일방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예상하지 않은 반응이 일어나면 쉽게 분을 품고 좌절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어렸을 적 한국에서 경험했던 모습과 많이 대조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에서는 음식점에 가서 음식 하나를 먹어도 먼저 어린아이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에게 맞는 키높이 의자를 가져다주고, 음식 나올 때까지 심심하지 않도록 종이와 크레용을 갖다주고, 음식 주문할 대도 제일 먼저 묻습니다. 또 얼마나 자세하게 친절하게 묻습니까? "무얼 먹을거냐? 어떻게 먹을거냐? 아페타이즈는, 디저트는? 고기는 바짝 구울까? 살짝 구울까? 대강 구울까? 크게 해줄까? 작게 해줄까? 또 아이스크림은 바닐라, 초코릿. 스트로베리, 메론 어떤걸로. . . "
. . .저는 어렸을 적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같이 한 밥상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했던 것이 식사 도중 할머니가 갑자기 맛있는 게 나오면 입에 집어넣었던 것을 빼서 주는 겁니다. 내가 맛만 봤는데 맛있으니, 이제 너 먹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싫어하는 국인데 이거 좋은 거다 그러면서 갑자기 제 국그릇에 다 쏟아 부어 버리는 거예요. 이것처럼 황당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표정 지으면, 당장 하시는 말씀이 "애비야, 애미야? 얘가 요즘 버릇이 나빠졌다" 하시는 겁니다. 별 변명도 못하고 꾸역꾸역 먹다보면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던지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그분들의 사랑을 왜 모르겠습니까? 문화의 차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사랑은 그렇게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에게 보인 주님의 사랑을 달리 표현하면, '사랑은 상대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은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조연경 씨라는 작가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프로포즈]라는 콩트집을 썼는데, 그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가난한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아기를 낳는 출산일이 가까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묻습니다. "당신이 아기를 낳으면 무슨 선물을 해 주면 좋을까?" 아내는 아기를 낳는 순간에 장미꽃을 꺾어 달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잠을 자는데 갑자기 아내가 해산을 하려고 합니다. 급히 산부인과로 달려가서 새벽 두 세시 경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 순간 남편은 아내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장미꽃을 가지러 나갑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문을 연 꽃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온통 거리를 헤집고 찾다가 낙심해서 돌아오는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자기네들이 전세들어 살고 있는 동네 어떤 집의 담밖으로 줄장미가 나와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밤에 가시에 찔려가면서 장미를 꺾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미꽃을 들고 아내가 있는 병원으로 가는데 갑자기 이 남편의 마음이 찡한 감동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 .그리고 울먹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만약 아내가 아기를 낳는 날 코트를 사달라거나 보석반지를 사 달라고 했다면 내 형편에 도저히 할 수 없었을 터인데, 새벽이든 밤이든 내가 할 수 있은 것, 가서 꺾기만 하면 되는 것을 요구하다니, 아내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 . 아내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진실된 배려와 격려가 있는 사랑,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사랑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베드로의 사랑을 썼던 요한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랑의 사도로 불리우는 가장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제자 아닙니까? 이 사도 요한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사랑의 격려를 받은 한 분의 간증을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19개월 된 뇌성마비 아들을 둔 엄마이자, 교회에서 고등부를 맡고 있는 전도사의 아내입니다. 저희 부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가운데 언제나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뇌성마비 아들이 걸림돌이었으며 가시였던 것입니다. 내 아들이 건강하기만 하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에 정말 부러울 것도 없고 또 주님의 일도 더욱 열심히 할 것 같았습니다. 같은 교역자 아내들이 좀 더 나은 내조를 위하여 간호학원, 신학대학, 혹은 직장생활을 하며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왠지 저는 초조해졌습니다. 나는 언제쯤이면 저런 뜻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오늘은 이 병원, 내일은 저 병원, 그저 병원 문턱을 뛰어 다니는 일뿐이었습니다. 달력은 온통 병원예약표시로 가득 차 있었고, 밤이면 밤마다 칼날처럼 울어대는 아이를 달래느라 밤잠을 설치면서 그저 처량하게 넋나간 듯이 앉아 있곤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뇌성마비 아들이 흠이 된다하여 남편이 전임교역자로 결정된 교회로부터의 거절을 당할 때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뇌성마비 아이를 데리고 목회하기란 어려우니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라는 주위의 충고를 받을 때마다 말도 하지 못한 채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저와 아이를 데려가 주십시오. 너무 힘이 들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런 저를 남편은 탓하지 않고 늘 말씀으로, 더 큰 사랑으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사다준 책 가운데 사도 요한에 대한 글을 읽는 중 저는 눈을 뗄 수 없었고, 가슴은 마구 벅차 올랐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신 일, 돌아가시기 전 당신의 늙은 어머니를 부탁하신 그 명령이야말로 바로 제 자신의 사명이요 삶이었습니다. 요한의 동창생 제자들이 주님의 일로 이름을 날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요한은 오직 늙어가는 주님의 어머니를 돌보는 일로 청춘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단지 주님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처량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요한 사도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사랑 받는 제자였기에 어떤 친구들보다 더 크게 성공할 수 있었을 요한, 더 많은 주님의 일을 멋지게 감당할 수 있었을 요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 할머니 수발이라는 하찮게 보이는 일을 묵묵히 감당해 내었던 요한, 그 요한 사도가 마침내 저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으로 제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나의 선배 요한 사도, 그 옆에 제가 서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제서야 주님께서 얼마나 저를 사랑하시고 계시는지 비로소 깨닫고,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감사 드렸습니다. 그리고 울고 보채는 뇌성마비 아들을 바라보니, 더 이상 나의 짐도, 가시도 아니었습니다. 그 아들이야말로 나의 보배요, 나의 보석이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요한이 주님께로 받은 그 사명, 그 사랑을 나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를 다시 한번 일으키셨습니다. 절망가운데 있던 저의 가족을 다시금 격려해 주시고 새 소망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함께 같이 아파합니다. 주님이 항상 우리에게 그러하시듯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 .
* 같이 생각해 봅시다.
1. 당신은 당신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그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습니까?
2. 당신이 고통 가운데 힘들어 할 때, 누군가 당신의 아픔을 진심으로 나눠지신 분이 계십니까? 당신은 '아픔을 공유하는 마음' 이란 어떤 마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사실 '격려하는 사랑'이란 말처럼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 우리가 다 주님께로부터 사랑의 빚진 자라면, 이 사랑의 빚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나누면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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