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5.6. 한희철 목사
길을 만드는 사람
사도행전 8:26-40
|
삶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길을 만드는 삶, 길을 가로막는 삶
그리고 남이 닦아놓은 길을 편안히 가는 삶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
"하나님을 크게 웃기려거든 그분에게 당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들으면 어떨지 몰라도 가만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입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단강초등학교 어린이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워싱톤을 방문하고, 꿈같은 시간을 보내다가 오늘 이렇게 함께 예배하며 말씀을 나누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생각조차 못했을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 농촌은 별다른 대책없이 기울어져 가고 있습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지키며 일구던 노인들은 때가 되어 하늘로 돌아가고, 젊은이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나가고, 갈수록 사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봄이 돌아올 때마다 무슨 곡식을 심어야 하나, 막막한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이따금 "농촌에 남아있는 희망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언젠가부터 저는 "절망하지 않는 것이 남은 희망"이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절망하지 않는 것, 제 믿음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제게는 그것이 농촌에 남아있는 안쓰러운 희망의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단강 마을은 강원도와 충청북도 그리고 경기도가 만나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입니다. 15년 전, 예배당이 없던 단강 마을에 첫발을 내딛을 때만해도 길은 비포장이었고,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의 대부분이 농사일을 하는데, 대부분은 노인분들입니다. 마을 형편이 그러하다보니 마을에 있는 유일한 학교 단강초등학교의 형편도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전교생이 24명인 학교에 내년도 입학생이 한 명, 후년엔 한 명도 없습니다. 졸업해서 나가는 학생들은 그래도 있는데 들어오는 학생은 도마뱀 꼬리 잘리듯 줄어들고 있는 샘입니다. 수십 년간 마을을 지켜오던 학교가 학생수가 줄어들어 문을 닫게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안타깝고도 쓸쓸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 수가 줄어들어 문을 닫을지도 모를 학생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자, 비록 작은 농촌에 산다 할지라도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아름다운 꿈을 갖도록 돕자, 그런 생각이 마음에 찾아왔고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나며 마음 속에서 조금씩 자라 어느덧 마음을 뜨겁게 채웠습니다.
모두들 무모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생각은 갸륵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주님의 뜻이 이 일 속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현실적인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약해지려는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이다. 나머지는 나중의 일이다." 그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외롭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지만 줄곧 주님의 뜻이 담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무모하고 무리해 보이는 꿈을 여러분이 너무도 곱게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꿈이 부족하고 어설펐던 만큼 지극한 사랑으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리운 마음으로 오랜 시간 기다리고, "어서 오라구" 하며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시고, 뚝뚝 묻어나는 사랑으로 시간 시간 전해주신 여러분의 사랑을 받으며 정말이지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랑이 세상에 있는 거구나, 우리의 마음이 깊어지며 서너 뼘씩 시간마다 쑥쑥 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들의 모습을 통해 주님의 모습을 보았고 여러분들의 마음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보았으며, 여러분의 손길을 통해 주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농부들의 호미 끝에 계시고, 공부하는 학생들의 연필 끝에 계시고, 탄을 캐는 광부들의 곡괭이 자루 끝에 계시고, 밥짓는 여인들의 젖은 손 끝에 계심을 기억하라."(떼이야르 드 샤르댕)는 말을 기억합니다만, 여러분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참 좋으신 주님의 모습을 때마다 기쁨으로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동안 단강에 살며 깨달은 것 중의 한가지는 '씨는 열매 보다 작다'라는 사실입니다. 씨는 언제나 열매보다 작습니다. 작은 씨를 뿌려 큰 열매를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여러분들이 전해주신 사랑은 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 마음 속에 사랑의 씨앗으로 뿌려질 것입니다. 언젠가는 싹이 나고 열매가 맺겠지요. 열매가 맺기 전 아름다운 꽃이 눈부시게 필 것입니다. 지극한 사랑을 통해 뿌려진 씨앗이 언젠가는 열매를 맺어, 그 소중한 삶의 열매를 다시 외로운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면, 여러분이 뿌린 씨앗은 한순간의 눈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아름다운 생명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을 통해 빌립의 삶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한사람의 삶을 쉽게 말하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저는 빌립 집사님을 '길을 만드는 사람'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居惡在 路惡在(거오재 노오재)" 라는 옛 시의 한 구절이 있습니다. "거할 곳은 마땅치 않고 머물 곳은 마땅치 않다"는 뜻입니다. 길에 대해 생각할 때 세 부류의 삶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남이 닦아놓은 길을 편안하게 가는 삶입니다. 편안한 삶이지만 지루할 수 있고, 자칫 내 길이 아닌 남의 길을 걸을 수도 있는 삶입니다.
그런가 하면, 길을 가로막는 삶이 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이 보고 싶어 길가로 나갔을 때, 그는 예수님을 못 볼 뻔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던 그의 마음이 간절한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삭개오는 그냥 돌아섰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 주님을 보았고, 아니 주님을 만났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예수님 앞에서 돌아설 뻔했습니다.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 그들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들은 정말로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보다 키가 컸습니다. 한 상처받은 영혼보다 키가 커서 주님을 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 가까이서 주님을 따라가는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생각해 볼만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세번째로는, 길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길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 길을 만들어 내는 삶이 있습니다. 빌립 집사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1) 빌립은 아무도 찾아가려고 하지 않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을 때 모든 사도들과 복음을 전파하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고난은 복음의 영역이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때 빌립이 찾아간 곳이 사마리아성입니다. 사마리아는 아무도 찾아가려고 하지 않던, 아무도 관심조차 갖지 않던 성이었고 여전히 순교의 위험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시대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앗시리아는 사마리아 사람과 통혼하는 정책을 폈고, 결국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를 않았습니다. 바로 그 사마리아성을 빌립이 찾아간 것입니다.
길을 만드는 삶이란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주님의 이끄심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받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사랑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사마리아도 사마리아라 외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이기 때문에 찾아가야 할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극한 사랑으로 맞아주신 단강도, 오늘의 농촌도 어쩌면 또 하나의 사마리아였는지도 모릅니다.
(2)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던 사마리아성을 찾아간 빌립은 놀라운 일을 이루어냅니다. 빌립이 전하는 말과 그가 행하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기 시작합니다. 자칭 큰 자라 불렀던 마술쟁이 시몬도 변화를 받음으로 어느새 사마리아성은 복음의 능력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 말씀을 두고 " 그 성에 큰 기쁨이 일더라"(행8:8)라고 쓰고 있습니다.
길을 만드는 사람은 아무도 관심갖지 않으려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아무나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루어내는 삶을 살아갑니다. 나를 이곳에 세우신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나를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아름답고 넉넉하게 이루어냅니다. 한사람이 이루어 내기엔 벅찬일이라 보였지만, 주님과 동행한 빌립은 주님의 뜻을 훌륭하게 들어내었습니다.
우물이 사라지고 들어온 것이 펌프입니다. 펌프에서 물을 길으려면 한바가지 물을 먼저 부어야 합니다. 그 먼저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이 마중물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희망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 사랑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 인간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신뢰를 끊임없이 길어올리는 신뢰의 마중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중물은 양도 적고 자신은 가장 먼저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마중물이 일어 샘하나가 터지는 법입니다. "상농은 땅을 가꾸고, 중농은 곡식을 가꾸고, 하농은 잡초를 가꾼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이 모여 섬기는 이 제단이 이 지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땅을 가꾸는 상농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빕니다.
(3) 빌립은 끊임없이 낮아진 사람이었습니다. 길은 누군가보다 낮아져야 길이고, 밟혀야 길이 됩니다. 빌립은 끊임없이 낮아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성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예루살렘에서는 그제서야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를 사마리아로 내려보냅니다. 그리고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며 성령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더니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그제야 나타나 성령세례를 베풀고 있는 두 사도, 빌립의 마음이 편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성령께서 빌립을 다시 이끄셨습니다. 빌립을 다시 이끈 곳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그 길은 광야였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인적이 없는 길'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 짐작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 그곳으로 다시 빌립을 불렀고 빌립은 기꺼이 그 길을 내려갑니다. 편안과 안전을 보장해주는 사마리아를 등지고 광야길을 향합니다.
길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낮아지는, 그 낮아짐을 견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가 없으면 낮아질 수 없고, 낮아질 수 없으면 길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적이 없는 길을 걷던 빌립은 마침내 마차를 타고 가며 성경을 읽고 있던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읽으면서도 깨닫지 못한 말씀을 그의 옆자리에 앉아 전함으로 마침내 그를 구원받게 합니다.
길 없는 길을 걷는 것은 위험해 보이고 막막해 보이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길 없는 길을 걷는 이들에 의해 새로운 길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빌립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인적이 없는 길을 걸을 때, 주께선 우리를 위하여 필요한 만남과 필요한 일을 예비해 놓으실 것입니다.
단강 어린이들을 큰 사랑으로 맞아 아름답고 든든한 사랑의 길 하나를 새로 만드신 여러분들은 이제 교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 많은 사람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주님의 뜻을 향해 용기있게 걸으심으로 새로운 믿음의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빕니다.
목사님과 사모님, 존경합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되신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좋은 만남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 속에 어느새 새로운 믿음의 길 하나씩을 선물로 주신 주님을 마음을 다해 찬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