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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3.4. 워싱톤서(7)/사순절 첫째주일 - 조영진 목사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로마서 3:9∼20

사도 바울은 죄인됨의 문제에 대한 결론을 전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고.
죄인, 죄인, 죄인이라는 선언을 반복해 들어왔습니다.
과연 나는 나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깨닫고 있습니까?

여러 해 전 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한경직 목사님께서 종교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톤상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노벨상은 물리, 화학, 의학, 경제, 평화상 등의 분야에서 시상하는데, 인류의 삶과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종교분야는 시상하지 않기에, 템플톤 이란 사람이 기금을 내어놓아서 이 상이 제정되게 되었습니다.

한목사님께서 템플톤상을 받고 돌아오셨을 때, 한국교회가 거 교회적으로 축하하는 모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목사님께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답사를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일본의 치하에서 자신이 신사 참배한 일을 말씀하시면서 나는 바로 죄인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축하의 분위기로 들떴던 모임의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었을까는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평생 고결하게 살아오신 목사님이셨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저 내어 주신 목사님이셨습니다. 영락교회를 세우시고, 이 교회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신 목사님이셨습니다. 은퇴하실 때 당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신 일은 물론 없었고, 참으로 후배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템플톤상까지 수상하신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목사님은 당신이야말로 죄인이라고 만인 앞에서 다시 한번 고백하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로마서의 초반부에서 되풀이해서 증거하고 있는 인간 죄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신성을 만드신 우주 만물을 통하여 분명히 보여 주셨건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인생들, 부담스러운 하나님 대신 마음대로 흔들 수 있는 우상을 숭배하는 인간 죄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비판하는 도덕론자들, 또 하나님의 율법을 맡았다고 자부심을 갖고있는 유대인들의 죄인됨에 대한 사도 바울의 고발을 살펴보았습니다.

I.

사도 바울은 인간의 죄인됨을 다루는 오늘 본문 속에서 결론적으로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은 다 죄 아래 있습니다. 1:18부터 오늘 본문에 이르는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죄인으로 이해합니다. 여러분이 이 주장이 마음에 드시든지, 들지 않으시든지 관계없습니다. 믿으시든지, 믿지 않으시든지 성경의 증언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선언에 이어서, 본문 3:11-18까지에서 구약 성경 시편과 이사야서의 말씀을 중점적으로 인용해서 인간의 죄인된 모습을 밝힙니다.(시편 14:1-3,5,10:7,140:3,36:1, 이사야 59:7-8) 어떻게 보면 죄를 지적하는 모든 어휘를 총출동시켜 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 본문 속에 나타난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무지입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3:18의 말씀에 의하면 평강의 일도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습니다. 무얼 모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이 없는 무지한 모습입니다. 둘째는 타락한 언어생활의 모습입니다. 3:13 이하를 보면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들이 가득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어생활, 입술이 죄악 속에 빠져있는 모습입니다. 셋째는 삶이 뒤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3:12 그리고 15의 말씀에 의하면 다 치우쳐 한가지도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고 파멸과 고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바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들려질 수도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데 세 가지 장애물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나라고 뭐 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고, 둘째는 이만하면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들에 비교하면 이만하면 상대적으로 낫지 않는가? 자부심을 갖습니다. 셋째는 잘못한 일이 둘이고 잘한 일이 다섯이면, 그만하면 착하지 않은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은 적당히 스스로를 위로하기를 좋아합니다. 죄인됨의 문제가 심각한데도 적당히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넘어 가려고 합니다. 죄인이라고 외치면서 인간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듣기 좋아하는 말과 들어야 할 말 사이에 거리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들어야 할 말보다는, 듣기 좋은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입니다.

II.

조금 더 인간 죄의 문제를 살펴보십시다.

(1) 기독교의 인간 이해에서 죄인됨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합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반문합니다. 내가 왜 죄인입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입니까? 나는 나라 법을 어겨서 잡혀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가서 제 Record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깨끗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아직도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죄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법 앞에서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의 기준에서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죄인 여부를 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죄인됨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입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record가 깨끗하다고, 하나님 앞에서도 깨끗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 둘째로 기독교 신앙에서 죄의 문제를 말할 때 종종 sins와 sin을 구별합니다.

Sins란 구체적인 행동으로서의 죄입니다. 그러기에 복수인 s를 부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sin이란 단수 표현은 sinfulness, 죄인됨에 가까운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됨, 부패한 인간 존재를 말합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잘못된 행동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Sin. Sinfulness입니다. 인간이 죄인인 것은 죄된 행동 때문이라기 보다는 죄인됨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행동들, 죄악된 행동들은 바로 죄인됨의 열매요,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Sin, 죄인됨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불신앙의 근본에는 Self-centeredness, 자기중심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인생인데,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지음 받은 인생인데, 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나를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unbelief, 불신앙, 믿지 않음 이야말로 죄인됨의 근본입니다. 모든 죄된 행동의 기초입니다.

(3)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 죄에 대한 이해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죄는 추상적인 이론이나 학설이 아닙니다. 죄는 바로 삶의 실상이며 power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 3:9을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 Today's English Version은 이 구절을 under the power of sin, 죄의 권세 아래도 있다고 표현했고, 공동번역성경은 죄에 사로잡혀있다고 옮겨놓고 있습니다. 죄는, 불신앙은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힘, Power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단순한 심리현상이 아닙니다. 가르치고 적절히 교육시키면 해결될 수 있는 그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했습니다. 1000년 전에 비해서 과학기술 문명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도덕성은 어떻습니까? 인간 세상의 죄악된 현실은 그만큼 개선되었습니까? 그 동안 교육은 수없이 발전되었는데, 왜 우리는 죄악된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 자신 있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말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의 문제는 그렇게 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깨뜨리는 엄청난 Power입니다. 도박을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박으로 재산 탕진하고, 가정이 흔들리는데,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도박을 끊지 못합니까? 다시는 도박을 않겠다고 손가락을 잘라버린 사람이 왜 발가락 사이에 화투를 꽂고 도박을 합니까? 죄의 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도박을 안하니까 죄와는 관계없지 않은가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예이기에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내면의 세계를 깊이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을 끌어가는 힘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운전수, driving force입니까?

Gordon Mcdonald 목사님이 쓰신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이란 책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해주는 책입니다. 우리 인생의 내적인 질서가 바로 서있지 못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허덕이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야망, 내 욕망, 내 필요에 따라 끌려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지 않는 인생, 그 인생은 표면적으로는 괜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죄 아래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죄에 매인 인생, 죄의 power의 영향과 힘 아래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인생이 죄 아래 있다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American이나, Korean이나, Korean-American 이나 모두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삶의 실상입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입니다. 내 자신의 모습입니다.

III.

덴마크의 실존 철학자 Kierkegaard은 인간 실존을 세 단계로 나눈바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쾌락을 추구하는 미적인 실존입니다. 쾌락주의자였던 돈판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 실존의 문제는 그렇게 추구하는 쾌락에 진정한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쾌락을 찾아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인생의 모습을 윤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 거두고 나서 같은 땅에 또다시 농사짓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Kierkegaard은 두 번째 단계의 실존을 윤리적 실존이라고 불렀습니다.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윤리적으로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착실히 살아가는 소시민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실존이 갖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양심적이 되면 양심적이 될수록 자신이 비양심적인 존재, 양심대로 살지 못하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Kierkegaard은 이런 인생의 실상을 아이러니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기에 인생은 세 번째 단계의 실존, 종교적인 실존, 특별히 기독교적인 실존으로 넘어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양심적이 되면 양심적이 될수록, 자신의 비양심적인 모습을 보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한경직 목사님께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에 비교하면, 형편없는 인생을 살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왜 죄인이냐고 항변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에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죄인됨의 자각은 결코 절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죄인됨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야말로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체험하는 기초가 됩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셔야 했는지, 왜 십자가의 은혜가 그렇게 감사한지를 깨닫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실상, 죄인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식탁 앞에 "나는 당뇨병 환자다"라고 크게 써 부쳐 놓으셨습니다. 음식을 마음껏 먹고 싶으실 때마다 그 써 부쳐 놓은 것을 보시면서 스스로를 다스리셨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당뇨병을 앓으셨지만, 수를 누리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옛날에는 무병장수, 병이 없으면 오래 산다고 했는데, 요즈음에는 무병단명, 유병장수, 병이 없으면 일찍 죽고, 병이 있으면 오래 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죄인됨의 자각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신실되이 살아가는 첫걸음이 됩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소식, 분명히 sad news, 슬픈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바로 good news, 기쁜 소식에의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됩니다. 죄인됨이야말로 의인됨에의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됩니다. 죄인됨의 지각 없이는 의인됨의 감격을 느낄 수 없습니다. 철저한 자기 발견, 죄인됨의 발견은 철저한 은혜의 체험, 감격의 체험에로 인도하는 좋은 목자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는 이 은혜의 복음, 이 구원의 복음을 향해 우리 모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 적용을 위한 물음

1. 그 동안 로마서 1:18-3:20에 이르는 말씀 속에서 특별히 깨달은 말씀이 있다면 함께 나눕시다.

2. 그 동안 내가 생각해온 죄인됨에 대한 이해는 올바른 것이었습니까? 문제가 있었다면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3.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이 필요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