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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8. 워싱톤서(3) - 조영진 목사
하나님을 알면서도
로마서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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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참 묘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을, 우상들을 섬기려고 합니다.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왜 하나님을 믿기 어렵습니까?
왜 안 믿으려고 합니까? |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니 워싱톤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온 편지를 함께 생각해 가는 로마서 강해 설교의 세 번째 주일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자기 이해와, 로마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멧세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몇 주 동안은 로마서의 서론에 이어서 전개되는 인간 존재의 죄인됨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8부터 3:20에 이르는 말씀 속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서부터 시작해서 유대인들에게로, 그리고 온 인류에게로 초점을 넓혀가면서 인간의 죄의 깊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쁜 소식, good news이기 전에 슬픈 소식, sad news라고.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말하기 전에 구원이 필요한 상황, 죄인됨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죄인됨의 문제에 대한 증언이 점차 인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죄인됨이란 인간이 갖고있는 연약함 혹은 심리적인 현상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죄인됨의 문제를 말하면, 이 시대를 잘 모르는 사람,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 제쳐놓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제게 오셔서 목사님, 왜 멀쩡한 사람 앉혀놓고 죄인 만듭니까? 라고 항의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이 죄인됨의 문제를 말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끝나고 맙니다. 구원의 길이 아니라 나를 조금 선하게 만드는 길, 나를 조금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수양의 길 정도에 머물고 맙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이지,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착하고 선하게 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게 되면서 나타나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기쁨,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셨다는 고백이 먼 나라 이야기 같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측량 다 못한다는 찬송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 같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왜 그렇게 고맙고 감사한지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죄인됨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되었다는 sad news, 슬픈 소식을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good news, 복음이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다가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아니 워싱톤서에서 먼저 인사와 서론적인 증언을 나눈 후,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인됨의 문제를 심도 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I.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먼저 바울은 두 가지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1) 먼저 1:20을 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라."
여러분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 세상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화가의 작품을 보면 그분의 예술세계가 나타나듯이, 이 세상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신학에서는 자연 계시, 혹은 일반 계시라고 말합니다.
계시는 "열어서 보인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우리 가운데 보여 주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 만물입니다. 우리는 이 우주 만물, 이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성품을 느끼고 발견합니다.
"생명의 길" 클래스에서 자주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자란 충남 예산에는 큰 저수지가 있습니다. 예산과 당진 사이를 잇는다고 해서 예당 저수지라고 부르는데, 오랜 공사 기간이 걸려서 저수지를 완공했을 때, 한번 예당 저수지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 엄청난 규모의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먼저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참으로 위대하구나 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어 논과 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였습니다.
여러분, 저수지 하나를 만든 인간도 위대해 보이는데, 온 우주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위대하시겠습니까? 우주의 광대함과 그 질서, 그 오묘함을 인간이 만든 저수지에 비교하겠습니까? 또 사실 저수지를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머리, 두뇌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우연히 어떻게 하다가 생긴 것입니까?
요즈음 한국에서는 연속극 태조 왕건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태조 왕건이라는 작품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까?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극작가가 각본을 쓰고, 각본에 따라 감독이 연속극을 제작,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한글 알파벳 가, 나, 다, 라를 한 통에 담아놓고 그냥 집어들고 그 알파벳들을 늘어 놓았더니 태조 왕건의 각본이 나왔습니다. 또 Video들이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찍혀져서 왕건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정신이상이 아닌가해서 Fairfax 병원 정신과 병동에 가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왕건이란 작품보다 훨씬 더 오묘하고, 훨씬 더 신묘막측하고, 훨씬 더 위대한 인간 존재와 우주 만물이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소위 지성인이란 사람들 가운데서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영국의 시인 Shelly가 알프스 산을 올라가 보았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경치에 압도되면서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 하나님" 하는 소리가 올라왔지만, 그는 이 생각들을 접어두고 방명록에 "무신론자 Shelly"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 후에 어떤 다른 여행자가 알프스에 올랐다가 Shelly가 적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무신론자 라면 바보, 무신론자가 아니라면 거짓말쟁이."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도 무신론자라고 주장한다면, 바보라고, 무신론자가 아닌데도 무신론자라고 썼다면 거짓말쟁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2) 둘째로 바울이 출발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만한 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라 해도 그것을 깨닫고 이해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변명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해도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는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19을 보면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우둔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안테나가 주어져 있습니다. 물론 K. Barth같은 신학자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것은 아닙니다.
세계 어느 민족을 가도 종교가 없는 민족은 없습니다. 다신이냐 유일신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신적인 존재를 믿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 조상들은 "조물주"라는 말을 사용해 왔고, 또 농사를 짓고 나면 가을철마다 하늘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한 접촉점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 속에서 당신의 신성과 능력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안에 이것을 알만한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II.
그런데 인간이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본문 1:21 이하를 보십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여러분,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또 인간 안에 깨달을 수 있도록 능력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인간이나 짐승의 형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똑똑하다는 인간이 정말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문제를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인간은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에게서 믿음은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관습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의 목적과 길, 그리고 의미에 대한 해답입니다. 인간은 어쨌든 믿음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좋든지 싫든지 믿음 위에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대신 무언가를 믿고 살아갑니다. 옛날 사람들은 임금이나 황제, 만들어 세운 우상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들은 그런 우상들을 믿을 정도도 무식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 믿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지식입니다. 경험입니다. 능력입니다. 가지고 있는 소유입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 것 역시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결코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보이니까 확실한 것 같습니다만, 깊이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처럼 불확실하고 나약한 존재가 없습니다. 여러분, 기왕 믿을 바에야 하나님을 믿지 왜 나를 믿는 것입니까? 우주와 만물 속에서 보여진 그 능력의 하나님, 그 사랑의 하나님을 저버리고 왜 별 볼일 없는 나를 믿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걸작품 인생을 살아갈텐데, 왜 나라는 우상을 믿고 졸작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똑똑한 척 하지만, 정말 똑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척 하지만, 정말 능력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의 물결이 언제 덮칠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시려고 '나'라는 우상을 섬기고 계십니까? 얼마 후면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내 인생인데, 어떻게 하시려고 '나'라는 우상을 믿고 살아가시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광대한 우주 속에서 '나'란 존재는 먼지의 수천 분의 일 같이 미미한 존재인데, 어떻게 하시려고 나를 믿고 살아가시는 것입니까?
(2)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대신 우상을, 나를, 섬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아닙니다만, 1:28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인생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한없이 어리석어져서,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에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대로 휘두르기는 커녕, 내가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그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담스러운 하나님 대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자유에 대한 이해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를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포로가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 자유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믿으려고 합니다. 부담 없는 신,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내가 만든 신, 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대단히 피상적이고 얄팍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부담 없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믿고 그 안에 계시는 길인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자유하는 길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길인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같은 인생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성경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낙원을 잃어버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일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탄의 속삭임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따먹었습니다. 따먹으면 행복할 줄 알고, 하나님처럼 될 줄 알고, 따먹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 이후 벌어진 상황은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불안해졌고, 하나님을 피해 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인간과의 관계, 아담과 하와의 관계도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오늘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니 그 이야기는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 되어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죄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하나님 대신 우상을, 나를 섬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죄인된 인간, 아니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일깨워줍니다.
III.
어느 종교 잡지에 이런 기도문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제목은 "그렇지만, 주님" 이었습니다.
"주님이 말하라는 대로 말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장사를 할 때는 별도로 해주십시오.
주님이 가라는 대로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만큼은 매주일 가라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바치라는 대로 헌금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체면유지 정도로 조정해 주십시오.
주님이 지라는 대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렇지만 짐꾼을 사서 대신 지게해도 그게 그거겠지요?
주님이 사랑하라는 대로 사랑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당장 하라고는 하지 마시고 내일로 미루어 주십시오."
여러분, 왜 "그렇지만" 이 따라붙는 것입니까? 왜 오늘 우리도 "그렇지만"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 나를, 우상을 섬기려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어두운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분명히 기쁜 소식, good news 이기 전에, sad news, 슬픈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슬픈 소식을 바로 깨달으면, 복음은 진정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슬픈 소식을 깨닫지 못하기에 알맹이 없는 속 빈 강정의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가 죄인된 스스로의 모습, "그렇지만" 하면서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합리화시키는 자신의 모습을 깊이 있게 보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하나님 대신 나를,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단순한 도덕을 넘어서는 구원의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외면상의 자유를 넘어서는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될 것입니다. 죄인됨을
넘어서는 은혜의 새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 적용을 위한 물음
1. 오늘 이 시대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우상은 무엇입니까?
2. 내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지 아니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나의 신앙 여정에서 죄인됨을 느끼고 깨달은 적이 있으십니까? 함께 나누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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