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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2. 25. 위싱톤서(6) - 조영진 목사
유대인이라고 낫습니까?
로마서 2:18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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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인간의 죄인됨을 밝혀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낫습니까? 그들은 죄인들이 아닙니까?
오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낫습니까? |
지난 주일 저는 비판적인 도덕론자들, 그래도 남들보다는 낫다는 우월의식에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도 바울에 고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비록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지만, 자신도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람들,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회개치 않는 마음과 고집, 그리고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실상에 대해서 전하였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유대인들, 그들의 죄악됨에 대한 사도 바울의 증언을 살펴 보겠습니다. 인간의 죄인됨에 대한 바울의 고발은 다음 주일로 끝을 맺고, 이 같은 죄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말씀을 계속해서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3:21이 어서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I.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살펴 보십시다. 우리는 1:18-32에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모든 만물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우상을 섬기는 당시 세상의 사람들, 특별히 로마사회 이방인들의 죄악된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2:1-16에서는 비판적인 도덕론자들의 죄인된 모습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범위가 조금 더 좁혀져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유대인들, 그들의 죄악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후에 깔려있는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낫습니까? 그들은 죄인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내리는 결론은 분명합니다. 유대인들, 그들도 죄인입니다. 그들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받은 은혜, 그들이 자랑하고 의지하며, 강조하는 것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 무엇보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백성입니다. 2:17이하의 말씀처럼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들입니다. 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기에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으로 확신합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란 이방인 가운데 유대교로 개종한 초보신자를 말합니다. 3:1에서도 유대인들이 다른 이방인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 율법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2) 둘째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다른 것은 바로 그들 몸에 하나님의 백성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할례를 뜻합니다.
우리는 할례의 기원을 창세기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세 가지 약속을 주시면서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자손을 창대케 하며,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표를 삼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같이 율법과 할례라는 하나님의 백성된 표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임이 분명했습니다.
II.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선민의식, 이 같은 유대인들의 자부심을 향해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당신들이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다른 이방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당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인 당신들도 역시 죄인들이라고 말합니다.
(1) 먼저 율법의 문제에 대해서 2:21 이하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들은 율법을 알아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왜 자신들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적질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당신들이 왜 도적질합니까?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간음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성경에 기록된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한 것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들은 율법을 말하고 있지만, 지키지는 않습니다. 율법의 백성임을 강조하지만, 율법과는 관계없이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지만, 자신은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2) 할례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할례를 받았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율법을 지키면, 할례 받은 것이 의미가 있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할례 받지 않은 백성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John Stott 목사님은 이 주장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할례-순종=무할례이고, 무할례+순종=할례이다. 즉 순종 없는 할례는 무할례자, 곧 이방인과 다를 것 없지만, 무할례자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바로 할례자, 하나님의 백성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속에서 고발하는 문제를 정확히 지적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같은 바울의 주장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랍비들 가운데는 "할례 받은 사람은 음부로 내려가지 않는다" "할례는 이스라엘을 음부에서 구해 줄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할례의 효력을 거의 맹신하다시피 해왔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에 와서는 이 할례를 유대인들만 받지 않습니다. 많은 아기들이 태어나면서 할례를 받습니다. 물론 종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고 건강상의 이유입니다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율법과 할례를 들어서 자신들은 다르다고, 죄인들과는 다르다는 유대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2:28 이하에서 결론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이 유대사람인 사람이 유대인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껍데기, 외적인 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가? 이 문제가 중요합니다. 이 점은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이미 일깨워 주신 바가 있으며,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이라 해도 나을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면, 율법의 백성이요 몸에 할례를 받은 백성이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지적합니다.
III.
이제 이어지는 3:1-8의 말씀을 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자신의 외침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발을 예견하면서, 그들이 제기할 세 가지 질문을 미리 다룹니다.
(1) 첫 번째 질문은 3: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입니다.
유대인이라 해도, 율법의 백성이요, 할례를 받은 백성이라 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기에 같은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바울에게 당연히 묻게되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입니까? 할례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라는 이 물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그 유익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할례 자체가 구원의 보장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맡은 백성으로 순종하는 것, 사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2) 두 번째 사도 바울이 예견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약속을 깨뜨리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지 않는 신실치 못하신 분이 아닙니까? 라는 물음입니다.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믿고 안 믿고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그는 외칩니다.
(3) 세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불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면, 우리의 불의가 심판 받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입니다. 바로 3:5의 말씀입니다.
이 같은 논리를 성경 말씀에도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기 때문에, 뒤에 총리 대신이 된 것이 아닌가? 형들이 요셉을 판 것이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또 신약의 가롯 유다 역시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가롯 유다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3:6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리라."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Charles Gore라는 사람은 이 같은 궤변에 대해서 "그런 소리는 양심을 죽이고서만 할 수 있는 지적인 변명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주장이 문제입니까? 왜 이런 주장이 잘못된 것입니까? 두 가지 답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죄를 지어야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다른 길로도 얼마든지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범죄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는 미명하에 정당화시키려는 것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죄악됨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드러나는 기회가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시고 깨우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범죄함이 은총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시키는 방패로 삼으려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어쨌든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라 해도, 율법의 백성이요, 할례의 증거를 몸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그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도 역시 죄인입니다. 유대인이라 해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IV.
이 같은 사도 바울의 외침은 오늘 워싱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귀한 도전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참으로 우리에게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입니까?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까? 교회를 다닌다는 것입니까?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만일 이 같은 삶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나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보훈 속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입술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말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순종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이 점에서 약합니다. 뜨겁기는 뜨거운데, 교회 안에서만 뜨겁습니다. 많이 채워져 있기는 한데, 머리만 채워져 있습니다. 머리는 크지만, 손과 발은 아주 말라 있습니다. 말은 많지만, 행함은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를 포함해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같은 주장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주장과 어긋나지 않은가?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믿음과 행함을 지나치게 분리 시켜온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기에, 행함은 관계없는 것처럼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행함을 떠난 믿음이 과연 온전한 믿음입니까? 야고보서는 이 같은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지적합니다. 여러분, 죽은 믿음이 믿음 구실을 할 수 있습니까? 죽은 믿음이 과연 온전한 믿음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cheap grace)로 전락시켜 왔습니다.
한국에서 사건이 터졌다 하면 왜 한 두 사람의 예수쟁이들이 거기 끼어 있습니까? 거듭났다고 간증하며 돌아다니다가, 일본에서 절도 혐의로 붙들린 대도, 아니 좀도둑 조세형의 믿음은 과연 무슨 믿음입니까? 물론 예수를 믿는다고 하루아침에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언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금이 맛을 잃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리워 밟히운다고.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아도 괜찮은 것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열매맺지 않는 가지는 버림을 받아서 버리우게 된다고. 사람들은 이 버린 가지들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버린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제 구실 못하면, 말씀 붙들고 살지 못하면 세상에서 짓밟히고,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행함을 강조한다고 해서 믿음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전의 앞뒤가 같아서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행함의 강조는 온전한 믿음, 죽은 믿음이 아닌 살아있는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아니 "워싱톤서"에서 오늘 우리를 향해서 묻습니다. 유대인을 향해서 유대인이라고 해서 과연 낫습니까? 라고 물었던 그 질문을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 묻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낫습니까? 무엇이 얼마나, 낫습니까?
교회를 생전 나가보지 못한 분이 처음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날 따라 설교하시는 목사님께서 계속 반복하시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가페"란 말이었습니다. 그 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 사람은 그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이 사람은 이 아가페란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영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Agape(어게이프)란 말은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되는가?
여러분, 크리스챤은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됩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까? 교회만 왔다 갔다하면 됩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우리들 과연 낫습니까? 무엇이, 얼마나 낫습니까?
* 적용을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 세상의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어떻게 낫습니까?
2.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순종하기가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순종의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3.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어떻게 이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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