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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18. 워싱톤서(5) - 조영진 목사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로마서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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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라는 성경의 선언이 나와 관계 없다고 느끼시지는 않으십니까?
다른 사람의 죄인된 모습을 판단하면서도 자신을 향해서는 관대하기만 한 우리는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도 다를 것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습니다. |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아니 오늘 워싱톤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낸 편지의 말씀들을 생각해보는 로마서 연속설교의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사도 바울이 보내는 문안의 인사에 이어지는 로마서의 주제 말씀, 그리고 인간의 죄인됨에 대한 사도 바울의 외침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죄인됨에 대한 바울의 증언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거룩한 성품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결정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 안에 이 같은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을만한 능력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어떻게 응답합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부담스럽게 때문입니다. 인생들은 하나님 대신에 부담이 안되는 우상을 섬깁니다. 이 같은 인간들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악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고 사도 바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실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들, 동성애라든지 온갖 죄악된 모습들이 만연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망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같은 일을 행할 뿐아니라, 이런 일 행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정당화합니다. 변호합니다.
이 같은 죄악의 모습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도덕적 현실을 감안해보면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잃어가는 시대, 절대적인 윤리의 기초를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상대화 시켜가는 오늘 우리 사회의 윤리적인 기상도는 어떻습니까? 매스컴을 통해 파고드는 쾌락문화는 오늘 어디까지 이르고 있습니까?
Gunter Leny라는 사람은 이같은 문제를 Why America Needs Religion(왜 미국은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이라는 책 속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각종 통계자료에 기초해 볼 때,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훨씬 사회적인 문제들을 덜 일으킨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 만연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부패한 모습입니다. 죄악된 실상입니다. 이것은 먼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I.
그런데 2장에 들어오면, 사도 바울의 편지가 방향을 바꾸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2:1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몇 가지 논의들이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1장에서 지적하는 죄악된 모습은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당시 로마 사회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장부터 기록하고 있는 고발은 유대인들을 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이 같은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꼭 유대인이라고 국한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면서, 2:9,10에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좁혀서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영국의 John R. Stott박사 같은 분은 이 부분을 비판적인 도덕론자들을 향해 바울이 기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세상의 죄악된 모습을 보면서 비판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을 향한 외침이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악을 범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죄악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도덕적인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처럼 죄를 범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신감, 의인의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우월 의식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들은 또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문제가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옥에 있는 죄수들,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범죄자들에게는 해당이 되지만, 자신은 성경의 그런 주장과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라고 반문합니다. 아무리 성경의 지적이라고 해도 나하고는 관계없다는 예의의식이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별적으로 택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한 그것은 동의하지만, 내 생각,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윤리적으로 큰 결함이 없습니다. 비교적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는 먼 나라, 남의 이야기처럼 듣고 생각하십니다.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John Wesley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분들은 "Almost Christian"이십니다. 여러분, Almost Christian이 Christian입니까? 아닙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II.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문제들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1) 사도 바울은 이렇게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갖는 문제로서 먼저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2:1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 여러분, 무슨 이야기입니까?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신도 같은 일을 행하고 있는데, 죄인인데,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제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면 나으면 얼마나 낫겠습니까? 선하면 얼마나 선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고 모자라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구단을 외울 때, 8x7=56 이라고 외웁니다. 그런데 8x7 했을 때 45라고 했건, 57이라고 했건 틀리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57이 그만큼 정답인 56에 가까우니까 낫지 않느냐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낫다고,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죄인되기는 다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죄인됨을 고백하면 되는데, 자신은 다르다고,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바로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문제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해서 가르침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 성전에서 따로서서 자신이 의로움을 말하며 기도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기도했다. 누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가? 세리이다.
여러분, 외면적으로, 도덕적으로 보면 사실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도 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까? 바리새인은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예의의식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2) 이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갖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기에 회개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5에서 이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 주님께서 심판하실 그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회개하지 않습니까? 아니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까?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과 비교해서 자신은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살펴보십시다. 바리새인이 자신이 의로움을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세리와의 비교입니다. 누가복음 18:11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호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여러분, 바리새인이 의로움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죄인들입니다. 호색, 불이, 간음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리입니다. 바로 그 기초에서 이로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의롭다는 우월의식, 나는 다르다는 구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경우의 대부분은 자기 기준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법의 기준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2:5에서 회개하지 않는 마음과 함께 고집을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고집은 권장할 만합니다만. 정말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달려있는 고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깨어질 줄 모르는 고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꿈쩍하지 않는 고집입니다.
제가 이 강단을 지켜온 지도 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주일마다 외친 설교의 횟수만도 수백 회에 달합니다. 그밖에 클래스에서 가르친 횟수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왜 죄인이냐?고 물으실 때는 정말 안타깝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번 저의 부족과 무력을 깨달아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고집을 붙드실 것입니까? 언제까지 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내 생각, 내 주장 위에서 나를 보실 것입니까? 언제까지 용서의 감격도, 감사도 없는 Almost Christian의 삶을 살아가실 것입니까? 언제까지 남을 판단만 하면서 살아가실 것입니까? 언제까지 나는 의롭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계속하실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2:4에서 이렇게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이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깊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여러분, 무슨 이야기입니까? 고집부리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깊이 참으심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으시면서 기다리시는데,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데, 고집부리고 회개치 않는 것입니다. 남은 판단하면서 자신은 다르다고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내 결정, 내 고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의 은혜를 멸시하고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심각히 들어야 할 경고의 멧세지입니다.
(3) 셋째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심판"이란 말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읽어도, 말해도, 들어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고집이 역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사도 바울은 워싱톤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엄숙히 경고합니다. 2:2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리대로 심판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3은 남을 판단하면서 자신도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4-5을 보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는 사람은 그날에 받을 진노를 쌓아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이 있습니다. 2:6 이하의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 기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첫째는 2:6에서 심은 대로,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얽매어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을 내리실 것입니다.
2) 둘째는 율법의 백성에게는 율법이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고, 율법이 없는 백성들에게는 양심이 판단의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3) 그런데 이 같은 하나님의 판단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타이틀이 심판의 면제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게되어 있는데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서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주님 앞에서 나는 의롭다고, 내가 왜 죄인이냐고 주장하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의를 내세우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이런 질문을 드리면, 심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답변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실 지 모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이 있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데, 믿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고집을 부리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대신 내 생각, 내 주장을 의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Almost Christian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의 문제는 바로 이 심판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날이 있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III.
이 아침 나는 괜찮다고,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참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 법 앞에서가 아닙니다. 친구와 비교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살피면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조금 선하다고 해도 그것은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제 삶에서 몇 차례 깊은 회개의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은 세례 받기 전, 성전에 나가 엎드려 걸어온 삶을 돌이켜 보며 드렸던 회개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건강의 문제로 하나님과 담판짓기 위해서 성가산 산상집회에 참석했다가 드렸던 회개의 기도, 또 성전을 짓기 전 새벽마다 주님 전에 나아와 엎드려 기도할 때, 경험했던 회개의 눈물입니다. 이 같은 경험 속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나의 모습의 발견은 성령께서 내 삶을 조명해 주실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빛 앞에 설 때 수많은 먼지를 볼 수 있듯이, 주님의 영이 내 삶을 보게 해 주실 때, 우리는 죄인됨에 대한 깊은 자각과 함께 통회의 눈물을 쏟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별 설교에서 주신 말씀,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한복음 16:8)"는 말씀은 오늘도 진리입니다.
죄인됨을 깨닫기 원하십니까? 오늘도 이 말씀은 나와 상관없다는 이 '자기 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라, 하나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여러분, 오늘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입니까?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입니까?
* 적용을 위한 질문
1. 죄인이라는 성경의 주장을 왜 받아드리기가 힘듭니까? 나의 죄인됨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2. 파스칼의 말을 우리 자신과 연결시켜 보십시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3. 어떻게 하면 성령의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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