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Mission Statement
History of KUMCGW
Worship Services
Directions to Church

Korean Ministry
English Ministry
Children's Church
Youth Church

Profile and Photo

Photo Album
Sharing


Sharepoint Home
Contact Information
Resources and Links
Connectional    Churches
Korean Bible Study


Archive | Home | audio video-56K video-100K

2001.5.27. 워싱톤서(15) - 조영진 목사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마서 7:1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외쳤던 바울의 고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의 고민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깊은 자기 성찰이 없는 삶, 피상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닙니까?

지난 주일에는 저희 교회 50주년기념 부흥회로 김진홍 목사님께서 귀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오늘은 다시 로마서로 돌아와서, 로마서의 말씀 가운데 가장 난해한 귀절,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는 7장 후반부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인생을 로마서, 아니 워싱톤서 5장부터 8장에 걸쳐서 진술합니다. 5장에서는 하나님과 화해한 삶, 6장에서는 자신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삶, 7장에서는 율법의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자유한 삶, 그리고 8장에서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삶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그런데 로마서의 말씀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고, 반지의 보석과 같이 빛나는 말씀으로 꼽히는 8장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뇌에 찬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7:14-25에 이르는 말씀인데, 이 부분에 대하여 성서학자 간에도 많은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그 논란의 핵심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탄식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내적 갈등을 소개하는 이 말씀이 누구의, 어느 때에 해당되는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의 고백인가? 아니면 바울 사도가 아닌 제3의 인물의 고백을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보다 더욱 어렵고 의견이 분분한 물음은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라면, 어느 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리새인으로 살아갈 때인가? 아니면 거듭난 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을 때의 고백인가? 이 문제에 대해 교회의 역사를 보면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바울이 거듭나기 이전의 이야기라는 주장은 Origen이나 Chrysostom을 비롯한 교부들로부터 시작해서 Meyer, Bengel같은 성서학자들이 이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거듭난 이후의 바울의 고백이라면, 어떻게 그가 아직도 죄에 매어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반면에 Augustine으로부터 시작해서 Luther, Calvin 같은 종교개혁자들, 또 20세기의 Barth같은 신학자는 바울의 이 기록은 거듭난 후의 현실에 대한 진실된 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의 말씀이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깊은 신앙의 경지에 이르러도 내적인 고민을 느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현실임을 주장합니다.

저는 짧은 시간에 이 문제를 가지고 학문적인 토론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저의 입장을 밝힌다면,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롭게 태어난 후의 바울의 고백이라고. 왜냐하면 이 같은 외침은 바울만의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이렇게 고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I.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 보십시다. 이 말씀은 아주 고민스러운 사도 바울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1) 먼저 그는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갈등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그 갈등이란 사도 바울 안에 하나님의 법과 다른 법, 죄의 법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뜻을 행하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원치 않는 악을 행하도록 나를 유혹하고 이끌고 있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유명한 책을 쓴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하늘의 것에 전념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육체의 것들이 나를 뒤로 잡아당기는구나! 나는 모든 것을 초월해 보려고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땅의 것에 얽매이는구나! 아! 나는 나 자신과 싸우는 불행한 사람이로다! 내가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도 육체의 떼거지들이 나를 괴롭히는구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안에는 이 갈등이 없으십니까? 제 안에도 이 갈등이 있습니다. 회의 참석을 위해서든 가끔 출타해서 Hotel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요즈음 Hotel에서 Cable TV에 상영되는 영화를 보면 이래도 되는가?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향락문화가 종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Cable TV의 모든 채널이 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유익한 채널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junk같은 영화를 보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과연 시간을 이렇게 쓰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가 물으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내 안에는 또 다른 생각들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시대를 알려면 좀 보는 것도 괜찮지 않는가 해보면서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싶어집니다.

사도 바울의 고민은 그의 고민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민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은 그렇게 고민하면서 말합니다. 자신 안에 이렇게 두 생각이, 두 법이 갈등하고 있는데, 이 갈등 때문에 선을 행치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갈등에서 오는 무력함, 무기력한 모습을 고백합니다.

7:15을 보십시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또 7:19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도다." 7:22이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선을 행하고 싶기는 한데 행할 수 있는 힘, 능력이 없는 무력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뜻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원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뜻도 있고 원함도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법을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대로,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생각과 현실, 뜻과 행함 사이의 분열과 괴리를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습니까? 오늘 우리는 선한 생각대로 살고 있습니까? 깨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사도 바울이 느끼고 고백하고 있는 이 분열, 이 무력함이 없습니까?

II.

여러분,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아니 어떻게 대처하고 살아가야 합니까? 그냥 고민만 안고 살아갈 것입니까? 아니면 이 문제를 정직히 바라보면서도 새로운 눈을 갖고 살아갈 것입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자기 고백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죄악의 깊이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느끼는 이 갈등과 무력함의 문제를 죄와 연결시켜서 이해합니다. 7:16 이하를 보십시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20도 같은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오늘 이 시대는 죄의 문제에 대하여 듣기를 싫어합니다. 행복, 기쁨, 평화는 인기있는 주제이지만, 죄는 인기없는 주제입니다. 죄의 문제를 깊이 느끼지 못하니까 회개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회개란 먼 옛날 이야기처럼 들려집니다. 죄란 심리적인 현상이나 교리적인 이론의 일부로 가볍게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를 결코 가볍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죄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가벼운 심리적인 현상 정도도 아닙니다. 죄는 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입니다. 내 인생의 길을 가로막는 대적입니다.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장본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다른 길로 유혹하는 power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죄의 심각성, 이 죄의 깊이를 다시 한번 보게 해 줍니다.

(2) 둘째로 오늘 말씀이 주시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갈등이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히 문제이지만, 그것은 또한 새로운 삶의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과 이 길을 가로막는 죄의 법이 함께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를 갖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임해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죄의 유혹 앞에서 갈등을 느끼는 것 아닙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갈등을 느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내적 갈등, 거룩한 갈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민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그만큼 자신을 깊이 있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런대로 마음 편하게 살았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더 많은 갈등과 가책을 느낀다고 걱정하시는 분 계십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옛사람과 갈등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과의 갈등, 새사람과 옛사람과의 갈등, 분명히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갈등은 바로 새 생명의 증거입니다. 내 안에 임한 새로운 삶, 새로운 진리가 뿌리 내리고 있는 sign입니다.

(3) 셋째로 고민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주시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생활이란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란 사실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결코 정적인 것,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고 성숙해 가는, 살아있는 과정입니다.

루터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이란 다 된 사람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깊이 음미해 볼만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되어 가는 사람입니다. 끝없이 자라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 가는 여러 가지 sign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삶을 더욱 깊이 있게 보고 더욱 겸허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은, 죄송합니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법, 세상의 윤리나 도덕의 빛에서만 자신을 보고있는 사람입니다. 이상한 것은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만큼 자신의 부족함을 더 분명히 보게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족한데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고마워집니다.

바울도 자신의 이해에 변화가 나타난 것을 성경 속에서 발견합니다. 고린도전서 15:8을 보면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에배소서 3:8에 보면 "나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다 후기에 기록된 편지도 알려져 있는 디모데전서 1:15을 보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늘 본문 속에서 자신을 죄 아래 팔렸다고 고백하는 것도 우리는 이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4) 넷째로 오늘 본문 말씀이 주시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갖는 유한성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인간입니다. 아무리 거듭났다고 해도 역시 우리는 육신을 지닌 인간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처럼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파스칼은 이 같은 인간을 "중간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은 시간과 영원사이의 중간자, 유한과 무한사이의 중간자입니다.

우리가 거듭났다고 해도 우리는 역시 인간입니다. 다만 새로워진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질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도 넘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엘리야 같은 하나님의 사람도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한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 때문에 바나바와 심히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신앙의 위인들에게도 인간됨, 곧 유한함과 연약함에서 오는 넘어짐의 때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케 되는 때는 바로 이 유한성, 이 약함을 벗어버리는 그날입니다. 주님처럼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될 때, 그때는 모든 연약함의 사슬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우리 모두 연약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거듭났다고 해도 탄식할 수 있습니다. 곤고한 인생임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III.

우리는 유한합니다. 거듭났어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온전히 승리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의 마지막 구절, 7:25의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탄식해 왔습니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7:25절에서 사도 바울은 갑작스럽게 어조를 바꾸어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는 외칩니다. 비록 내 안에 갈등이 있어도 감사하다고. 무력함을 느껴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갈등도 무력함도 달리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를 깊이 느끼기에 갈등을 느끼고, 새 생명이 임했기에 갈등을 느끼고, 자라다 보니까 갈등을 느끼고,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보니까 갈등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변함없으니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감사한 것 뿐입니다. 특별히 8장에 가면 이같이 갈등하는 우리 인생들에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우리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이 삶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는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깊이를 잃은 인생, 그러기에 즉각적인 만족에 매달리는 superficiality, 피상적인 인생을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히려 곤고한 인생임을 느끼지 못하는데서 많은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갈등, 이 갈등 앞에서 느끼는 무력함, 물론 고민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민은 생명에 이르는 고민입니다. 아니 생명을 누리기에 가질 수 있는 고민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고민 좀 하십시다. 내 안에 있는 이 거룩한 갈등을 놓고 고민 좀 하십시다. 고민을 하게 되면 우리는 자라게 될 것입니다.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외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곤고한 인생 속에서 빛을 찾게 될 것입니다.

* 적용을 위한 물음

1. 내 안에 사도 바울이 느꼈던 고민이 있습니까? 고민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보십시다.

2. 고민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고민이 없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합니까?

3. 어떻게 하면 이 고민과 탄식을 넘어설 수 있습니까? 이 고민을 넘어서 살아가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