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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4.22. 워싱톤서(13) - 조영진 목사
의의 병기로 드리라
로마서 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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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이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이 같은 헌신의 삶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
지난주일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삶은 A Life characterized by sanctification, 거룩함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세례 속에 나타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도 달라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삶, 거룩한 삶에로 부름 받았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6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모두가 살아야 할 거룩한 삶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I
오늘 본문 말씀, 6:12,13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자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그러므로"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그러므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문법적으로는 두 문장을 연결해 주는 간단한 말입니다만, 성경 속에서는 그러므로 전과 그러므로 후 사이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말한 경우가 많습니다. 여호수아 24장은 좋은 예입니다. 여호수아는 24장에 기록되어 있는 고별 설교에서 먼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회고합니다. 그들을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말한 후 24:14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므로 "그러므로"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자고 권면합니다.
같은 논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으니, "그러므로" 죄가 우리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지난주일, 부활절에 말씀드린 내용과 연결시켜서 오늘 우리를 향해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II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십시다.
(1) 먼저 사도 바울은 6:1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자기를 누구에게나 종으로 내맡기며 복종하게 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죽음에 이르는 죄의 종이 되거나, 아니면 의로움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표준새번역)"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서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맡겨서 복종하면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가면, 가장 자유인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사람은 자신에 매인 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인간은 누구엔가 혹은 무언가에 매인 인생을 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을 살펴보면 결국은 두 종류의 종이 있을 따름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죄의 종이 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분법적 주장이 어쩌면 너무 단순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삶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의 주장에는 큰 모순이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죄의 종이든지 아니면 순종의 종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혹시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반론을 제기하실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참으로 선하게,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죄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질문하실 지 모릅니다.
대단히 적절한 질문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정의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거듭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해하는 죄란 무엇을 말합니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창세기 3장,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보면, 죄의 근본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한 인생을 산다고 해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산다면, 무엇의 종입니까? 죄의 종일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인생은 두 갈래길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의로움에 이르는 순종의 종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이 두 갈래길을 대조시켜서 말합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갈 때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6:21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부끄러움이고 그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순종의 종이 될 때, 그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룩함이며,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 이렇게 두 갈래길에 서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바울이 어느 길을 권면할 것인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먼저 바울은 6:12에서 소극적인 방향에서 출발합니다.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죄에 맡겨서 죄의 병기, 죄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같은 소극적 권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적극적으로 권면합니다.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산사람, 부활에 동참한 사람처럼 하나님께 드리며 의의 병기, 의의 도구로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죄가 다스리지 못하는 인생, 은혜아래 있는 인생처럼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에 죽은 인생이 되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욕망에 매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욕망이 지배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욕망 자체가 죄악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욕망에 매인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욕망에 지배받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 마음대로 사는 인생, 참으로 그럴듯해 보입니다. 진정한 자유인의 삶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말합니다. 결국 멋대로 사는 인생이 가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사망, 멸망의 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그 같은 삶에는 진정한 평안, 진정한 보람과 의미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보람있게 사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후회함이 없이 사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거룩함을 이루는 삶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인생, 순종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종의 종으로 사는 길, 그 길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결국은 무언가의 종으로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삶의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돈의 종으로 사는 것이 낫습니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 낫습니까? 자기 이익에 매인 인생으로 사는 것이 낫습니까? 그리스도의 이익에 매인 인생으로 사는 것이 낫습니까? 성공이란 신화의 종으로 사는 것이 낫습니까? 위대하신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 낫습니까? 여러분 지혜롭게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길을 가는 것이 진리의 길이고, 생명의 길인지 한번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바로 의의 종,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서 순종의 종으로 사는 것이라고. 이 삶이 바로 거룩함을 이루는 길이라고. 그리고 이 길의 마지막이 생명이라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아프리카 오지를 탐험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던 리빙스턴의 삶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헌금을 거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헌금접시가 어린 리빙스턴에게 이르자 리빙스턴은 그 위에 올라앉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리빙스턴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몸을 드리겠다고, 내 인생을 드리겠다고. 결국 그는 아프리카 대륙에 복음을 심는 일에 몸을 바쳤습니다. 순종의 종으로 참으로 거룩한 삶의 자취를 남겼습니다.
(3) 그런데 이렇게 순종의 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에게 임한 주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6:1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순종하는 인생, 의의 병기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에게 임한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거룩함을 향한 우리 모두의 노력은 율법에 매여 살아가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본래 죄의 종으로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 모두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불의의 종으로 살던 우리가 의의 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야말로 amazing grace입니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순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감사의 윤리, Ethics of Thanksgiving이라고.
감사의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자진해서 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이 풍성하면 주님께 드리는 순종의 삶에 아까움이나 인색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의 동기 위에 서면,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은 참으로 마땅한 삶의 길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마음이 메마르면 의의 종의 길은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순종의 삶이 주저되고 아까운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이 안가도 되는 삶의 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죤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972년 5월28일, 왕위에서 쫓겨난 에드워드 8세 즉 윈저공이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 저녁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그의 삶에서 일어난 주요사건들을 다루었습니다. 이전에 찍은 필름에서 발췌한 화면들이 방영되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유년기, 짧았던 통치 그리고 왕위에서 물러난 사건에 대한 질문들에 답하고 있었습니다. 웨일즈의 왕자였던 소년기를 회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버지(조지 5세)는 엄한 규율가였습니다. 때때로 내가 무슨 잘못을 하면, 그분은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타이르곤 했습니다. '애야, 너는 언제나 네가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임한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기억하라고. 그리고 의의 병기로 자신을 드리라고. 거룩함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III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갈래길, 죄의 종의 길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 두 길을 제시하면서 6장의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
죄의 대가, 죄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 두 갈래길에서 살아갑니다. 두 길의 차이는 처음에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마지막은 확실히 다릅니다. 사망인가, 영생인가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주일날 두 친구가 뉴저지주 칼드웰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마침 예배당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는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예배당 안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자고 했지만, 다른 한 친구는 술집에 가서 이 휴일을 즐기자고 했습니다. 결국은 두 친구는 각각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한 친구는 예배당 안으로, 한 친구는 술집으로 갔습니다.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그날의 갈림길은 두 친구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때 교회를 택한 청년은 미국의 22대, 24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깨끗한 대통령의 자취를 남긴 반면, 그때 술집을 택한 청년은 머리가 좋아서 변호사가 되었지만, 뇌물과 범죄에 관련되어 오랜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이 대통령이 바로 Grover Cleveland 대통령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죄의 종의 길과 그리스도를 향한 순종의 길입니다. 죄의 병기, 죄의 도구로서의 길과 의의 병기, 의의 도구로서의 길입니다. 부끄러움의 길과 거룩함의 길입니다. 죽음의 길과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여러분, 오늘 어느 길을 걸으시렵니까? 아니 오늘 어느 길을 걷고 계십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워싱톤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적용을 위한 질문
1. 우리가 매일 부딪치는 두 갈래 선택의 경험, 죄의 길과 의의 길에 대한 선택의 경험을 함께 나누어 보십시다.
2. 우리는 누구입니까? 오늘 나는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 된 나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3. 어떻게 하면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의의 병기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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