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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6.17. 졸업축하 및 이효중/홍정표목사 송별주일 - 이효중 목사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

누가복음 15:11-32

이사야서 61:16절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증거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아버지이십니까?
나아가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가정에서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 되새겨보십시다...... (Video Clip 시청).
이 비디오를 보시며 느끼셨겠지만, 모든 아버지들은 우리가 알고 느끼고 있는 것 이상으로 자녀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같이 말씀에 입각해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아버지이신지, 살펴보고 그리고 그런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우리는 과연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겠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아버지이신지 생각해보십시다.

(1) 우선 눅 15:12절 이하를 통해 알 수 있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가 실수를 통하여 성장할 수 있도록 자녀에게 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기다려 주는 아버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둘째가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그걸 받자 마자 몽땅 팔아 가지고 아버지 안보는 대서 흥청망청 쓰고, 돈 떨어지니까 죽도록 고생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며 이해가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실상 세상물정 모르고 경험도 없는 teenager인데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 애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을까요? 자기 평생 아껴 모은 재산일텐데, 이렇게 뚝 떼어 줄 수 있는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겁니다. 이 아버지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아들이 그 재산을 갖고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자식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었을까요? 20절을 보면 돌아오는 자식을 아직도 먼 거리에서 알아보고 달려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무얼 말해줍니까? 아버지는 미리 다 안겁니다. 정말 불 보듯 뻔하게, 자식이 그 재산을 갖고 뭐 할지를 다 아셨고, 오래 못 가서 재산 다 날리고 고생 바가지로 하고, 빈털털이로 돌아올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고생 실컷 하다 집으로 돌아올 걸 알고, 아예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겁니다. 돌아오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아버지는, 한 마디로 아들이 실수와 잘못을 통해 사람되고 철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아버지시다 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실수하는 아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게 기다려주고 기회를 주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죄짓고 넘어지지만,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입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얼마전 어떤 집사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교회 못 가는 날도 있지만, 교회를 가서 자리에 앉게 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나도 모르게 하나님 죽일 놈 왔습니다. 한 주 간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제 맘대로 살고 죄짓다 왔습니다. 봐 주십시오. 용서해주십시오." 그런 기도가 절로 나온 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조금만 잘못 하면, 기다렸다가 벌이나 주고, 지옥이나 보내고 그러시는 속 좁은 분이 아닙니다. 실수 많고 허물 많은 우리들이, 너무 너무 하나님의 속을 썩이고, 하나님의 가슴에 못박는 일을 하지만, 그런 실패와 넘어짐의 과정을 통해 진정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성숙해 갈 수 있게 기회를 주고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2) 두 번째로, 13절을 보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행동으로 사랑하시고 행동으로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20절을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알아 본 아버지는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이 잘못했다는 변명을 끝내기도 전에 제일 좋은 새 옷을, 새 신발을 그리고 값진 반지를 끼우게 하고, 게다가 살찐 소까지 잡아 잔치를 벌려줍니다. 이 모든 것은 행동언어입니다.

그래서 여호야킴 제레마이야스라는 학자가 이 본문을 설명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Father continues to let his conduct speak for him". 아버지는 자식에게 단순하게 말로, "내가 너 사랑한다. 너 용서한다. 괜찮다."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저 몸으로, 행동으로 그의 용서와 사랑을 표현했고 아들은 그 사랑에 그저 거꾸러졌습니다.

루이지에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Multiple Sclerosis를 앓아 휠체어를 타야하는 열살 난 딸을 갖고 있던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암트렉을 타고 기차 여행을 하게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중간에 사고가 나서 기차가 강물에 침몰하기 시작합니다. 부부는 침몰하는 열차속에서 있는 힘을 다해 자기 딸을 구출해 구조대원들에게 넘겨주어 딸의 생명을 건집니다. 사랑하는 딸의 목숨은 건졌지만, 안타깝게도 부부는 침몰하는 열차와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부부의 행동을 일컬어 어리석다, 어차피 불구의 몸인데, 그 아이를 구하는 것보다는 자기들의 목숨을 건졌어야 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고 부모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쟎습니까? 이 침몰하는 열차 안에서 자기들의 목숨을 내려놓으며 불구의 딸을 살려내는 부모는, 곧 근본 하나님과 같으시나, 낮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속하시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행동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3) 셋째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사고치는 자식이나 고분고분한 자식이 다 똑같이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여기에 편애라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아버지가 두 아들 중 누구를 더 사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찌 보면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편애하는 분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녀석이 사고를 치고 집안 망신 다시키고, 게다가 경제적인 손실까지 입혔는데도, 그를 받아주고 아들로 인정해주니 말입니다. 그러나 28절에는 큰 아들이 노하며 들어가기를 거부하자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서, 나가서 권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보십시오. 큰 아들을 달래러 나가는 아버지의 이 그 발걸음은, 속썩이던 문제아 작은 아들이 돌아 올 때도 몸소 밖으로 나갔던 그 발걸음입니다. 즉 속썩이는 자식이나 버릇없이 대드는 자식이나, 큰 아들이나 막내나 편애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눅 15장에는 잃은 양, 잃은 동전,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왜 비슷한 이야기를 세 번씩이나 하신 줄 아십니까? 15:1-2절을 보십시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예수님)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신분 및 수입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시는 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15장의 세 가지 비유는 그 원망에 대한 주님의 대답입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을 지위가 높은 자나 부자만 사랑하시는 속 좁은 분으로 아는 모양인데, 그건 어림없는 생각이고, 그 분은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사람의 직업이나 교육, 어떤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다"고 분명하게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는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행여 여러분 중에 "나는 별로 배운 게 없고, 직업도 변변치 않고 집안도 그저 그렇다"는 생각을 가지고 주눅들어 사는 분은 없습니까? 나 같은 사람은 뭔가 이 교회에 맞지 않아 그런 생각 갖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본문에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세리와 죄인을" 그들의 교육이나 지위 가문과 상관없이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4) 넷째로, 본문이 가르쳐주는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이 어떤 모욕과 수치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아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하고 헌신하는 아버지의 모습니다.

- 12절에 아들이 아버지가 아직 멀쩡히 생존해 계신데, 땅 문서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당장 죽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체면과 명예를 존중하는 그 당시 관습을 고려하면 아버지에게 엄청난 수치를 가져다주는 무례한 행위였습니다
- 20절에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는 노구를 이끌고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여기에 달려갔다고 했는데, 그건 그들의 신앙과 전통과 어긋나는 불경건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이 만드신 거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큰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태도를 보십시오. 아버지는 무슨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빌며 들어가자고 간곡히 부탁하는데 아들이 감히 아버지에게 대들고 따집니다. 우리 성경에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그랬지만, 원문에는 아버지라는 말이 없이 그냥 "이 당신 아들이 돌아오매"로 되어 있습니다. (But he answered his fathers, 'Listen! For all these years I have been working like a slave for you.... But When this son of yours came back) 동생을 동생으로 간주하지도 않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도 않으며 대듭니다. 여기 아버지의 아버지로서의 체면도 존경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 친교실로 가는 복도에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비유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잘 보시면 아버지 옆에 있는 친구들이 나옵니다. 돌아온 자식과 그를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이 부드럽지 않습니다. "아니 이 사람 제 정신이야, 이런 불결하고 못된 놈을 다시 받아들여! 다 된 집안이구만....."하는 경멸과 조롱의 눈빛이 있습니다.

본문에 아버지는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수모와 멸시를 다 참아 냅니까? 24절과 32절을 봅시다.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왔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고 즐거워"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치와 모욕도 감수하는 아버지이십니다. 체면도 신학도 전통도 사람들의 시선이나 손가락질도 아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이 본문을 읽으며 이사야서 53장이 제 가슴에 메아리쳐 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창에 허리 상하시며 물과 피를 쏟으셨는데 그것은 그의 무너지는 가슴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여 여기시며 그 생명 구하는 일이라면 십자가의 수치와 모욕도 기꺼이 받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주시는 일이라면 어떤 수치와 모욕도 감수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적용: 지금까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신 궁극적인 의도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이렇게 좋은 분이구나. 은혜 받았습니다. 좋았습니다. 고개나 끄덕이고 교회 문턱만 나가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살라구요?. 제가 믿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이렇게 좋은 아버지신 걸 깨닫고 감사하며 감격해서 우리도 조금이라도 하나님 닮은 아버지가 되라는 뜻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 닮아, 좋은 아버지들 되어 가정을 세우고 자녀들을 세우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당부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어떤 아버지가 될까 생각하고 적용해 봅시다.

첫째로, 우리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우리 자녀들이 실수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는 여유있는 아버지들이 되십시다.

많은 경우 우리들은 자녀들이 조금만 잘 못하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잔소리, 비난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비교함으로 자녀들의 자존심을 뭉게버리는 일을 합니다. 듣기 싫게,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해서 아이들을 질리게 합니다. "제발 공부 좀 해라 공부, 너 그래서 나중에 뭐 될래? 공부해서 남 주냐? 다 너 잘되라는 거지. 옆집에 누구는 학교에서 올 A 받았다더라, 아무게는 SAT 수학 만점 받았대.... 피아노 연습 언제 할껴? 연습은 하나도 안하고 돈 아깝게 레슨만 하면 뭐해...... 여러분, 언제 애가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했어요, 자기가 억지로 시켜놓고 연습 안한다고 야단치기는 왜 야단 칩니까?

그런데 에베소서 6:4절을 보면(현대어 성경) 바울이 부모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부모들에게 한마디 당부하겠습니다. 자녀들을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또 잔소리를 늘 늘어놓아 반항심을 일으키거나 분노를 품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걸 아십시오. 남편을 향한 바가지, 그리고 자녀를 향한 잔소리는 백날 해도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되려 반항심만 증가시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본 받아, 우리 육신의 자녀들이 실수하고 넘어져도 격려하고 인정해주는 그런 아버지가 됩시다. 내 성미에 안 맞고, 내 기대에 안차도, 그들이 실수하고 씨름하고 그러면서 배우고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줍시다. 좀 기다려줍시다. 도저히 마음이 안 놓이고 염려가 될 겁니다. 그럴 땐 잔소리하는 대신 기도로 우리 자녀를 하나님께 맡깁시다.. 그러는 게 되지도 않는 걸 걱정하고 한숨쉬고 앉아있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실수도 해보고 고생도 해보고 그러면서 배우고 그래야 뭐 좀 원만한 사람, 좀 큰 인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어려운 사람 사정도 알고 나중에 커서 무슨 일을 해도 좀 해내지 않겠습니까? 실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숙해지도록 기회를 주고 믿어주십시오.

둘째로, 우리도 하나님 닮아 행동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들이 됩시다

기독교 가정사역원에서 나온 한 자료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비친 통상적인 한국 아버지의 모습들은 이런 것입니다.
* "잔소리만 하는 아빠, 술만 먹고 들어오는 아빠, 늘 바쁜 아빠, 낮잠만 자는 아빠, 쪽 팔리는 아빠, 어디 간다면서 거짓말하는 아빠, 독재적인 아빠, 열 받으면 식구들을 괴롭히는 아빠, 많이 드셔서 배가 나온 아빠, 자기 일은 자기가 하라면서 맨날 소주 사오라고 심부름시키는 아빠, 과속을 하는 아빠, 한번 때리면 죽도록 때리는 아빠, 공부 잘하는 아이들하고만 놀라고 하는 아빠, 가방검사를 하는 아빠, 내가 TV만 보면 마음대로 채널을 바꾸는 아빠"

얼마 전에 아버지학교라는 것을 했습니다. 끝나는 날에 같이 식사하며 그 동안 느낀 것을 나누는 시간을 갖자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모이기로 한 날 한 분이 전화를 하셔서 "목사님 정말 죄송한데 오늘 저녁에 제가 아버지 학교에 못 가겠습니다. 지난 주 약속할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오늘 제 딸 음악회 하는 날입니다. 아무래도 거기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괜찮다고 잘 다녀오시라고 그랬습니다. 전화를 끊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 아버지는 교회 성경공부를 한시간 빼먹기는 하지만, 자녀가 아버지를 필요로 할 때 시간을 같이 보냄으로, 행동으로 자녀를 사랑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그럼 배울 거 제대로 배운 것 아닙니까?

Benjamin J. Stein이라는 사람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라는 책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 "만일 이번 달에 직장에서 승진이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기회는 항상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고 통찰력을 키우고 끝없는 애정을 표시하는 다섯 살에서 열 다섯 살까지의 10여 년은 놀랄 만큼 빨리 지나가 버리고 만다. 어떤 억만 장자도 16살 된 무뚝뚝한 자녀를 부모에게 순종하는 다정스러운 아이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직장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아들이 아빠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잠드는 그 시절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다. 리무진이나 전용 제트기가, 아들이 아이에서 청년으로 자라는 기간에 함께 지내지 못한 것을 보상해주지는 못한다. 아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중요한 일에서 벗어나 잠시 기분전환을 하는 소일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만사를 제껴놓고 내가 해야할 아주 소중한 일인 것이다."

제발 좀, 자녀들의 음악회에도 좀 가보시고, soccer 게임도 좀 참석하십시오. Wife만 보내지 말고 시간 내서 아빠도 좀 동참하십시오. 바쁘시지만 학교에 발런티어도 좀 하십시오.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고 정성입니다. 영어 못해서라고 핑계대지도 마십시오. 우리보다 영어 못하는 일본 사람들이나 중동사람들도 우리보다 더 많이 발런티어 합디다.

셋째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 닮아 편애하지 맙시다.

우리는 큰 아이를 작은 아이 보다 선호합니다. 어떤 경우엔 둘째를 막내라고 더 선호합니다. 아들을 딸보다 선호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심지어 뱃속에 아기가 아들이 아닌 경우 생명을 없애 버리는 잔인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나은 아이를 배우자가 데려온 아이보다 선호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편애는 우리가 감당 못할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수 도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불행은 단순한 제사 문제가 아닌, 아담과 이브의 자녀교육 및 편애와 연관이 있는 듯 합니다. 아브라함의 편애와 실수는 수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PLO의 끝없는 suicide bombing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인하고 악독한 보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편애는 야곱과 에서 형제간을 평생 반목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에서 나와 생각이나 배경이 다른 이도 편견 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 5:46절은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하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속 좁게 지연 학연 따지며 사람 편애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즘 제가 떠난다고 많은 분들이 참 잘 대해주십니다. 제가 이뻐서가 아니고 목사라는 이유로 특별한 사랑과 관심으로 대해주십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과 다른 사람, 새로 오신 분들을 목사 대하듯이 아니 예수님 대하듯이 대해주시면....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분들을 대하며 혹시 앞으로 더 못 볼지도 모르니 성의껏 대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더 좋겠습니다. 자녀나 새로운 교우나 할 것 없이 편애 없이 사랑으로 대합시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 닮은 구석이 있다고 좋아하시지 않겠습니까?

넷째로, 어머니들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자식의 생명과 가정의 안전을 위해 수치와 모욕을 다 감당해내고 있는 아버지들을 격려하고 높여주는 우리가 됩시다.

* 한국에서 어떤 학생이 급한 일로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니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젊은이들, 교복을 입고 재잘대며 지나가는 학생들,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들,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기 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운전기사가 급정거를 밟는 소리가 들리고 교통순경이 다가와 신호위반이라고 면허증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운전사는 차 밖으로 달려나갔습니다. "IMF라 돈벌이가 시원찮아, 미안하지만 한번만 봐주게....."라고 사정합니다. 하지만 경찰관은 단호하게 안된다며 면허증을 보여달라고 다그칩니다. 이제 기사 아저씨는 경찰의 팔을 붙잡고 봐달라고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완고한 경찰이 안되다고 되풀이하자, 아저씨는 아예 무릎을 꿇고, "한번 만 봐주게.... 정말 벌이가 시원찮아 봐주게...."라며 연신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경찰이 기사 아저씨를 일으켜 세우며: "그렇다고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도 당신 같은 아버지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경찰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그냥 가시라고 했고, 아저씨는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하고 택시를 출발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청년이 덧부칩니다. 팔장을 끼고 걷는 여인들의 아버지도 어디선가 가족들을 위해 무릎을 꿇을 것이고, 재잘대며 지나가는 학생들의 아버지도 어디선가 가족들을 위해 무릎을 꿇을 것이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의 아버지도 어디선가 가족들을 위해 무릎을 꿇을 것이고, 엄마의 손을 잡고 뒤뚱 뒤뚱 걷는 아이의 아버지도 어디선가 그 아이와 그의 아내를 위해 무릎을 꿇을 것이고 ..... 고개숙인 나의 아버지도 어디선가 오늘도 무릎을 꿇겠죠? 우리를 위해서.... 무릎 꿇는 내 아버지의 모습을 절대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아.버.지.

여러분, 다 그렇지는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우리 아빠들이 한 달에 한번 당신에게 월급 봉투를 전해주기 까지 아니면 당신의 통장에 정해진 액수의 월급이 꼬박꼬박 이체되기까지, 당신의 남편이 어쩌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일을 때려치우고 싶은, 죄송합니다만, "더럽고 아니꼽고 치사한" 그런 무릎꿇는 비애를 겪은 후에 가정으로 돌아 올 수도 있습니다. 제발 바가지 긁지 마시고, 제발 남과 비교하지도 마십시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버지에게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우리 가족 위해 이렇게 수고하는 당신이 고맙고 자랑스러워요"라고 격려해주십시오. 여러분의 남편들이 가정에서 조차, 아내에게서 조차 최소한의 존중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 남편은, 그 아빠는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니면 아무 얘기 없이 집을 나가 아예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목회하며 잊혀지지 않는 감사한 일들 또 마음에 새겨진 가슴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그 중 한가지를 나누고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난 부활절 주일 저녁에 김태정 집사님이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갔습니다. 담당 의사가 "그 동안의 상황을 보아 이제는 약물투여 하는 것을 중단할 때가 되었다며 오늘이 부활절이고 하니, 12시가 넘으면 투약을 중단하고 편히 가시게 하는 게 좋겠다" 했습니다. 가족들이 의사의 조언에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들었는지 12시가 다되어 김집사님의 병원으로 달려와서 엄마에게 안기면서, "엄마, 12시 넘으면 아빠가 죽는 거야?"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 애는 아홉 살입니다. 소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마음이 아프고 착잡했습니다. 하지만 부인되는 지정란 집사님께 그랬습니다. "집사님,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집사님 자녀들을 넉넉하게 돌보고 지켜주실 겁니다. 용기내세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였습니다. 그 분이 바로 제가 11살 때 아버지 잃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저를 도와주신 제가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룻밤 머무는 것 같은 외로운 인생 길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늘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해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우리를 생명 다해 사랑해주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61:16절은 증거합니다: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 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적용을 위한 질문들:

1.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자녀들이 실수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2. 어떻게 하면 단순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3.. 어떻게 하면 편애하지 않고 자녀와 교우들을 공평하게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까요?

4. 어떻게 하면 수고하는 아버지들을 가정에서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아내와 자녀들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